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캐는 본캐답게, 부캐는 부캐답게

가면의 상처를 내 상처로 키우는 당신에게

by 임경미


게임을 아주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높은 레벨로 오르기 위해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부캐 키우기.(부캐란 게임에서 본래 캐릭터가 아닌 새롭게 만든 부캐릭터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부캐를 육성할 시간에 본캐를 열심히 키우는 게 더 유리하지 않냐고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온라인 게임은 협동을 요하는 경우가 많아서 언제든 나를 도와줄 존재가 있으면 유리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도구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쓰지는 않지만, 집에 짱박아 놓기엔 아직 성능이 좋은, 휴대전화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된다.


부캐를 키우는 게 번거로워 보이지만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나면 부캐는 본캐에게 아주 도움이 된다. 가령 본캐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부캐가 도와줄 수 있고, 본캐와 부캐가 팀이 되어 협동 레이스를 펼치면 혼자 한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본캐 하나만 외롭게 키우는 것보다 부캐와 함께 키우는 것이 더 빨리 크고, 더 잘 큰다.


씁쓸하지만, 부캐는 본캐를 육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본캐를 돕는 것. 그것이 부캐의 숙명인 것이다.

나에게도 본캐가 있고 부캐가 있다. 진짜 나의 모습은 본캐이고,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본캐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이 바로 부캐이다.




나의 본캐는 ‘게으르고, 귀찮아하고, 예민하고, 착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등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혹은 본캐로 부족할 때 그러니까 본캐가 가진 능력 외의 능력이 필요할 때 부캐가 등장한다. ‘적극적이고, 나서길 좋아하고, 관대하고, 참을성 있는’ 등의 성향을 가진 부캐가.


부캐는 이른바 가면이다. 페르소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나만의 또다른 나. 우리는 살면서 수없는 가면을 쓴다.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사회인으로서, 친구로서. 위치와 역할과 상황에 맞춰 적절한 가면을 고른다. 가면 쓰기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물론 가면을 쓰는 것을 나쁘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게임 속 부캐를 키우는 것처럼, ‘나’라는 본캐를 돕기 위해 가면을 쓴 여러 부캐를 만들고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본캐가 받을 충격을 줄일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으니까. 가면을 쓰는 것은 내가 더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고 우려스러운 점은 있다. 가면을 쓰는 것이 너무 익숙해서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가면을 쓸수록, 부캐를 키울수록 부캐와 본캐를 혼동한다. 그래서 본캐가 필요한 자리에 부캐를 드러내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조차 부캐를 장착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내 본캐와 부캐를 구분하지 못하기까지 이르는 것이다.


회사를 다닐 때 내가 그랬다. 수많은 부캐와 가면을 만들어냈고, 부캐 모드와 가면 쓰기가 길어지면서 부캐의 모습을 본캐라고 생각했다. 부캐가 받은 데미지를 본캐가 받은 것이라고 느껴서, 직장인으로서 받은 좌절감을 인간 임경미라는 사람의 좌절로 연결시켰다. 인간관계나 회사일에 문제가 생기면 나라는 존재 자체의 문제로 인식했으며 일부분의 미흡함을 총체적인 결여로 받아들였다. 직장인 임경미의 실수를, 딸 임경미의 실수, 친구 임경미의 실수, 아내 임경미의 실수로 확장시킨 것이다.

또한 본캐와 부캐가 갈등을 일으킬 때,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마음의 변덕과 감정의 동요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 역전 현상이 길어질수록 나는 화가 났고, 우울했고,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나를 질책하고 힐난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본캐와 부캐는 제 역할에 맞춰 쓰여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부캐를 작동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 부캐를 본캐로 인식하게 된다. 도움을 주는 부캐가 본캐처럼 활동을 하는 것이다. 또한 본캐와 부캐를 잘 구별해야 한다.

부캐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적재적소에서 사용해야 한다. 무엇이 내가 필요에 의해 쓰기를 선택한 가면의 모습인지, 이 가면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필요한 가면인지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면 속 진짜 내 모습도 알아야 한다. 처음엔 본캐와 부캐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자주 나를 관찰하며 나의 본캐를 인식하면 좋겠다. 그래야 부캐는 부캐대로 제 역할을 할 수 있고, 가면의 상처를 가면 속 나에게로 투사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사진 출처: Pixabay의 5598375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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