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배우기> 첫날은 막연하여 지속가능할 지에 자신이 없었다. 엄마의 아파트 단지 뒤뜰 산책 상황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나도 들쑥날쑥 일 관련 외출과 강의 자료 컴퓨터 작업이 많다.
새 학기용 대학교재 발간 후에 그동안 도움을 준 여러 분들께 메일과 카톡으로 감사 메시지를 보내고, 코로나 여진으로 코로나가 한 풀 꺾인 후로도 대면인사는 죄다 미뤄졌었던 상황이다(5월부터는 다행히 대중교통수단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되고, 병원에서만 쓰도록 넉넉해졌다).
사실 특정 요일과 시간을 정하는 일이 다소 자신이 없었지만 두 분의 노쇠에 마음이 급했다. 누워계신 아버지가 손뼉을 쳐서 도움을 요청하면 화장실에 가실 수 있게 어머니는 부축을 하신다 했다. 가끔 일어나셔서 보행보조기에 기대어 걸음운동을 하신다지만, 장시간 아버지 혼자 방에 계셔도 안전한 지 마음이 쓰였다.
딸들이 엄마랑만 속살거리면 아버지는 외로우실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째 아버지의 요양보조 역할을 맡고 계신 어머니가 잠시 즐거울 수 있다면 이제라도 가보는 걸로.
결정장애처럼 머릿속에 생각만 붕붕거리면 아까운 날들이 또 접히게 되어 부모님과 나의 여생만 줄어든다. 계속 조정하면 될 일이니 영화 <Nemo를 찾아서>의 명대사 'Just keep swimming'을 따르기로.
'When life gets you down, you know what you gotta do? Just Keep Swimming."
(삶이 너를 우울하게 하면 뭘 해야 하는 줄 아니? 그냥 계속 헤엄치는 거야.)
( 출처: 영화 'Nemo'를 찾아서)
사실 첫날은 잘 들리지 않은 귀로 딸과 소통에 애쓰시는 어머니의 답답함을 짐작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딸의 투병 2년 차부터 6년여의 대학원과 연구과정에 함께 하며 내 딸만 돌보느라 외면했던 내 어머니의 노쇠에 속도가 붙은 게 읽힌 까닭이다. 시간이 많이 걸려 박사 학위를 받은 아픈 딸과 KTX로 내려가 노쇠해지신 부모님과 재회했다. 이는 그동안 뒤로 돌려세워둔 십자가를 제대로 세워둘 이유가 되었다.
고단했던 기간 동안 큰 아이는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과일, 고기, 떡 등의 신선 택배가 도착할 때마다 마음이 더워졌을게다. 그리고 메스꺼움과 울렁거림 짬짬이 의도적으로 호텔처럼 예쁘게 배열한 커다란 접시의 할머니표 간식을 먹으며 불안감이 조금씩 옅어졌을게다. 더불어 오래 웅크렸던 자존감도 일어서기 시작했으리라.
큰 아이는 대학원 4학기 째부터 스무 알 정도의 약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 시작하며 의식상실이 멈추고 신장 기능이 아주 느리게 향상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음식섭취가 다소 편안해진 큰 아이의 우울감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7년 만인가, 피아노 조율을 안 한 지도 그쯤 되었을... 돌아온 노래를 반주하는 딸의 조심스러운 피아노 터치에 맞춰 나도 컴퓨터 방에서 조용히 c장조 하모니카를 꺼내어 소리를 내었다. 한 주가 더 지나고 나도 피아노 옆에 섰다. 하모니카로 동요를 함께 맞추며 오스카와일드의 <거인의 정원>처럼 오래 차갑고 고요했던 우리 집에도 2022년의 봄싹이 돋기 시작함을 감지한다.
학위논문을 마무리할 때까지 매일아침 부모님의 서러운 소식이 오지 않길 간절히 소망했다. 여러 번 중도에 내려놓았던 연구논문을 다시 움켜쥔 2021년과 2022년은 팽팽하게 조율된 바이올린현처럼 불안과 긴장이 가득하게ㅡㅡ 유지되고 거듭된 밤샘작업으로 머리도 가슴도 터질 듯했다.
"오늘도 밤샌 거야?"
옆지기의 염려를 들으며 책상 앞에 앉은 채 하늘이 가까워지던 위기가 지나고 큰 아이와 나의 논문이 차례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큰 아이와 1+1으로 대학교재 원고작업을 시작하며 여전히 고단했지만 박사학위 논문 스트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날마다 꿈처럼 행복하대요.'로 2022년의 12월이 막을 내렸다.
아버지의 중환자실 퇴원 후 큰딸 모녀의 대면보고를 드렸다. 그리고 3개월 후 학위와 함께 학위논문 '감사의 글'을 의식이 또렷하여 건강한 소통이 가능한 부모님께 무사히 전할 수 있을 때의 조마조마함과 기쁨이라니.
어머니와 하모니카 불기 둘째 날인 2023년 5월 목요일 오전 10시
"내가 오늘은 아버지 옆에서 하모니카를 불게 되었다."
"네?"
"아버지는 귀가 안 들리시니까 괜찮아."
"그래도 시끄러우실 텐데..."
"네 동생네 아이들이 아르바이트 끝나고 늦게 자서 이 시간에 베란다 옆방에서 자는 중이야. 화요일 아침에 얘들이 자고 있는데 베란다에서 부는 내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나 봐. 그래서 오늘은 안방에서 하려고. 아버지는 걱정할 것 없다. 보청기 빼면 아주 안 들리셔."
