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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Jul 11. 2022

'이기'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어버린 생각이 하나 있다. 노 키즈 존(no kids zone) 안내문이 붙어있는 곳을 방문할 때면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하다는 생각. 그렇다고 굳이 수고롭게 발걸음을 옮겨 공간 어딘가에 마련된 노 키즈 존에 자리를 잡거나 노 키즈 가게를 간 적은 없지만, 언제고 내가 필요로 할 때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조용한 게 좋아서 집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옆 사람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을 하는 나에게 타인이 만들어내는 요란한 소란은 언제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고, 주위를 산란시킨다.


그날이 딱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묶은 회포를 풀기 위해 찾은 카페. 조용할 것이라 예상한 시간, 조용하길 바라며 찾은 한적한 카페에 이미 자리를 잡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되도록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언제나 그렇듯 습관적으로 구석으로 구석으로, 그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막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몇 모금 마셨을 무렵, 눈앞에 앉아있는 친구보다 주의를 집중시키고 신경을 쓰게 만드는 존재가 나타났다. 보는 사람이 더 불안하게 발뒤꿈치를 떼고 내달리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뭐가 그리 신났는지 꺄르르 웃다가 목소리 높여 엄마, 아빠를 부르는 아이들.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카페 주인의 경고가 적힌 문구와 몇몇 사람이 간혹 내뱉는 한숨은 무시당한 채 바닷가 보이는 고즈넉한 카페는 순식간에 알록달록 고무공이 가득한 키즈카페로 변신해 있었다. 덕분에 친구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려던 계획은 바스스 무너지고, 즐거웠던 감정선도 바스스 무너졌지만, 남에게 쓴소리, 아쉬운 소리 잘 못 하는 성격은 침묵과 관망을 택했다. 그저 고개를 두세 번 가로젓는 것으로 불만은 기화할 뿐이었다. 물론 마음속에는 그을음이 남았겠지만.        



   

어느 날,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를 봤다. 카페에서 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근처에 앉아서 공부하던 사람이 조용히 좀 해달라고 적힌 쪽지를 건넸다는 이야기. 글 밑에는 쪽지를 남긴 사람을 비난하는 댓글이 달렸다. ‘그럴 거면 독서실이나 스터디 카페를 가라, 카페는 대화하는 곳이지 공부하는 곳이 아니다, 무례하다, 본인만 생각한다’ 등등.     


비슷한 경험이 내게도 있었다. 사람의 입장이라는 게 또 한결같지는 않아서, 이번에는 내가 가해자의 위치에 섰다. 카페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뒤엉켜 시장바닥처럼 되면서 앞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때, 내 목소리도 그것들과 한데 어울려 점점 커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두꺼운 교재를 탁 소리 나게 접고 신경질적으로 필통에 펜을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씨, 시끄럽네, 진짜. 여기가 지들 안방이야?”

적막하지 않은 카페에서도 그 소리는 귓속에 내리꽂혔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를 계속 바라보다가 나를 비난하듯 쳐다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가로 저었던 내 고갯짓과 오버랩 됐다. 그는 짐을 챙겨 나갔고, 그 후에도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넋을 놓고 그 상황에 계속 머물며, 마치 바둑기사가 된 것처럼 상황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피해는 주지 말자는 게 내 신조였는데, 내가 나만 아는 이기주의자처럼 되어버린 것인가.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땐 남이 조용하길 바라면서도, 남이 조용하길 원할 땐 소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런 것들을 이중잣대라고 하고, 내로남불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고민에 빠졌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어디까지가 개인주의고 어디서부터가 이기주의인지. 고민을 거듭할수록 그 경계가 애매모호 해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왜 침묵했을까. 만약 침묵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내가 옳다는 생각에 “카페가 공부만 하라고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 집중해야 되면 도서관에 가던지 스터디카페를 가면 되지 않나요?”라고 말해버리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그의 “애들이 뛰어노는 것쯤 그럴 수 있지. 어른이 그 정도도 이해 못 해요?”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이익과 내 입장만 생각하는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만 위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나를 위하는 게 남을 위하는 것이 되지는 못해도, 나를 위하는 순간 조금이나마 너를 위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바람을 여전히 마음 한편에 간직한 채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무조건 맞는 것도 아니야. 나는 너를 받아들일게. 그것이 너의 이익이라면.’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쉬운 마음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달아놓은 댓글을 보며 위로했다.     


