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지 않게, 아, 살살 넘어지게
친구는 내가 보내준 산세베리아의 꽃대 사진의 답신으로
"행운의 꽃이 핀거네. 축하해. 올해 결실이 맺어지나 보다."
했다. 이중언어를 사용한 의사소통의 원활함을 위해서 시작했던 석사학위는 시드니에서 2001년에 마쳤으니, 2022년 7월... 20여 년 만에 결실을 거두나 보다. 합격자 수가 적은 해의 NATTI 번역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석사학위를 마무리할 즈음은 꿈이 출렁출렁하던 시간이다. 그리고 시드니의 큰 도로 사거리 한복판 멈춤 신호등에서 심장발작을 일으킨 80세 운전자가 브레이크와 엑셀을 순간 혼동하여 액셀을 밟으며, 빨간 불에 멈춰서 있던 건너편의 내 차를 덮쳤다고 했다.
귀국을 앞두고 건강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뒷좌석의 부모님과 함께 운전석의 몸이 햇살 속으로 둥둥 떠가던 그때의 느낌은 여전히 응시하기 어려워 마음 깊은 어딘가에 눌려있다. 시드니에서의 병원생활이 서울로 이어지며 도로 위에 불쑥 내민 바위 위에 넘어진 것처럼 공부를 멈추었다. 그리고 20여 년 만에 병치레 중인 성인 큰 딸의 새삼스러운 보호자가 되어 병원생활이 잦아진 시간들이 내리막길의 나이인 엄마를 학교로 다시 인도한 셈이다.
"따님이 책을 워낙 좋아하니 심리치료로 공부를 시작해보면, 학교 가는 날만큼은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하던 미술심리치료사의 권유로 시작한 학교 가는 길은 예상보다 멀고 참 고단했다.
가족이 함께 동행한 답사를 거친 뒤 아이 아빠가 적극 지지했다. '주 1회 서울쥐의 피크닉'으로 생각하자고 했다.
'서울쥐들의 피크닉...'
두 여자의 고속철도 운임이 적지 않았지만 그 또한 병원비와 약값보다는 보람 있으니 저렴하다고도 했다. 4주만 다녀보기로.... 그리고 여차하면 119로 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엄마가 동행하기. 심리치료과정으로 생각하기. 공부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다행히 두 여자의 취미가 '책을 손에 들고 다니기'이니...
엄마 보호자가 딸의 강의실 복도에서 춥고 더운 계절에 하염없이 대기하기는 민망하므로, 합법적인 교실 보호자가 되기 위해 함께 입학시험을 보고, 같이 등록했다. 우리 한 달만 치료받는 걸로. 그러면 학비도 반환된다고 했으므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준비하면 용산역을 출발하는 KTX의 도움으로 학교에 9시 30분에 도착, 저녁 6시 30분에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집에 도착 밤 11시... 귀갓길에 이미 처지기 시작한 큰 아이는 다다음날까지도 숫제 침대에서 가수면 상태로 눈을 못 뜨곤 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
컴퓨터 문해 능력이 뒤처지는 만학 생은 1시간을 달리는 고속열차에서 노트북을 켜고 미진한 PPT 마무리를 하고... 과제가 마무리된 날은 기차에서 최소한 50여분은 눈을 붙일 수 있다. 둘 중 한 사람은 깊이 잠들 수 있어서, 둘이 함께 하는 여행은 참 좋다. 대학원 동기생이 두 번이나 그랬듯이, 둘 다 잠드는 날이면 종착역인 목포에서 눈뜰 수 있으므로 보호자인 나는 제정신을 유지하기이다.
주 1~2회 남편의 정성과 기도가 가득 담긴 3개의 아침. 점심. 저녁용 식이요법 도시락, 메스꺼움을 줄여주는 비릿하지 않은 생수, 딸아이의 속 뒤틀림을 잡아주는, 집에서 만든 유자즙과 블루베리 원액이 담긴 보온병 들... 2개의 묵직한 먹거리 가방과 각자의 책 배낭을 메고 가는 KTX 기차여행이 학교 가는 길이니 얼마나 즐거운 일상인가?
