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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Jun 22. 2022

한밤의 나방사건


본래 화장실이라는 공간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곳 아니던가. 이런 특성 때문에 들어가 있는 사람, 즉 내가 만들어낸 소음이 아니면 소리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들만 빼면.


한번은 그 은밀하고 조용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분명 고요해야 하는 때에 오른편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 게 시작이었다.


신경이 곤두선 나는 소리의 원인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방금 내가 들은 소리와 가장 유사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샤워부스에 붙여놓은 뽁뽁이(이걸 뭐라고 부르더라...;;)의 밀착력이 떨어져서 나는 소리이겠거니 싶었다. ‘안 되는데. 그러면 샤워기가 떨어지면서 금이 갈 텐데.’ 이런 걱정 반 우려 반이 담긴 표정으로 뽁뽁이가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를 살피는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갈색에, 민첩한 날개짓으로 인해 그 정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그러면서 사물에 부딪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는.

순간적으로 공포감(?), 두려움(?)을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어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다음 동작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의 동작은 나의 동작보다 빨랐다. 문밖에서 내 비명소리를 들은 남편이 “왜, 왜, 무슨 일이야?”를 외치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젠장, 내 프라이버시는 어쩌고?)

그렇게 나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나를 서둘러 방비하고, 내가 목격한 것에 대한 정체를 설명한 뒤, 살충제를 남편 손에 쥐어주고, 해결하지 못하면 나오지 말라는 무언의 눈빛과 함께 남편을 화장실에 밀어 넣고 문을 꽉 닫았다.

몇 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살충제 뿌리는 소리를 끝으로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던지는 무심한 한마디. “아, 나방이네.”


-


한순간 내 등을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든 정체불명의 소음 유발자가 나방이었다는 사실에 허탈하면서도 안도감이 찾아오자, 그제야 무방비한 상태에 놓인 나를 배려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뭐든 느려서 별명이 늘보인 남편인데, '이럴 때는 또 동작이 빠르구나,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면 그래도 이 정도 속도로 반응은 하겠구나' 라는 생각.

에프킬라를 한 손에 든 채 한 손으로는 문을 닫는(물론 문닫기의 마무리는 나였지만,) 뒷모습이 세상 듬직해 보일 수 있다는 깨달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생각해보니 남편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있잖아, 만약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거야?”

남편은 1초의 고민도 없이 “가야지! 나는 서울로 가야 돼. 근데 전쟁이 나면 서울까지 어떻게 가지?”라며 내 질문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대답을 했었다.


“아니, 내가 여기 있는데 간다고? 그럼 나는 어떡해?” 흔들리는 내 눈빛에도 남편은 의지가 확고한 듯, “전쟁이 나면 가야지. 그게 국민의 의무야.”

그때는 ‘너를 지켜야 되니까 안 갈 거야.’라는 대답이 아닌 국민의 의무를 운운하는 남편에게 내심 서운했는데, ‘나방 사건’을 겪고 나니, 이게 이 남자의 사랑법인가 하는 생각에 문득 마음이 따뜻해진다. 참 뜬금없지만.


-


나는 항상 사랑이 뭔지 고민했다. 아직 그 의미에 대해 정확히 정의 내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건가. 아니면 내 사랑이 미숙해서 이런 생각이 들어오는 건가.’ 하며 내 마음을 의심하고는 했다.


어쩌면 내가 사랑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놓고, 묵직한 무게를 얹어놓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비일상적인 특수한 것을 사랑이라고 바라보았기에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한 일들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니 스스로 헤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미를 명확히 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우회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사랑은 쉽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 발현되는 모습을 통해 ‘이것이 사랑이구나.’라고 느끼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나는 짧은 비명소리에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의 뒷모습 마냐 살충제를 손에 든 채 굳게 문을 닫는 것, 그러고는 ‘많이 놀랐어?’ 하며 상대방을 더 걱정해주는 것.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부부가 아니었다면, 무시했거나 지나쳤거나 오지랖이 되었거나 프라이버시 침해가 되었거나 고맙다고 느끼고 끝났을 것들이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해주고,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거창하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위대하지 않아도, 그것이 사랑이 드러나는 모양새인 것 같다.

‘그래,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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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훈훈한 마무리…

일 줄 알았지, 남편?

그런데 내가 아팠을 때는 고기 굽느라 바빠서 나한테 안 오더라. 그때는 왜 그랬어?

(원래 MBTI 'INFP'인 사람은 ‘용서는 하되 기억함’이라고 하더라. 미안. 용서는 했는데, 자꾸 떠올라ㅎㅎ)


(사진 출처: 픽사베이의 adamkon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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