이 가볍고 일시적인 위로는 정말 괜찮은 걸까. 마음의 그을음을 남긴 채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남긴 채로 이 정도에서 위안을 얻고 다행이라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까. 아니, 이게 전부이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다수의 말이 무조건 맞고, 다수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아들이면 안 되지 않을까. 다수결의 원칙은 어디서나 유용하지만, 공공연하게, 그것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만은 쓰고 싶지 않다.

다수의 말이든, 소수의 말이든 모두 틀릴 수 있고, 모두 맞을 수 있는 거니까.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사회의 규칙이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라는 게 존재하리라는 신화는 접어둔 지 오래니까.

나는 다시 생각을 바꾸고, 중립을 선택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이게 맞고, 또 다른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저게 맞겠지.’     


어정쩡해 보이고, 별다른 대응책도 없어 보이는 중립을 유지하다 보면, 조금씩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인지하고, 내가 수용할 수 없었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기주의든, 개인주의든 올바른 형태로, 그러니까 올바른 형태란, 나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종종 목격하는 이기주의를 지금이 과도기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틀렸다. 너도 틀렸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그리고 나에겐 나의 사정이, 너에겐 너의 사정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며 넘겨보려고 했다. 그것은 또 사실이니까. 나의 이익을 생각하고, 그에 반하지 않게 행동하는 ‘이기’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카페에서 방해받지 않고 있고 싶은 건 나를 위한 것이고, 카페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은 것 역시 나를 위한 것이고, 카페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것 역시 나를 위한 것이니까. 모든 것이 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우리에겐 지금과는 다른 과거가 있었다. 오랫동안 타인을 위해,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질서를 위해, 어쩌면 나라를 위해 포기하고 양보해야 했던 우리였다. 내가 양보하면 너도 양보할 것이고 그럼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그것이 미덕이고 사회가 돌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죄악시하고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우리의 과거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은, 지금 내가 흘려보내며 살고 있는 시간은 예전의 공기와는 다르다. 제법 건조하지만 보송한, 그러면서도 시원한 공기가 주위에 가득하다. 나를 생각하는 것을 이기주의로 매도했던 반쪽짜리 목적 가득한 시선은 점점 사라졌다. 나를 더 생각하고,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진 변화의 흐름이고, 이 흐름 속에서 나는 또 내 방식대로 유영하며 산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시대에는 이런 말들이 가득하다.

“내가 옳아. 하고 싶은 말은 해야 돼. 진짜 내 모습으로 살아. 눈치 보지 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가까운 옛날, 좋지 않은 것이라고 규정했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드디어 오명을 벗고 너무나 친숙하게 우리 곁에 머문다.


그러나 내가 동의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당신도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나를 위하고 나답게 사는 삶의 태도는 자꾸만 그 너머의 것으로 구르고 흘러간다. 누군가는 여기서 한 걸음, 아니 두서너 걸음 더 앞서 걸으며 이렇게 말한다.

“타인을 위해 맞추지 마. 참으면 안돼. 그 무엇보다 내가 중요해. 그러니까 내가 희생할 필요 없어. 내 이익이 무조건 우선이야.”     




어느덧 개인주의도,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는 이기도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한다. 진화의 방향이 앞으로 향하는지 뒤로 향하는지,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이 과도기의 시기에 누군가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혹은 아직 거기까지 동의하지 못해서 크레바스처럼 쩍 벌어진 생각과 실제의 간극에 빠져 고통을 겪는다.

