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 만두 빚기 재연 중인 어머님의 큰아들(내 옆지기)과 큰손녀(내 큰딸). 시어머님 만두가 세상 최고라는 두 사람. 나도 내 엄마의 식혜와 매작과가 세상 최고이다. 사실 내 엄마의 최고 반찬들은 열 손가락 꽉 채우고도 부족하다.
화요일이다.
주 2회 오전 10시에 친정어머니와 함께 하모니카를 불어온 지 4주가 지났다. 앉고 서는 일에 불편하신 어머니가 누워계실 수밖에 없는 반쪽 마비를 겪고 계신 93세 아버지의 운신을 돕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에 충실하신 덕분에 5남매는 각자의 일을 잘 하고 있다.
주 2회 엄마와의 핸드폰 미팅은 어머니의 시선을 즐거워하시는 일에 두게 해서 뿌듯하기도 하지만, 그 시간에는 '아버지 혼자 오롯이 화장실이나 불편함을 참고 계실까? 아님 주무실까?' 하는 생각이 깔려서 약간 편치 않다. 어머니는 나의 우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아버지는 밤에 불면이시라서 밤새워 누운 자세로 책 보시고, 아침 식사 후에 길게 주무신다."
또 어머니가 근래 하모니카를 부실 때 8년 전쯤의 팔순 잔치에서 보여주셨던 것보다 더 거칠게 호흡을 몰아 쉬어서 폐의 피리 소리가 하모니카 음 사이로 전해지니 한없이 죄송하다.
그동안 엄마가 내 목소리를 잘 못 들으셔서 대화가 모스 부호처럼 끊어지다 이어지다 했다. 엄마와 동문서답을 주고받으며 소통에 어려움이라니ㅠㅠ . 하여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번엔 핸드폰 기능 중 스피커폰을 켰다. 대신 이어폰은 빼고 보청기를 두쪽 모두 착용하시게 알려드렸더니 훨씬 잘 들리신다 하였다. 덕분에 의사소통이 수월해져서 동문서답을 하는 일이 대폭 줄었다.
화요일 오전 10시 전화를 드렸는데 안 받으신다. 그러다가 겨우 연결된 통화에서 엄마는
"오늘은 안 되겠구나. 아버지가 병원 가시는 날이라서 외출 준비 중이야. 내가 깜박 잊었다. 미리 말을 못 해 미안하구나."
하셨다. 아버지의 병원행에는 휠체어에 보행보조기까지 챙길게 많다고 들었다. 오후출근으로 시간을 조정한 여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고 간다고 했다. 함께 거주하는 여동생은 일상이 두 분 고령환자 보호자 노릇일 게다.
휠체어를 차 트렁크에 넣으려면 힘센 장정이 있거나 여자는 두 사람이 들어 넣어야 하는데...
부모님 두 분이 시드니의 각기 다른 병원 중환자실에 계실 때이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실 때는 남편은 한국에서 근무 중이었다. 나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여서 당연히 슈퍼슈퍼우먼이 되었다.
시드니 RNS 의료진의 순발력 덕분에 외관상 부상이 안 보이는 아버지의 장 동맥 파열을 발견했다. 먼저 수술한 덕분에 복부내의 과다출혈로 초를 다투던 아버지의 생명을 살려냈다. 수술 직 후 회복실에 잠시 머물다가 병실이 없어 1시간 거리의 City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단단하게 매어진 안전벨트가 사고순간 엄마의 갈비뼈를 모두 부러뜨리고 크고 작은 뼈조각들이 폐와 간에 박혔다. 출혈 부위가 여러군데로 뼈조각을 찾아서 빼내고 출혈을 멈추게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사실 생존가능성이 낮아서 폐와 간의 지혈을 위한 수술을 할 때마다 사망 시 책임을 묻지 않겠다에 보호자 사인을 요구했다. 의료진은 안전밸트 착용이 갈비뼈를 모조리 부서뜨리며 순간적으로 폐와 간에 뼈조각들이 박히게 세게 눌러서 열상을 초래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목뼈와 머리부상을 막아주었다고 했다. 이런 설명들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내가 통번역을 전공하여 의료진과 소통이 잘 되는 그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내 어머니는 골반도 팔도 다리도 부서진 상태에서 풍선처럼 부풀어서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병원에 옮겨진 후 점점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 옆에 선 의료진의 설명이 먼데 아지랑이처럼 웅웅거리던 시절이다.