"아침 10시... 시간을 늦출까요? 방이 네 개 아닌가요?"
"입구의 방 2개는 아이 둘이 하나씩 쓰고, 네 동생은 내 맞은편 방을 쓴다. 그래서..."
"그럼 어머니는 방을 하나만 쓰시는 거예요?"
"그래. 지난번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병원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잖냐. 혼자 지낼 일이 아득하더라. 그래서 방에 있던 책장이랑 오래된 짐들은 작은 이삿짐 트럭 3대 분을 모두 실어낸 거야. 하나도 안 버리고 있었던 옛날 짐들을 급하게 버렸어. "
여동생에게서 여러 번 들었던 상황이다. 코로나가 극성이던 시점에 '작은 아이의 8년만에 얻은 아이 출산'과 '옆지기의 중환자실 입원' 등 세 학기째 주변 상황으로 주저앉았던 학위논문 심사 중이어서 전화로 연락받으며 '부디 극복하시기를' 소망했었다.
"이제 같이 사니 외롭지 않아서 좋아. 얘들이 들고날고 하면서 아는 체하고 다니니 참 좋다. "
"어머니가 걔들을 모두 키워주셨으니 제일 정겨우시겠네요. "
힘들던 젊은 시절 어머니 집에 함께 살거나 앞집에 살면서 어린 삼 남매 양육에 어머니의 손길을 많이 받았던 여동생은 부모님 말씀을 가장 잘 받든다. 자식 중 소통에 제일 편하실 터이다. 직장맘인데 고민 끝에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작년 9월 즈음 합가했다. 그리고 대학생 둘을 포함하여 3대가 한 집에 거주 중이다.
꼼꼼하신 아버지의 평생 일기장들과 필기구등 아버지 물품이 모두 정리되었다고 동생에게서 들었다. 회복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아버지는 "고맙다"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시작하셨다.
"매일 일지 쓸 때 사용하던 내 볼펜 한 자루까지 네 엄마가 다 버렸더라."
"당황하셨겠네요. ㅠㅠㅠ"
"허허, 살아 돌아왔으니 꿈같다. 퇴원 후에 볼펜이랑 노트부터 샀다."
뇌졸중과 심근경색에 더해진 코로나와 폐렴으로 중환자실에서 마지막을 준비하시던 아버지는 병세회복 후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이 커지셨나 보다. '전화해 줘서 고맙다'고도 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가 떠나고 혼자 살 일이 아득했어. 둘째네 시댁은 안사돈이 떠나시고 바깥사돈은 혼자 지내시며 강의도 나가시고 바깥활동을 활발히 하신다더라만, 난 큰 아파트에 혼자 남게 된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없더라. 그래서 둘째네랑 같이 살려고 <방 비우기>부터 서둘렀어. "
"네에. 그럼 오늘 하모니카 하실 수는 있으세요?"
"할 수 있지. 아무 문제없어. 아버지는 밤엔 불면증이 심해서 낮에 주무셔. 보청기 빼면 아무 소리도 못 들으신다. 오늘 뭐 할까나?"
"주무시는 아버지 옆에서 하모니카를 부신다고요?"
지난번엔 베란다에서 보면대에 세운 악보를 보시며 하모니카를 부신다고 했는데 2번째 시간인 오늘은 베란다의 오전 10시가 하모니카 불기에 편치 않은 환경이라는 말씀이다. 오늘은 마치 싸우듯 큰소리를 지르며 소통한 끝에 아버지가 주무시는 안방에서 불게 된 연유가 내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자녀들에게 이미 경제력도 모두 나누어주시고, 힘이 없어지면서 마지막 남은 집을 자식에게 내어준 상태에서 일상생활에 눈치를 보게 되는 연로한 부모의 모습이 나의 미래를 짐작하게 한다. 주말부부이자 직접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여동생은 두 분을 번갈아 병원 외래에 모시고 다니느라 자주 출근시간이 늦춰지곤 한다고 들었다. 얼마 전엔 독감으로 누우신 두 분을 함께 병원에 입원하시게 했었다. 사실 환자이신 노령의 부모님과 다시 3대가 함께 살기로 결정하기까지 근처에 살던 여동생이 가장 힘들었을 테고, 이제 점점 더 힘들 텐데...
"내가 진작에 함께 살자고 할걸 그랬다. 서로 어려움이 있지만, 외롭지 않으니 참 좋다."
"우리 둘이 살 때보다 음식도 여간 다양하다. 네 동생도 출근하고 얘들이 모두 바빠서 주로 주문해 먹으니 신식 먹거리들이 자주 등장해 ㅎㅎ"
두 분은 동생네와 '합가 후 얼마나 행복하신지'를 여러 번 얘기하셨다. 두 분만 계실 때는 '동생들이 자주 방문해도, 떠나고 나면 두 분만 덩그러니 참 쓸쓸했었다고.
요양원에서 근무했던 내 친구는
"요양병원에서는 늙고 병들면 학력도 경력도 다 소용없어. 그냥 똑같이 자신의 몸하나 돌보지 못해 기저귀 차고 남의 도움을 받아 밥을 삼키며 사는 노인이 되는 거야. 우리의 미래!!!"
라고 했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예상치 못한 <민폐>가 되나 싶어 마음이 가볍지 않다. 요즘 <내가 엄마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생각의 끝이 참 막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