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하모니카

엄마가 고르세요

by 윤혜경
5개의 꽃이 지고 추가로 2개 더 펴서 올해는 7개 꽃송이가 폈어요. 7개째 꽃송이를 반가워하는 30대의 딸 덕분에 60대 엄마도 80대 엄마도 희망자락을 잡아봅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빠른 걸음으로 아침 일과를 마무리한다. 은빛 머릿결이 반짝이는 어머니께 오전 10시에 모발폰으로 전화를 드린다. 음성이 고우신 어머니는 반가이 전화를 받으시며 ' 네 전화소리를 들을 수 있게 내가 보청기랑 이어폰을 한쪽씩 끼었다.'라고 하셨다.


한쪽만 끼워진 보청기의 성능이 얼마나 발휘될지 막연히 불안하다. 청각 기능이 정상인 나는 1936년생(87세?)이신 어머니의 청각기능저하 수준과 보청기 능력을 가늠할 수도 없다.


주 2회 <모발폰 음성 데이트>를 위해 9년부터 15년까지 터울 지는 동생들이 부르는 호칭인 '엄마'로 나도 어머니 호칭을 변경 중이다. 시드니에서 내 입속에 한글과 영어가 뒤섞여 살았듯이 서울에서는 '엄마'와 '어머니' 호칭이 뒤죽박죽이다.


60이 훌쩍 넘어 귀엽지 않은 나이에 90세 안팎의 부모님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보좌신부직을 맡게 된 젊은 신부님이 11시 미사 강론 중 가족 에피소드 소개에서 돌출된 '우리 아빠가~'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어색하다.


그래도 멀리 떨어진 거리를 마음속에서라도 좁히기 위한 시도로 나도 '엄마' 호칭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앞 가르마 양 편과 뒤통수의 속머리에 흰머리가 제법인 큰 딸인 나는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기는 내 자식들 앞에서 민망해서 여전히 '아버지'로 부른다.


"엄마, 오늘은 무슨 노래하고 싶으세요?

"응? 골랐어?"


"아니이, 무슨 노래할까요?"

"...."


"5월이니까 '어버이 은혜'랑 '부모'로 시작할까요?"

" '부모' 부르자고? "


"네, '부모'로 시작하시게요."

"네가 한번 해봐. "


"엄마가 먼저 하셔요. 제가 따라 배우게요."

"뭘 배우라고?"


서재의 내 의자 뒤쪽 책상에서 글 읽기를 하던 큰 딸이 일어서더니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어머니의 낮은 청력 탓에 나는 목소리 볼륨을 올렸다. 덕분에 큰 딸 제노의 '쉬는 시간'이 되나 보다.


"아, 같이 하자고? 난 하나도 안 들린다. 보청기를 한쪽만 해서 그런가... 네 소리가 작게 들려서 무슨 말인지 몰라."

"제가 옆에서 같이 해야 하는데 멀리서 핸드폰으로 하니 그러네요."


"보청기를 한쪽은 빼고 이어폰을 끼었더니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그런다."

"저는 박자를 잘 못 맞춰요. 피아노를 기분대로 친다며 딸들이 저를 <박자맹>이라고 흉봐요."


"아, 내 딸이 박자가 틀려? 그럼 발로 박자를 맞춰봐. 4분의 4박자라 맞추기가 쉬워."

"네, 먼저 첫음절을 잡아주세요."


나는 어머니께 지도받을 핑계를 만들었다. 다행히 어머니 귀 끝에 아슬하게 도달한 내 목소리가 전달되어 어머니는 내게 <하모니카 불기 지도>를 시작하셨다. 옛날 귀가 안 들리는 주인공들끼리의 대화가 나오는 동화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무조건 '맞아요'로 맞장구만 치는대도 중간중간 잘려 들리시는 듯 간신히 대화가 이어진다. 1970년대 국제전화처럼 들렸다 안 들렸다 하시나 보다.


청각장애는 아직 미래의 일인 내게 생소한 어려움이다. 베란다 쪽 창문을 꼭 닫고 핸드폰 마이크 쪽에 입을 가까이 대어 윗집에 들릴 위험수위까지 목소리를 키웠다.


처음 계획에서는 '안부전화 겸 하모니카 함께 불기' 시간을 서너 곡을 포함 총 20여분 길이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청각장애로 인해 곧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다. 상대 의중을 전달해 이해하는 데에 마치 연사와 통역사가 한 단락마다 번갈아 말하는 순차통역처럼 우린 소통에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예정했던 20분 동안 잘 안 들리셔서


"한번 더 한다고?"