매일 집에 돌아오면 두 분이 계시던 침실을 열어 빈 침대 앞에 서서 이 재난이 꿈이 아님을 깨닫곤 했다. 그때는 은빛여우가 서식한다는 집아래의 무성한 숲 낭떠러지로 도망가고 싶었다.
아주 나중에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가 6개월 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찢긴 폐의 지혈을 위해 등과 가슴 부위를 2번이나 열고 뼈조각들을 찾아 제거한 뒤 꿰맨 자욱은 흡사 아기뱀이 구불거리며 지나간 듯 했다. 너무 거칠게 꿰매서 울퉁불퉁 심하게 가렵다고 호소하니 수술을 담당했던 50대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Then the woman was dying, you know?"
"난 그때 이 환자가 부상이 너무 심해서 정말 놓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니 기적이에요."
덧붙이며 엄마 등을 어린아이 등처럼 도닥거렸다. 엄마의 생명을 붙잡아준, 참으로 따뜻한 집도의 앞에 선선60대 엄마의 얼굴표정도 어린아이 같았다. 감사인사를 연거푸 했다.
당시에 나는 부모님께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탑승 일주일을 남겨두고 아버지의 혈압상태를 체크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붉은 신호등 앞에서 대기중인 우리 차를 향해 돌진하여 부모님을 무너뜨린 교통사고에 분노하여 십자가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힘에 부쳐 아쉬울 때만 기도와 협박을 반복하며, 40kg 초반 몸무게로 휠체어를 접고 트렁크에 넣을 수 있을 만큼 괴력을 발휘했었다.
세상에 누구하고도 다툼을 하지 않는, 자애롭고 평생 헌신만 하신 내 어머니가 피해자라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블루마운틴 리조트에서 휴가 중이던 호주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곧바로 서울에서 날아온 남편은 이렇게 나를 위로했다.
"피할 수 없는 우리 운명인데, 아마도 신은 이 복잡한 상황 수습에 당신을 쓰기로 하셨나 보다. 그래서 당신에게 미리 통번역을 전공하게 하셨나 봐. 기다려보자. 열심히 사는 당신을 막가게 하진 않으실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한없이 거칠어진 내 앞에서 그이는 온통 비관적인 나를 푸른 희망이 보이는 쪽으로 밀어내느라 애썼었다. 남의 편은 이렇게 가끔 든든한 옆지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시드니와 서울에서의 교통사고 후속 일들이 정말 많아서 대학원에 등록했던 더 이상의 공부를 접었다. 그리고 목에 기브스를 한 채 한국에서 초연될 예정인 뮤지컬 팸플릿 세트의 번역을 동기의 도움을 받아 마무리했다. 거의 매일 시드니 병원 스텝들과의 끝없는 소통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환자와 환자를 위해 서울에서 날아온 내 막냇동생이 영어가 안되니 변호사 사무실과 경찰서 등에 다녀오는 나를 병원스텝들은 차례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조그만 동양여자 앞에 키가 큰 담당의사는 무릎을 낮추고 눈높이를 조절하며 물었다.
"당신 어머니가 호소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부위는 어딘가요?"
"어제와 오늘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어제보다 오늘 통증이 조금은 견딜만해 보이세요?"
"통증이 심해서 사용 중인 모르핀 주사를 좀 줄여도 될까요? "
등등
연달아서 화. 목 하모니카 타임이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취소되는 상황이 좀 당황스럽다.
