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가풍이 엄한 가문의 큰 며느리로 집안 행사를 준비하고, 평생 교직에 계시다가 은퇴하신 내 어머니는 손끝이 참 얌전하여 뜨개질. 바느질, 음식 만들기도 본받고 싶게 뛰어났다. 덕분에 늘 잠이 부족하여 어머니의 두 눈은 자주 충혈되곤 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에 자정 넘어서까지 가사 마무리를 하고 잠이 들어 새벽 다섯 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셨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5남매의 도시락 즉 7개의 도시락을 먼저 싸고 아침 밥상을 차리셨다. 상을 물리고 도우미 언니가 뒷처리를 담당하면 엄마의 출근준비가 시작되었다. 대학교 3학년때 돌아가신 할머니는 크고작은 대소사 감독 역할이셨다. 집안일은 고스란히 엄마몫이었다. 아침 상을 물리고나서야 안방에서 동그란 양면 거울을 세우고 화장을 하시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대학시절엔 나도 엄마 맞은편에 앉아 그 거울의 반대쪽인 볼록거울을 보며 로션을 바르곤 했다. 분초를 다투던 어머니의 출근준비를 방해한 셈이다.
일손을 돕는 입주도우미가 있었지만, 큰딸인 나는 부엌일 도움을 드린 기억이 별로 없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들을 부엌에 머물지 않게 하셔서 가끔 아버지께서 직접 큰딸의 무성의를 지적하셨다. 나의 대학 시절엔 거의 학교생활과 초등생 과외를 하고, 짬 내어 악기레슨을 받고, 종합서클 활동에 적극 참여하느라 시간여유가 없었던 점도 있다.
지금 내 모습은 예전에 내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렸던 짓을 대물림하고 있나 보다. 화분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고, 레스트로 식품의 새벽배송 시대에 될수록 집에서 과일잼이나 엿기름 식혜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남편과 딸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얻으니. 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가족구성원의 영양균형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신 모습을 큰딸인 내가 가장 많이 보았을 터이다.
덕분에 다양한 음식 만들기를 어깨너머로 경험을 한 나는 많은 약들과 전해질 불균형으로 인해 힘든 성인인 큰 딸을 위해 오메가 3와 6가 들어있다는 들깨와 참깨 강정이랑 매작과등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행여 메스꺼움과 울렁거림을 줄여줄 간식노릇이 될까 하여.
국내외를 다니며 신여성으로 엄마와 다르게 살아보려 했던 나도 별수 없이 나의 어머니처럼 가족의 입맛을 염두에 두고 내 시간을 쪼개어야 마음이 편하니,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를 잊고 엄마 흉을 내고 있나 보다.
나보다 먼저 길을 가시며 보여주시는 대로 따라가고 있는 나는 입으로 쫑알거렸던 어린 시절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별수 없이 엄마처럼 가족 중에 가장 바쁘게 살고 있다. 신안 굵은 소금을 물에 씻어 프라이팬에 얼추 볶아 수분을 대강 날리고 바람에 더 건조한 뒤 믹서에 갈아서 크기별로 용기에 담으면 입자 크기에 따라 식탁용, 무침용, 스테이크 용이 된다. 처음에 소금을 물로 씻는다는 친정어머니의 표현에 귀를 의심했었다.
'물에 녹는 소금을 물에 씻으면 뭐가 남지?'
60대 퇴직 후 70대를 지날 때까지 아파트의 부모님은 마치 시골 단독주책 거주자처럼 갯벌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을 물에 서너 차례 씻어 볶은 뒤 믹서에 갈고, 마늘을 6접(1접이 마늘머리 100통 기준)씩 손으로 까서 마늘장아찌를 만들어 유리항아리에 담고, 김과 깻잎 찹쌀 부각을 만들고, 모과차와 생강차를 담가서 가장 잘 개화된 화분과 함께 계절별로 다섯 자식에게 잠시 들른 자식 편이나 소포로 일일이 보내주시곤 했었다. 아버지의 손으로 단단히 맨 포장을 보면 내 눈엔 눈물부터 돌았다.
내가 출가한 작은 딸에게 보낸 매실청, 볶은 소금, 버섯가루, 참깨가루, 고춧가루, 멸치 크기별로 손질하여 담은 투명봉투. 손질한 마늘과 생강 양념들은 딸의 냉장냉동고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세 끼니를 회사에서 해결하고 퇴근하는 바쁜 생활에 평일 집밥 시간은 아예 없으므로. 괜히 나 혼자 가끔 도로 가져와서 새것으로 바꾸어 넣어주는 정도라 가끔 시대의 변화에 나는 '헛일 중'인가 한다. 나도 그랬었는데...