"아니 아니. 같이 시작하시자고"


를 되풀이하다가 나는 무조건 ' 네 '로 응답했다. 모발폰을 이용한 통화시간은 60분으로 늘어났다.


2015년 4월 말에 나의 큰 딸이자 친정어머니의 1번 외손녀는 흔하고 생존율이 높지만, 혈관에 가까이 자리한 '아주 작은 3mm 크기의 암(?)'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015년 9월 내가 주선한 바닷가의 콘도에서 두 분의 2세와 3세들이 함께 모여 팔순과 팔십오세 생신 기념 1박 2일의 <가족 음악회>를 무사히 마쳤다. 부모님은 뜨개질로 예쁜 부엌수세미를 손수 만들어 포장하신 선물과 손주들 용돈으로 답례하셨다.


작은 아버님 댁은 남매 중 장가가지 않은 아들에 마음을 쓰셔서 이번엔 초대하지 않고 조용히 치르기로 하였다. 오 남매가 성장하던 시간들의 사진과 두 분의 즐거웠던 시드니 시절의 사진들을 이어서 예식장에서 띄워주는 신랑신부의 성장기 사진처럼 나의 작은 딸 배우자인 손주사위의 밤샘작업 끝에 PPT로 띄웠다.


나의 큰 딸은 퇴원직후부터 잦은 의식소실과 칼슘조절장애를 보이며 전해질 불균형에 이은 만성 신부전이 더해졌다. 점점 나빠지는 서른두 살 큰 딸의 암수술 후 병세로 응급실과 병실 입퇴원이 반복되었다.


외출 시에는 늘 함께 했던 뾰족구두를 잘 닦아 소독약과 함께 상자에 넣어두고, 지하철역사안 가게에서 병원생활에 맞는 보호자용 슬립온 고무밑창 신발을 구입하였다. 점점 잦아지는 병실 드낙거림에서 발소리가 조용한 '슬립온 신발'은 병실보호자들과 간병인들의 필수품으로 보인 까닭이다.


딸 덕분에 엉겁결에 내 발이 편해졌다. 무엇보다도 병실복도에서 조용조용 구두 뒤꿈치를 힘들여 들고 걷던 자세에서 편히 바닥을 딛으며 걸으니 좋았다. 샤워실과 병원 내 미용실에서 환자의 머리를 감기거나 환자를3 부축할 때에도 더없이 편리한 신발이었다. 물론 환자용은 슬리퍼를 준비하지만, 병실 보호자는 잦은 검사와 환자베드를 따라다니며 바쁘게 들를 곳이 끝없이 생기므로 슬리퍼를 신으면 서둘다 환자와 긴 줄이 여럿 치렁거리는 링거이동대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렇게 나는 2022년 초까지 오직 환자인 큰딸과만 눈 맞춤을 하며 머리와 가슴을 꽉 채운 우울과 동행하느라 부모님께 향한 눈길을 멈추었었다. 외손녀가 아주 서서히 건강 회복을 향하는 동안 두 분은 기도와 응원을 보내며, 고약해진 큰딸을 기다려주셨다. 누워만 있던 환자인 손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느라 대학원에 모녀가 함께 등록한 상황을 이해하실 수는 있었을까?


이제 큰 아이와 나는 한숨 돌리는 시간이 되었지만 급경사의 내리막길에 계신 부모님은 이미 너무 연로하시다. 두 분의 큰딸인 나는 부모님과 헤어질까 봐 이제야 마음이 급하다.


"어떻게 전화로 하모니카 배울 생각을 했냐? 참 좋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다니?"

"그러게요. 장거리 전화와 와이파이를 마음껏 쓸 수 있게 기술이 발달해서 가능하네요. 참 감사하지요."

"무엇보다도 엄마가 핸드폰 사용을 잘하시니 가능한 일이네요."


오늘 어머니는 하모니카를 더 열정적으로 연주하셨다. 내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르셨다. 예전보다는 노래음이 떨리는 부분들이 늘었지만 여전히 음성이 따스하고 참 고우시다.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사용해 어머니의 노래를 녹음하는데 눈이 뜨끈뜨끈해진다.


"엄마가 고르세요. 저는 첫음절만 잡아주시면 듣고 따라갈게요."


노래 <부모>로 시작한 오늘의 하모니카 배우기는 <어버이 은혜>와 <들장미>로 끝났다. 어머니의 귀에 내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안 들렸다 할지라도 당신의 큰딸과 하모니카를 힘껏 부르실 수 있는 시간이 규칙적으로 만들어졌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에는 노래를 부르시며 행복하시면 좋겠다. 나는 엄마 앞에서는 박자치인 <박자맹이>가 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옆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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