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재 대학에서 동물권과 동물복지 관련 강의 의뢰가 왔다. 2027년 반려동물 관련 예상 시장규모가 7조라고 한다. 하여 시대 흐름에 민감한 대학들의 반려동물 관련 학과 개설 아이디어가 속출 중이다.
동물복지의 선두 주자인 영국을 비롯하여 세계 최대 애견 연맹과 세계의 <인간과 동물의 유대관계> 연구를 리드하고 있는 동물매개 심리치료 연구기관이 있는 미국 학계 자료 등 을 2018년부터 열심히 준비해 두었다. 또한 대학교재 출간 준비 과정에서 모여진 동물매개치료 관련 해외 자료들도 많아서 내겐 어렵지 않은 작업이다.
다른 지방 소재 대학의 강의와 달리 녹화강의이니 내게도 쾌적하다. 매주 KTX 이동을 통한 강의는 체력에 부담이 되는 터인데 마침 학기별 사전녹화라고 하니...
일정이 잡혔다. 흰색 전자칠판을 배경으로 한 녹화이니 체크무늬와 같은 사선 디자인이나 흰 옷은 피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계절이 분간되는 니트나 터틀넥 스웨터, 반팔 옷은 피하고 방송통신대학교 방송강의 스타일의 긴 팔 정장 옷차림이 무난하다고 했다.
방송국의 1시간짜리 프로그램이 녹화 경험의 전부인 내게는 촬영에 대한 노하우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때는 발표내용이 스크립으로 PPT와 함께 띄워져서 강의하기가 수월했다.
환자의 병원 수행이라는 개인적 사정과 함께 편안한 복장이 대세인 사회적 분위기에 동승해서 학회와 논문 발표 때 외에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배낭으로 지내온 터라 요즘 스타일로 계절 내음이 배제된 <정장 차림>에 대한 아이디어가 빈곤하다.
첫 발령을 받아 처음 고교 교단에 설 때 정장으로 시작하여 두 살 반의 작은아이를 업은 채 큰아이의 손을 잡고 출국할 때도 정장 재킷과 6.5cm 높이의 구두 차림에 아가방의 토끼털로 끝이 둘러진 겨울 외투 디자인의 포대기를 둘렀다. 김포공항의 직항이 없어 동경 면세점 공간에서 2시간 체제 후 JAL로 바꿔 타던 시절에는 기내 짐을 모두 챙겨 내려서 다시 검색 과정을 거쳐 일본항공에 옮겨 타고 14시간이 걸렸던 서울과 시드니 사이의 여정이었다.
1989년 1월의 출국 차림은 스튜어디스를 포함하여 어디나 정장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 투성이어서 공항에서의 내 차림이 유난하게 어색하지는 않았을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교사 스타일로 근무한 짧은 학교 생활은 내게 있어서 정장과 높은 구두 차림은 집 밖을 나설 때의 기본 차림으로 몸에 배여 좀 딱딱했다.
불편함을 당연한 예의로 수용했던 시절에도 그 당시 송골매로 날리던 배철수 님이나 튄폴리오의 김세환 님 같은 예술인들은 7080 시절 청바지 차림 가수의 대명사였지만, 교사로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심지어 여교사는 바지차림도 교장 선생님의 지적을 받고 치마를 입도록 조언을 듣던 시절이다.
촬영 전 마지막 날은 밤을 꼬박 새웠으니 일주일 동안 총 수면시간이 1일 필요수면 시간도 안되게 과로가 된 상황으로 부산을 향해 새벽 6시에 차로 출발했다. 옆지기는 나의 고단함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입구에 내어 놓은 재킷이 들어있는 옷커버들을 차 트렁크에 옮겨 싣는 수고를 도맡아주었다.
덕분에 출발 직전 모든 준비상황을 확인 후 10분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물병을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노란 얼굴과 충혈된 눈으로 촬영을 하게 된 나의 준비성 부족을 자책하며. 열심히 열심히 작업을 했음에도 여러 편의 PPT 세트는 미술작품처럼 끝없는 수정터치작업이 필요하여 마법처럼 빠져들어 시간을 많이 썼다. 그리고 여러 긴팔 재킷과 속 티셔츠들, 바지와 치마들을 색깔 맞춰서 침대 위에 올려두고 코디해 보며 선택하는 즐거움도 곁들였다.
서울 출발 후 6시간쯤 걸려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처음 만나는 스텝들 앞에서 노란 얼굴을 내밀기가 민망해서 승용차 안에서 화장을 하기로 했다.
화장품 가방 좀 꺼내줘요!
"화장 가방 좀 꺼내줘요."
"어떤 게 화장 가방인가? 트렁크에는 가방이 없는데?"
대학 캠퍼스 입구 한쪽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들여다본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뒷 좌석에는 참고서적들이 담긴 배낭뿐이다. 차문을 열고 나서 확인한 차 트렁크에는 여행 가방도 화장품 가방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 건가? 아파트 입구에서 여행가방과 화장품 가방을 차에 싣지 않고 놓아둔 채 출발한 건가?'
"내 준비물들을 자기가 옮겨주지 않았어요? 난 PPT 교정용 교재들만 챙겼는데..."
"나는 현관 앞에 나와있던 자기 옷걸이 세트 4개랑 간식거리들만 옮겨실었는데... 현관 입구에서 여행가방이랑 화장품 가방은 보지 못했는데... "
"내가 지금 고단해서 기억이 좀 멎어있어요. 생각 좀 정리하고... 서울로 전화해 볼게요. 큰일 났네 ㅠㅠ"
"제노야, 혹시 집에 있나? 엄마 여행가방이 집에 있는지 확인해 줄래?"
"엄마. 어떡해? 안방 입구에 엄마 여행가방이 서 있네. 화장품 가방도! 우리 엄마 어떡해ㅠㅠ"
"아, 우선 집 앞 우체국에 전화로 빠른 택배가 가능한 지 알아봐 줄래? 그리고 택배회사에도 빠른 택배로 내일 아침 부산 도착이 가능한지 물어봐."
"여보, 내가 당신을 숙소에 내려주고 곧바로 서울 다녀올게. 내일 도착하는 택배보다는 빠를 거야. 적어도 나는 12시간 후면 대략 새벽 무렵 다시 이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최소 12시간 주행거리를 70세를 앞둔 남자가 또 다녀온다고? 아내를 잘못 만나면 이런 황당한 고민을 하게 되는 거네. ㅠ 미안해요. 생각을 좀 정리해 보고... 우선 학교에 전화로 내 상황을 전하고, 촬영일정 조절이 가능하면..."
마음이 고마운 우렁각시 남편에게 미안함이 잔뜩 쌓이는 중인 나는 처음 시도한 편한 반바지와 면티 차림, 그리고 맨발인 채 이성을 되찾기 위해 차속에 앉아 입으로 숫자를 소리 내어 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