문제는 간단치 않다. 상처 입은 마음도 곪고 곪는다.         

 

그래, 이것도 저것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다지만, 이런 경우엔 어떨까. 이런 일이 생겨도, 단순히 내 이익을 위해 행동했으니 잘한 것이라고, 너도 옳고 나도 옳은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른 새벽, 사이렌이 울리고 소방관들이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릴 때, 불이 난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위아래 층의 초인종을 누를 때, 사다리차를 올리기 위해 주차되어 있는 차를 이동해달라고 연락할 때, 사람들과 물건이 뒤엉킨 소란함 속에서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야야, 저기 차 조심해.”

제법 비싸 보이는 차의 주인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그 차를 밑에 두고 사다리 차를 올려야 했던 소방관을 향해 동료 소방관이 외친 씁쓸한, 직업의 노하우이자 조언이었다.     


‘도대체 우리에겐 뭐가 더 중요한 걸까.’     


현실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고, 상상 이상으로 가혹하다. 혼란해진 틈을 비집고 또 다시 혼란한 말이 귀에 와 박혔다.

소방관이 현장을 떠난 뒤 뒤죽박죽이 된 집을 보며, “아이씨, 문고리를 뜯어놨네. 사방이 물 천지잖아. 이 새벽에 뭐 하는 짓이야.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같은 말들이. 10분 넘게 경보음이 울리고 소방관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깨워도 나오지 않았던 사람들,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오랫동안 울리자 그제야 귀찮은 듯한 표정을 하고 나온 사람들, 누군가의 노력으로 오늘의 무사함을 선물처럼 얻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며 한 말들이었다.  

   

같은 시간을 사는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으로 공존한다. 공존이란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해야 하는데, 누군가는 누군가의 방해로 영원한 잠의 세계로 가지 못했고, 누군가는 누군가의 방해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야 했던 공존의 시간. 이 시간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내일을 위해 잠들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누군가는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어 이제 끝내려고 했던 시간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신고하지 않았다면 불이 옮겨 붙거나 연기가 퍼져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존이 아닌 듯 삐그덕거렸지만, 결국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공존이 더 뚜렷하게 와닿는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각자도생하며 자존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말이 가능했을까. 지금 불을 꺼야 하니 차 좀 빼달라는 할 때 “그건 내 알 바 아니니 알아서 해. 차에 흠집이라도 나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불이 옮겨 붙으면 위험하니 대피하라고 할 때는 “아이씨, 죽을 거면 얌전히 죽을 것이지, 민폐 끼치고 지x이야”라고.     


수화기 너머 전해오는 말들을 들으며, 아무개의 자살 사고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더 이상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자각한다. 여차하면 누군가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다리를 건넜을 그 순간, 또 여차하면 나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목숨이 아니어도 또 다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에, 오직 나만의 잠을 위해, 귀찮지 않음을 위해, 나의 편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우리의 이기와 개인주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1시간 더 자는 게 뭐 그리 중요해. 손잡이가 좀 부서지고 건물이 물로 더러워지는 게 뭐 그리 대수야”라고.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기는 어느 곳을 향하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개인주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나답게 살고, 나를 위해 사는 동안, 그에 대해 따르는 결과물에 대한 책임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일까. 이제 막 나답게 사는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혹한 일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진짜 이기이고 개인주의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내 이익만을 생각하며 내린 결정이 분명 책임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법적으로, 금전적으로 피곤함을 가져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때로는 마음의 짐이 더 묵직하게 다가올 테니까.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의 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다가올 때가 분명 있을 때니까.    

 

나만 아는 이기, 나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 그리고 내 생각이 옳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풍조가 만들어낸 이기. 이런 이기가 아닌 조금 더 건전한 이기가, 더 발전한 개인주의가 우리 주변에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이미지 출처: by Kelly Lima from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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