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망가진 사이의 우리 둘은 우연히 길거리 현수막에서 발견한 서울시 여성 발전센터의 <동화구연 지도사>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아프기 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두 여자의 소원을 <동화 읽기>로 풀어보기로.
40kg대로 가냘퍼진 딸은 미소가 예쁜 열성적인 강사 덕분에 동화구연 3개월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첫 무도회 때 입었던 핑크빛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를 걸친 공주로, 엄마는 파란 망토를 어깨에 걸친 개구리 왕자로 분해서 초대받은 유치원 원아들 앞에서 동화구연을 했다.
건강한 엄마랑 암환자인 서른 살의 딸은 동화를 읽으며 서로에게 그렇게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처음 대학병원 암병동에서 본 적이 있는 <웃음치료> 과정을 이곳에서 발견하고 엄마와 딸은 마음속으로
'말도 안 돼...' 했다. 점잖은 편인 우리 성격에 어찌 억지웃음을... 그리고 울음이 가슴 가득 출렁대는 판국에 웃음 가루가 있기는 할까?
그러고도 다음 학기에는 멋적어하며 웃음치료사 과정에 등록했다. 병원과 너무 가까워진 일상이 오직 고단하여 접어둔 노래를 웃음치료 덕분에 2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웃음치료는 노래를 하며 '소근육. 대근육 운동'이라는 손동작과 발동작, 그리고 몸동작을 강사의 지시에 맞춰 따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3~4인의 소그룹을 만들어 돌아가며 무대에 세워진 참여자들의 몸치와 웃음치가 나타날 때마다 강사의 지도로 함께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시도하는... 맨 정신으로는 꺼내기 어려운 웃음을 단체로 띄우는 웃음치료.
대학시절에도 부르지 못했던 낯선 트로트의 가사를 외워야 하고, 몸치에 노래치에 웃음치가 된 두 모녀의 어색함이라니... 그곳에서 가장 어린 30대 초반의 큰딸은 낯선 스타일의 노래에 질색을 했다. 매주 그만둘까 갈까를 고민하며 몸과 마음이 끝까지 겉돌았지만 그렇게 3개월을 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큰딸은 종일 이어지는 약 복용과 구토, 메스꺼움을 겪으며 거의 매일을 여전히 침대에 누어 자는 편이다. 주 1회 회당 3시간 진행되는 웃음 치료반에 규칙적 출석이 이어지면서 엄마에겐 아픈 딸 옆에 앉아서도 이제 눈치를 덜 보며 노래를 중얼중얼 낮게 흥얼거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프지 않은 엄마는 딸의 고통을 공감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으므로.
"네가 있어 행복해~" 가사만 반복하지만
가사 그대로 행복하게...
주 1회의 나들이...
썩 괜찮은 외출 방식이다.
면역이 낮으니 두 사람은 휴대용 손소독제 알코올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손을 헹구었다.
주 1~2회는 병원을 가고, 주 1회는 동화를 읽거나 웃음치료를 가는 팔자 좋은 일상으로.
그리고 남편은 두 여자의 외출에는 언제나 자동차 운전을 맡아준다. 딸을 위해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큰딸에게 뭐라도 기도하듯 정성을 쏟아야겠다는 그이의 간절한 기도 실천방법이다. 덕분에 엄마인 나는 직접 운전하던 때보다 주차료 걱정은 줄었다.
큰딸 덕분에 엄마는 식탁 앞에서도 동화원고를 부분 부분 시연하며, 갑자기 어린이가 된 것 같이 행복한 시간들이 더러 생겼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 청년, 아가씨, 남. 녀 중학생, 남. 녀 초등학생, 남. 녀 유치원생 , 그리고 3-4세 남. 녀 유아 목소리를 한 사람이 다 연습하는 과정이라니...
세상에 쉬운 게 1도 없다는 말에 공감 중이다.
편하게 놀자고 등록한 한글 동화구연이 뜻밖에 만만치 않다.
목에서, 배에서 나와야 된다는 소리 내기... 번번이 실패하는 목소리 흉내가 쌓이는 동안 마치 연극무대라도 오를 듯 즐거움도 잠시 잠시 스멀거렸다.
감정선을 잡아 대사를 함께 치는 일은 잠시 딸아이가 불편한 통증과 구역질의 고통을 조금은 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심지어 2페이지나 되는 대사를 외우는 수고라니...
이것도 결국 고단한 스타일의 공부였다, 세상에... 꿈속에서도 싫었던 지긋지긋한 공부를 제 발로 들어가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라니...
