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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만난 첫 산타클로스

내 화장품 가방은?

by 윤혜경




과로 끝에 번개에 맞은 양 'lock' 상태로


과로는 독이라고 했다, 과로의 지속은 사망할 수도 있으므로. 수십 차례의 교정을 끝낸 뒤에 제출한 논문은 학위논문 심사기간에도 교수님들의 지도대로 교정작업이 이어지는데 서론, 본론, 결론 어느 부분이든 순서나 내용을 조금 틀면 초록까지 건드려야 해서 다음 심사 때까지 숨이 막히게 과로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동안의 노력이 하얗게 스러지는 결과가 어른거리는 지경이 되곤 했었다. 그렇게 시작에서 결과에 이르는 길은 녹녹하지 않았다. 직장생활과 박사학위 과정을,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며 논문 쓰기를 병행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전설 속 무용담처럼 여겨질 만큼 학위논문 완성과정은 논문 내용의 일관성과 지속성에 필요한 집중력과 끈기 그리고 참고문헌 찾기와 읽기, 요점 정리 , 참고 자료 소개등 일관성 유지 등에 많은 능력과 체력을 요했다.


곡식과 과일 열매들이 숙성하기까지 겪는 온갖 자연 풍상의 어려움에 비하면 도움의 손길과 좋은 환경이 갖춰진 대학원 공부는 수월할 테다. 기억력이 줄어드는 연령이라 명사대신 대명사 사용이 증가 중인 내가 경험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나의 연구 과정에는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유로움과 순발력 그리고 줄어든 능력으로 인한 위태로움이 공존했다.


아직은 국내 선행논문이 귀한 상황에서 필수적인 해외자료 수집과 정리에 호주 대학원 경험의 도움이 크다. 무엇보다도 '온순한 큰 딸의 신뢰, 가족들의 지원, 따뜻한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격려와 도움, 교수님들의 배려와 지도'는 연말 스타들 무대인사를 되뇔 수밖에 없을 만큼 내 노력의 결과를 열매로 이끌어준 원동력이다.


배움은 부담스러움과 동시에 즐겁다. 노년의 비탈길에서 심하게 비경제적인 새로운 배움은 때로 48시간을 깨어있어야 할지라도 뜻밖에 보람 있고 행복하다. 내가 가진 작은 능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렇게 시작한 일로 인해 그동안 일과 함께 양립했던 집안일에서 엄마이자 아내인 나는 점점 손을 빼게 된다. 크고 작은 잡안일을 더 많이 감당하는 옆지기와 원고교정의 귀재인 큰 딸은 이렇게 내게 참으로 소중한 우렁각시들이 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24시간 큰 딸의 우렁각시였던 대부분 노릇을 졸업해 가는 중이다. 이제 보니 딸이 점점 더 크게 내게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 이건 아닌데... 딸이 나서고 내가 뒤로 물러서야 할 때인데.


그런 짬에도 큰 아이와 함께 새콤달콤한 매실장아찌도 만들었다. 그리고 과부하가 걸린 내가 안방입구에 두고 떠난 나의 부산행 여행가방 사건은 기적이 필요했다.

'이를 어쩌누? 어느 쪽이든 누군가에게 된통 민폐가 되는 일이거늘... '

생각이 번개에 맞은 양 'lock' 상태로 멎은 아내 대신 옆지기가 아이디어를 냈다.


"내가 지금 차를 돌려 서울을 다녀오는 일이 당신 생각에 그토록 무리라면, 힘들겠지만 '제노'가 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1박 2일 약을 잘 챙겨서 내려오는 것도 방법이지. 불안하니 2박 3일 약을 챙겨 오면 더 안심이 되겠네."


큰 딸은 작은 암 수술 후 독립하기 어려운 건강상황이 오래 이어져 병원과의 밀착이 지속되는 동안에 스며든 '닫히거나 지하로 내려서는 공간에서는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곤 하는 추가증세'를 극복하려 노력 중이다.


' 나 없이 혼자 튜브를 타고 부산까지 시도한다고? 필요한 과정이지만 혹여 의식소실이나 공포가 커지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거꾸로 갈 땐데...'


" 지난번 병원 갈 때처럼 잊지 말고 냉장고 저장 생약도 잘 챙기고. 아직 외출하지 않았으면 가방을 챙겨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가장 빠른 KTX를 타고 부산이나 울산으로 오면 내가 가서 픽업할게."


