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쌈 준비 중. 딸의 소스는 딸이 직접 만든 땅콩소스로, 우리 부부는 레몬 피시(fish) 소스를 즐긴다.,
딸이 음식을 가려 먹어야 되는 신부전과 심부전 진단을 받은 후부터 우리 집에 단단히 자리한 원칙이 <집밥 먹기>이다. 병원 내원 시에는 장시간이 소요되므로 도시락을 준비한다.
퇴원 후 바로 다음 주 첫 내원에서 담당 간호사로부터 갑상선암 관련연구에 갑상샘 제거 시 수집된 생체시료들을 제공한다>는 서류에 사인을 부탁받았다.
제공된 설문지의 질문사항에는
-담배를 얼마나 자주 피우며, 술, 콜라나 사이다와 같은 탄산음료, 커피를 얼마나 자주 마시는가에 대한 개별 항목의 질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규칙적 수면 여부
-운동의 빈도, 횟수, 시간 길이
-선호하는 식품으로 햄버거 섭취 여부와 빈도
등등의 내용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설문들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큰딸의 생활습관을 들여다보았다. 아빠의 근무지 이동으로 인한 국내외 잦은 전학과 귀국 후 국내 서열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고단함이 컸던 탓인지 갑상선 항진증을 교육대학원 시절에 발견하게 되었다.
스트레스가 컸던 때였지만 생활 습관은 참 건전했다. 종교시설 부설 복지관에서 하는 자원봉사와 지인들과의 모임 외에는 책 읽기와 피아노로 가벼운 곡 연주하기, 영어 사용 습관을 유지하기 위한 영어 영화 듣기의 일과였으니까.
학창 시절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의 별명은 국내외에서 "책벌레. Book Worm"이었다. 큰아이의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리고 고3 때의 한국 담임선생님들은 조용했던 제자를 "항상 책만 읽고 있던 아이"로 기억하고 계셨다. 호주에서도 학교도서관 사서는 "당신 딸은 책을 정말 좋아한다"라고 내게 말했었다. 아이는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을 책읽기로 견디어냈음을 성인이 되고서야 엄마에게 고백했다.
아마도 아기였을 때부터 외출 시 두 아이의 등에 멘 작은 AGABANG 헝겊 가방에 준비해준 그림동화책과 색칠 연필에서 이어진 습관일지도...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한 건 아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과 학교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아주 별개이므로.
서른둘에 갑상선 유두암을 수술받은 큰딸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으며, 콜라나 사이다와 같은 탄산수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아주 아주 가끔 통닭이나 피자를 먹을 때 환타를 주문하는 점은 제 아빠를 닮았다. 우리 가족은 외국인도 즐긴다는 치맥 (치킨과 맥주)도 하지 않는다. 딸은 커피도 아주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바에는 즐기지 않고, 대신 옥수수차나 보리차를 마신다. 무엇보다도 생수를 즐긴다. 스키와 아이스 스케이팅, 롤러 블레이드, 수영, 자전거 타기, 줄넘기를 좋아하는 딸은 그중 수영을 가장 좋아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살펴본 그 의사의 의학 논문에서는 갑상선 암이 술이나 담배를 즐기는 사람에게서 발생 확률이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확률....
어쨌건 여러 수술 후 나타난 부작용들을 견디어내는 동안 환자의 엄마인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참한 주부가 되어 신선한 야채와 살코기 위주의 단백질 식단을 자주 준비했다. 칼슘 알약을 16정씩 복용하던 시기에 자주 칼슘과 나트륨 수치가 솟구쳐서 입원 치료를 하게되고, 급.만성 신부전 진단이 추가된 후에는 될수록 싱겁게 먹도록 처방이 내려졌다.
그 대학병원의 영양 지도사와의 면담에서는 우리 가족의 단순한 한식 위주의 음식 내용에서 아무런 개선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예약해서 만난 면담에서 영양 지도사는 벽에 전시된 다양한 식재료 모형을 설명하고 나서 결국 우리 가족의 식단이 무난하니 "지금 그대로 드시면 될 것 같아요." 했다.
우유를 좋아하는 큰딸은 아침저녁으로 우유를 한 컵씩 즐겨마셨다. 달걀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충 약으로 가장 많이 복용하고 있는 칼슘 수치는 자주 제멋대로이다. 생선을 섭취하면 좋을 텐데 환자의 매스꺼움과 구토가 잦으니 현재는 육류와 신선한 야채 섭취로 가는 것으로. '아마도 잦은 구토 시에 막 복용했던 칼슘이 함께 쫓겨나면서 저칼슘혈증이 왔었나?' 생각을 이제야 한다. 정말 옛날 흐린 형광등처럼 느린 인식이다.
