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tag)도 없는 인생
광고대행사에서의 첫 1년은, 좌절과 도파민 사이를 오가며 정신을 붙들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광고주가 요청한 당시 내 기준에서는 ‘이런 일까지 기대했던 것은 아닌데’ 싶은 일들을 쳐내며 속으로 연신 욕을 해대고, 머리가 핑 돌 만큼 화를 냈다. (광고주의 회사에서는 컬러 프린트가 어려우니 컬러로 프린트해서 보내달라는 요청도 받아본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이해될 만하지 않은가?)
그러다가도 아이디어 회의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생각들 사이를 유영할 때면, ‘아 그래, 내가 생각한 광고쟁이의 삶은 이런 거지. 상업과 창의를 오가는 이런 삶’에 취해 즐거웠다.
내 아이디어의 단어 하나라도 좋은 코멘트를 받으면 뭐라도 해낸 것처럼 기뻤다.
같은 숙제를 가지고 각기 다른 접근 방식과 생각들로 풀어내는 것이 신기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는 왠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지만, 막상 회의에 들어가 보면 그 아이디어가 나만의 것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론 내가 낸 아이디어 중 택도 없는 것도 많았지만, 다행히 신선하다 할 만한 아이디어가 있었던지 ‘싹수가 보이는 신입’이라는 태그가 나에게 붙었다.
처음 광고 촬영을 위해 촬영장에 갔을 때는, 내가 TV와 극장에서 보던 그 촬영 현장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꼈다.
그 순간의 설렘은 아직도 손발이 저릿할 만큼 생생하다.
그렇게 매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지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내가 하다니 느끼다가도, 이 찰나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일상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사실 ‘광고쟁이’로서의 즐거움이나, 브랜드와 제품의 태그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의 진가를 깨닫기에는 그때의 나는 ‘을의 무게’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광고 대행사의 주니어에게는 내가 꿈꾸던 브랜드 전문가로서의 업무보다, ‘을’로서 광고주의 요구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심부름꾼 같은 역할이 더 많았다.
이 현실은 우리를 충분히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 시간을 이겨내야 나에게 비로소 광고인의 태그가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많은 동기들이 트랙을 이탈했다.
기대했던 광고인으로서의 삶은 간헐적이었고, 고통만이 따르는 회사원의 현실을 1-2년 안에 포기했다.
어차피 회사원일 거라면 좀 더 편하고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직장을 택하겠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와중에도 나에게 붙은 ‘광고인’이라는 태그가 좋았다.
여전히 회사원이었고, 야근과 주말 출근이 반복되는 삶에 지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이 멋지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인복이 있어 좋은 선배들과 동료 덕에 힘든 와중에도 고민을 나누고, 농담도 주고받으며 버텼다.
미팅과 미팅 사이 잠깐 들른 카페도 좋았고, 늦은 밤이나 새벽에 편집실과 녹음실에서 잡힌 미팅도 어딘가 근사해 보였다.
나는 ‘광고인’이라는 태그를 갖기 위해 버티고 있었다.
그 태그가 내가 원했던 것과 달라진다는 걸 느끼면서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건 그것이 내가 꿈꾸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그 순간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한, 상상하던 그 인생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태그를 쉽게 내려놓지 못할 것 같았다.
1장. 드림태그(Dream Tag)를 갖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