당장 학교에 대한 민폐를 줄이기 위해선 큰딸의 도움이 몹시 아쉬운 처지인 나는 부정적인 상상이 차오르는 머릿속과 다르게 대답했다.


" 아, 그 생각은 못했어요."




7월의 첫 산타클로스


원래는 동물매개치료견인 "말티스 수컷 6살 수리"를 부산의 동물병원에 맡기고 큰 딸 제노도 동행하기로 해서 숙소를 더블 룸으로 잡았었다. 이후 내 일정이 추가로 조절되면서 큰아이가 참여하는 짪은 자원봉사일과 겹치게 되었다.


큰 아이는 주치의의 조언대로 요즈음 혼자 지하철을 타고 외출시도 중이다. 머리가 아프니 잠을 청하는 노력으로 목적지를 지나쳐서 돌아오는 일이 생기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 중이다. 병원 검사는 이제 지하철로 혼자 다녀오고 대신 30분마다 내게 현재 위치를 카톡으로 알려온다. 집에서 기다리는 나의 PTSD로 인한 뒤통수의 맥박 뛰기와 눈앞의 악몽 파노라마 펼쳐지기 크기도 작지 않은 까닭이다. '좀 더 크게 발을 내딛을 때가 되었군' 하다가도 사회적 사고 소식들을 접하면 화들짝 놀라서 현재의 느림도 감사하고 소중하기 그지없다. 사고로 장애인이 된 아들을 혹독하게 일으켜 세운 드라마 <나쁜 엄마>는 내게 유혹과 실천 중간 지점에 머무는 중이다.


결국 부산 동물병원의 수리 숙소는 취소하고, 부산의 호텔도 방을 줄여서 예약변경하며 큰 아이와 반려견이자 동물매개치료견인 '수리'는 서울에 남게 되었다. 암수술 여파로 발생하기 시작한 의식소실과 전해질 불균형으로 시작된 나와의 1+1 생활에서 딸은 처음으로 반려견과 함께 혼자 며칠 밤을 보낼 예정이다. 이렇게 이번 지방체류 일정은 우리 가족의 일상을 자연스레 살짝 비튼 생산적 시도이고, 큰 아이와 나의 정신적 독립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일단 오후 1시부터 영상 촬영을 해야 하니 무엇보다도 부근의 화장품 판매점을 찾아야 했다. 목적지인 '양산'은 내겐 생전 처음 방문지이다. 큰 도로를 상당히 가는 동안 편의점이나 마트, 화장품 판매점은 없고, 크고 작은 기계류 부품 가게들만 띄엄띄엄 나타났다. 지역 특성이 건설 쪽이나 기계 산업과 관련되나 보다. 화장품 가게가 안 보여서 답답하던 차에 학교로 진입하기 직전 도로 오른쪽에 높이 솟은 빌딩에 빨간 'L Mart'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와~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옆지기의 제안대로 큰 딸은 자신의 일정을 취소하고 즉시 용산역에 가서 가장 빠른 KTX 입석을 끊어 울산역에 도착했다. 이런 고마운 초고속 교통망이라니. 오후 12시 반에 발견한 화장품 가방과 대형 여행가방의 부재 사고는 큰 딸이 마을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KTX를 이용해 무거운 여행가방 세트를 끌고 무사히 오후 5시에 울산역에 도착하면서 수습되었다. 오늘 하루 일과는 가족의 도움으로 마무리되었다.


가족....


호텔에서는 휴가시즌이 시작되어 바꿀 수 있는 침대 2개 방은 빈방이 없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에 서울로 출발하기 위한 딸의 하룻밤을 위해 퀸베드가 있는 방에 추가 접이식 침대가 들어갈 여유가 없어 이부자리 추가 비용만 더 내기로 하였다.


나의 노후는 환자였던 큰딸의 보호자가 되어 1+1 생활로 시작되었지만, 9년 째인 이제 큰딸은 자신의 일 틈틈이 나의 허둥대는 공간을 조용히 채워주는 우렁각시가 되고 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과 생각의 전환이 가능해진 시대여서 이메일과 카톡을 통한 재택 업무가 훨씬 다양해졌다. 덕분에 가족 구성원들의 정서도 안정적이다. 분리불안 장애가 남아있는 읽기 도우미견 말티스 '수리'도 대체로 쾌활하다. 고마운 기술 시대에 허술함이 많은 내게 오늘 큰딸은 기적을 선물한 7월의 첫 산타클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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