갑상선 전절제와 부갑상샘 전체 상실을 가져온 수술 직후부터 칼슘조절약을 16정씩이나 복용하는 중에도 <칼슘조절장애>가 심했다.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칼슘 수치를 조절하기 어려워 입퇴원을 반복하던 시기를 겪으며 항상 급히 입원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로 1년을 보낸 후에 갑상선 내과 의사는 칼슘 흡수를 현미가 방해할 수 있으니 현미밥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열심히 현미 등 잡곡을 섞어지어 주던 밥을 하얀 쌀밥 또는 완두콩, 호랑이콩, 기장, 차조 등을 아주 조금 넣어주는 정도로 바꾸었다.
사실 현미밥은 꼭꼭 천천히 씹어먹어야 소화흡수가 잘된다는데 남편은 성미 급하게 물에 말아 둘러마시던 새벽 출근 시절의 밥 먹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몹시 빠르게 먹는 스타일이고, 나는 적은 양의 밥을 너무 천천히 먹으니 식사속도가 정반대이다. 어쨌건 칼슘 흡수를 방해한다는 설명 덕분에 현미 섭취에 대한 부담감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뉴스 채널을 찾다가 마주친 TV 건강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누가 TV를 바보상자라고 했던가? 얇은 귀만 아니면 TV 건강 프로그램 청취는 가족 간의 건강 관련 다른 생각으로 인한 논쟁을 줄여주고, 심지어 주말 드라마도 딸과 내겐 힘든 시간의 훌륭한 힐링 프로그램이 되었다.
늘 누워서 입덧하듯 메스꺼움과 구토를 반복하는 딸과 예민해진 엄마 보호자의 심리치유를 위한 선택으로 딸과 함께 대학원에 입학한 후에도 일 년이 넘게 크고 작은 집안일은 당연히 내려놓지 못한 내 몫이었다. 무거운 청소기 돌리기와 설거지, 다림질 등을 잘하는 남편이 음식까지 맡아주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주부가 되어 그동안 해결해온 크고 작은 집안일 종류는 생각보다 많았다. 4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가사 외에도 계절 바뀜에 따른 각방의 옷장과 이불장 정리, 코너마다 자리한 수납장, 정기적인 침대 세팅 바꾸기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남편의 생각에는 방치해도 무방한 일을 아내가 만들어서 창의적으로 하는 일쯤으로 치부되는 사항이어서 쉴틈없는 아내와 달리 여유로운 그의 손에는 늘 책 한 권과 커피가 들려 있었다. 내 입은 불만으로 점점 부어올랐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발설하기에는 편치 않은 집안일들이 여기저기 눈에 밟히고주부역할에 추가된 환자 보호자 역할이 더해져 갈수록 몸이 고단해졌다. 입원시에도 환자가 딸이니 소소한 준비와 화장실 동반 등 간병은 엄마 전담이 된다.
그런 와중에도 가끔 빠른 걸음으로 피망, 양송이버섯 등 간단한 야채와 과일을 구입하고자 들른 마트에서 신선한 배추와 무, 부추, 열무 등이 눈에 뜨이면 과일보다 신선야채 위에 더 오래 눈길이 멈추고... 갈등 끝에 결국 장바구니에 담고 만다.
그리고 배달되어 온 싱싱한 배추들을 부엌 한편에 놓아둔 상태로 급한 밑반찬 정도만 마련해두고 더 바쁜 과제들을 하는 동안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서 시들기에 접어든 배추의 모습은 내게 스트레스 그 자체이다.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선택했으니 김치를 만들어야 하는데, 몸이 2개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상상을 하면서 문자 그대로 밖에 슬그머니 내놓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배추나 열무는 김치를 담궈본 주부들에게는 장보기에서 외면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점점 과제 더미에 빠지게 되면서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아지자 새벽에 출발하는 학교 가는 날만큼은 모녀를 위한 세 끼니의 도시락을 준비해주느라 남편이 부엌 싱크대에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소한 장보기와 부엌 싱크대가 야금야금 남편에게 이양되고, 대신 컴퓨터 활용이 가능한 나는 감자, 양파, 화장지, 티슈, 세제 등을 인터넷으로 한꺼번에 주문을 한다. 점점 신선한 배추나 열무 묶음을 만날 일이 줄어들면서 김치 담그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잠잠해지고, 맛있고 정갈해 보이는 포기김치를 사 먹을 줄 알게 되었다.
반찬 만들기를 사업 아이템으로 선택하여 이런 저런 TV 프로그램의 명사가 된 그녀들을 존경하며 점점 그녀들의 김치 고객이 되어가는 중이다.
수 십 년 동안 가족의 식단을 담당했던 나는 사실 여전히 신선한 초록 야채를 볼 때마다 갈등이 인다. 김치 담글 시간은 없는데 싱싱한 초록 배추를 가져와서 김치를 담가야 할 것만 같은... 무엇보다도 물을 아껴 쓰는 영업장보다는 배추에 티클 하나 없이 깨끗이 씻을 자신은 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날 필요한 능력이 부족할 땐 욕심을 내려놓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