대학병원 여러 과의 진찰과 검사로 채워진 잦은 병원 일정에도 불구하고 입원 기간 외에는 거의 출석이다. 빈맥, 부정맥, 기립성 빈혈을 동반한 딸아이가 누울 수 있도록 처음엔 침낭을, 다음엔 양털 방석을 들고 다녔다. 매 학기 등록 시기에는 자퇴 여부로 가족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경영학을 전공한 작은딸은 "투자 대비 가성비가..."하며 늙은 엄마의 고단함을 안타까워했다.
기차 속에서도 큰 아이의 메스꺼움과 구토, 손발과 얼굴 저림은 찾아오고...
문득 3학기가 지나면서부터 뜻밖에 병원 검사 일부 결과들이 안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율신경계나 전해질 불균형으로 인한 불시 입원도 드문드문 늘어지기 시작했다. 수술 후 5년이 되면서 급할 땐 동트는 시각까지 선행연구 지료들을 읽을 수 있는 체력으로 회복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얼음처럼 차가웠던 손발이 8년 만에 원래처럼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신장에 칼슘 찌꺼기가 쌓이게 만드는 약의 도움이 크지만... 보호자인 내게도 대상포진이 2번 다녀갔다.
"인준지 도장 모두 찍었으니 이제 출판하세요~"
다섯 분 교수님의 최종심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지는 지도교수님의 진짜 최종심은 여러 차례의 교정을 거쳐서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200페이지에 이르는 제자의 논문을 끝까지 읽으며 교정 거리를 확인해주신 교수님... 이어서 인쇄소 사장님의 정성 가득한 반복 교정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위 논문의 오자는 줄여가는 것이지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위로를 건넨 심사위원 교수님들의 말씀처럼 여전히 발견되는 오자와 탈자들...
5년여 동안 밤샘 일정은 열 손가락 수의 열 배도 넘어서 셀 수가 없고... 아, 이렇게 과로하다가 인사도 못 나누고 하늘로 갈 수 있겠구나 싶게 새벽녘 뒷머리의 묵직한 불쾌함이라니... 낫지 않은 꼬리뼈 통증과 한쪽 팔 마비, 마우스에 붙어있는 손가락과 손바닥의 플라스틱 알레르기 통증은 보너스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가 특기는 못되지만 취미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능력에 넘치는 일을 취미로 머리가 선택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것도 실감하게 된 긴 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너편 아파트 창들의 불이 까맣게 꺼져있는 밖을 응시하며 홀로 깨어 뻑뻑한 눈을 돌릴 때의 뭉클함... 눈물샘에 눈물과 항생제를 보충해주며 지속된 배움은 늘 신선하고, 학습은 쫄깃한 기쁨이 있다. Covid 19으로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된 기간 동안 두 연구자는 정말 열심히 인터넷을 통해서 매일 해외 선행 논문들을 찾고, 읽고, 선별하며, 폭을 넓혀갔다.
가족이 동료 연구자가 된다는 기대 이상으로 훠얼씬 즐겁고 든든한 일이다. 더구나 생각과 일하는 스타일이 서로 보완적인 두 사람이 같은 길을 향하여 걸음을 내디뎌 두근두근 기대도 된다. 감사의 글을 준비하며 논문에 코를 박은 5년여를 돌아보았다. 5년 동안 오른 계단마다 수많은 손길이 깃들어있다. 그리고 브런치 여러분들의 도움도... 나의 손길도 누군가에게 적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뭔가의 마무리는 새로운 시작이니 푸른 하늘의 흰 구름처럼 희망이 뭉실거린다. 출판사와 대학교재 출간을 준비하며, 해외 '읽기 도우미견' (Reading Dog) 프로그램의 사진을 고르면서 새삼 유기견인 반려견 말티스 '수리'에게 고맙다.
"수리야, 누나를 일으켜 세워줘서 고마워~"
이제 오래 기다려준 옆지기와 함께 모처럼 극장 나들이를 할 수 있겠다.
길을 가노라면 늘상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곤 하지만 그래도 살살 넘어지기를...
그리고 우리는 일어서는 희망을 품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