그리고 3개월이 지나며 즐거운 공부의 존재와 즐거운 공부의 즐거운 효과를 경험하였다.
이왕 망가진 웃음치료에 이어서 어린 시절의 놀이를 배운다는 <오감놀이 지도사> 과정에 등록했다. 각각 3개월 과정으로 구성되어서 이렇게 일 년을 즐거운 공부 놀이로 채웠다. 우리 두 여자는 병원 가는 일과 외에 어딘가에 규칙적으로 다니는 일은 불가하니 그저 즐겁게 놀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어릴 때 했던 놀이들을 전문가의 지도로 기억에서 끄집어낸 오감놀이 지도사 과정을 마친 직후인 지난 주말엔 40년 만에 해후한 대학 서클의 선후배들 모임에서 원래 점잖은 과였던 엄마는 웬 용기로 웃음치료를 시연해 보이고 모두의 ‘박장대소’를 끌어냈다. 원래 점잖은 편인 후배가 교사 은퇴 후 댄스강사로의 변신이 엄마를 부추긴 셈이다. 두 여자의 원 성품과 정반대 방향으로의 노년의 변신은 그곳에 모인 선후배들의 두 눈을 한껏 커지게 했다. 세월이란...
그리고 동영상으로 올려달라던 그들의 동그랗게 뜬 눈과 즐거운 웃음소리를 엄마는 가슴에 담아왔다, 일주일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30여 년 만에 연락을 준 후배가 강추했던 귀하디 귀한 자리였다.
요즘은 <미술심리치료 지도자> 과정에 주 1회 출석 중이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수채화로 '과일 그리기'를 배운 적이 있는 큰누나와 달리 학창 시절에 가장 자신 없던 미술을 엄마가 이번에도 제 발로 걸어가서 선택하다니... 교과점수 1점 올리기에 혈안이 되던 고교시절 내내 엄마는 미술 점수를 이론시험으로만 보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소망을 가질 만큼 실기에는 젬병이었는데... 그래도 딸을 지켜야 하니 딸과 함께라면 미술수업이라도 괜찮다.
딸은 힘이 들지만 엄마랑 함께 외출로 안전하게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으니 동의했다. 이 외출을 위해서 전날 밤에 미리 다음날 입을 옷을 고르는 재미 또한 솔솔 하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수강생들의 서로에 대한 따스한 배려는 강의 듣는 날의 두 여자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이젠 아침에 눈을 떠보면 엄마와 큰딸은 이마를 마주 대고 한 손을 꼬옥 잡고 자고 있다.
영어전공인 모녀는 주 1회 1시간 동안 지역아동센터에서 방과 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미술심리 치료 봉사를 시작하였다. 규칙적인 주 2회 외출 프로젝트이다. 적어도 이틀은 다음날 입을 셔츠와 바지를 서로에게 골라주는 즐거움이 예약되어 있다. 그리고 어디에 사는 누구들인지 모르는 사람들과의 시간 공유지만, 적당한 긴장도 있어서 늘어져있는 두 여자의 정신줄을 잡아다니는 '쓴 약'의 효과도 있다.
요즘 두 여자의 입에선 웃음치료에서 배운 트로트가 나오기도 한다.
차가운 누나 몸의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고자 누나의 팔다리를 자주 주무르는 엄마의 노래는 걸핏하면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나~”이다.
두 여자는 웃음치료에서 여러 번 듣고도 여전히 가사를 못 외운 <내 나이가 어때서~>도 가까운 내일에 연습해볼 요량이다.
어느 내일에는 두 여자가 '아모르파티'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지도...
어디 사는 누구들인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과 동화를 소리 내어 읽고, 노래를 부르며 웃음치료를 하는 동안 웃음 싹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허약한 딸과 씩씩해진 보호자인 엄마는 어린 상추를 가꾸듯 조심스레 내일의 희망을 키우는 중이다.
오늘 우리 함께 행복하게, 그리고 내일도 우리 함께 안녕하기를...
*기도조차 할 수 없이 가장 힘들 때 썼던 글을 3편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당시에는 수상자가 단상에서 낭독을 하는데 PTSD 트라우마와 병원에 대한 분노로 눈물이 훨씬 많아서 소리 내어 글을 낭독하기는 불가했지만... 상금 덕분에 잠시 즐겁게 병원에 머물던 기억입니다.일기 단편들 요약이라 브런치 단편과 겹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