"아, 그럼 목요일에 전화드릴게요."
그리고 목요일 아침 10시가 되었다.
"아이고, 서울 막내이모랑 큰 이모가 날 보러 오셨다. 나는 오늘이 하모니카 날인걸 깜박했다. 미안하구나." 오늘도 안되겠구나.
이모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다음 주 화요일 아침 10시 전에 나의 하모니카를 준비하고 물 한 컵을 놓아두고 컴퓨터로 악보를 볼 수 있게 한 뒤 10시 정각에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내가 오전에 치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 다녀와서 오후에 전화하마."
뭔가 엇나가는 상황 징조가...오후에 통화가 되어 엄마 청력 문제로 엇박의 소통이지만 요지는 전해졌다.
"내가 임플란트를 작년에 시작했는데 치과의사 선생님 말씀이 내 잇몸이 약해서 뼈가 잘 안 붙는다고 그러는구나. 어떻게 일 년을 끄는지 원..."
"서울에서 다니시던 그 치과에서 임플란트 하셨던 거는 어떤가요?"
"여기 치과도 참 잘해. 여의사 선생님인데 아프지 않게 찬찬하게 해 주니까 좋아."
"고생하시네요. 그럼 쉬시고... 아버지도 앞니가 위아래 다 빠져서 채우셔야 하던데요. 이가 빠지면 뇌인지기능에도 나쁘다네요."
"내가 잇몸에 뼈를 이식했는데 잘 안 붙나 봐. 아버지는 '얼마나 산다고 임플란트를 해야?' 하셔. 절대 안 하시겠다고. 이동 자체도 불편하고. "
연세가 있으시니 위 기능도 떨어지는데 치아가 점점 빠져서 아버지는 소화기능에 불편을 느끼시는 중이다. 지난번 방문 때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살아 돌아온 만큼 그냥 행복하게 계시다가 떠나시겠다며 오물거리시는 모습을 뵈니 참 먹먹했다.
여러 병증에다가 고령이셔서 그전에 기초를 만들어둔 임플란트조차도 다시 해야 된다고 해서 쉽지 않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음식재료들을 잘게 갈아서 드시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미음이나 죽을 싫어하신다. 송곳니와 어금니로 어떻게 드실 수 있는지... 실감 나는 미래이다.
"네. 그럼 목요일에 하시게요. 편히 계세요~."
벌써 2주를 넘기며 하모니카 일정이 연기되고 있다. 나도 덩달아 하모니카 불 시간이 없이 사실은 원고작업과 미팅, 지방방문 등 다른 일에 분주했다. 엄마가 자연스럽게 생략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쪽에서 양해를 드리고 빼야 할 만큼 마무리 기한이 바짝 다가온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내 쪽에서 취소나 연기말씀을 드리기는 엄마 기대와 생활 리듬을 끊는 일이어서 거의 불가한데 , 오히려 이런저런 엄마의 사정으로 생략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요일 10시에 전화를 드렸다. 이제는 그동안 일들을 마무리하고 한숨 돌려서 맘먹고 제대로 하모니카를 함께 불어보려고.
"큰딸이구나, 잘 지내지? 하모니카는 이제 못 불 것 같아."
"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니, 치과에서 내가 잇몸에 뼈이식이 제대로 될 때까지 아주 조심하라는 게 많네. 하모니카도 불지 말고 단단한 거 씹지 말고, 잇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 노래도 하지 말고 입을 크게 움직이거나 입술에 힘주는 일도 하지 말래."
"아, 임플란트가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예요? 제노아빠도 제노도 임플란트 했는데... 어머니 잇몸이 약하신가 보네요."
그렇게 모녀 하모니카 합창은 너무 빠르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더불어 주 2회의 자연스러운 안부도 덩달아 머쓱해졌다. 또다시 '오늘은 어떠시냐?'라고 묻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