얼마 전 태평양 바다의 오염 뉴스가 들끓기 시작했을 때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소금 볶은 거 좀 보내 들릴까요?"
"아니다, 얼마 전에 소금 볶아서 빻아두었다."
여동생에 의하면 어머니가 예전과 달리 부엌일에 점점 실수가 잦아지신다고 했는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역할이 있으신가 보다. 동생의 전언대로라면 아버지는 뇌졸증 으로 신체장애를 겪고 계시니 하루종일 감정기복 조절이 어려우시다. 대한민국의 옛 남자로 원래부터 잔짜증 표현이 잦으셨다. 묵묵히 감싸며 옆을 지키시는 건강하지 않은 어머니의 고단함을 목격하며 성장한 여동생들은 입술을 내밀며 불편해한다.
딸들 입장에서 연로하시고 교통사고와 골반골절 과 폐 크기가 3분의 ㅣ쯤 줄어들어 호흡이 불편하신 어머니가 자신을 위한 시간 없이 오직 아버지 보호자일로 하루를 보내시는 게 속상한 탓이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책을 빌려 읽고, 뒤뜰 산책도 하며, 한편으론 배우자의 역할을 열심히 하고 계신다.
'90여 년을 주인의 성정에 맞춰 봉사 후 노쇠한 몸이 아픈데 젊은이와 달리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다행인 상황에서 아버지가 아침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무에 즐거우시겠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탁구도 수영도 운전도 테니스도 자전거도 참 즐기셨던 아버지와 어머니신데, 아버지는 이제 거의 누워서 독서 중이시다. 70대 시절의 척추디스크 시술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자리의 척추 디스크들이 이어서 이탈하는 중인가 보다. 거기에 뇌졸중과 심장수술까지 하신 분 치고는 잘 견디시는 듯하다. 청력이 나쁘니 반복얘기를 통해 간신히 띄엄띄엄 전달이 되지만 늘 예상보다 전화 음성도 힘이 있으시다. 또, 연로하신 엄마는 아버지의 통역사이시다.
자식들은 한결같이 "어려운 아버지는 어머니가 책임지셔야 하니 더더 건강하셔야 해요. 몸을 좀 아끼세요."라고 강조해 왔다. 여느 집처럼 우리 집도 아버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는 자녀들에겐 대체로 어려운 분이신 반면에 별명이 신사임당이셨던 어머니는 말 수 적고 신중하셔서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조절역할을 해오셨다.
동생들은 어머니가 안 계시면 특히 아버지와 오 남매 중 둘째인 아들과의 사이는 물렁뼈 없는 무릎뼈처럼 부딪칠게 뻔하다는 의견들이다. 여간 남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고 부모님의 불편을 해소해 드리고자 입속의 혀처럼 구는 남동생이었는데, 여동생들 눈에는 아들 특유의 성미 급함이 읽히나 보다. 아마 동생들은 내 뒤에서는 '큰언니도 똑같아' 하는 중일게다.
부모님과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던 여동생들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의견이겠지만 맞장구를 치면서도 한편으론 좀 알싸하다.
팔방미인에 곱고 말 수가 적으셨던 엄마는 신선생님이셨다. 나는 '신선생님의 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의 배려를 듬뿍 받고 컸다. 그랬던 내 어머니 '신선생님'은 이제 같은 말을 반복하실 때도 있다. 아주아주 가벼운 노인증세로 함께 거주 중인 둘째 딸인 여동생 의견으로는 <약한 치매증상>이 시작된 듯하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학력이 높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이성적이어서 치매초기에는 진단이 어렵다고 했다나. 하여 노인복지 업무를 하고 있는 동생이 구입해 드린 '색칠하기 세트'를 매일 전직교사답게 꼼꼼히 규칙적으로 일정 페이지를 색칠 완료하신다고 했다.
내 큰아이가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혼자 마음속에 담고,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품인 게 내 친정엄마를 닮았음을 이제 읽었다. 세상에, 엄마가 큰딸의 성품 내력을 아는데 40년 걸린 거네.
어쨌건 이런 엄마를 위해 그동안 ''오래 머릿속을 서성이던 생각이 행동으로 실행되었었다. 매일 "안녕하세요?"에 이은 "드시고 싶으신 반찬이나 과일은 뭔지? 뭘 드시고 싶으신지? 아침에는 뭘 잡수셨는지? 건강은 어떠신지?"와 같은 밍밍한 안부는 너무 형식적이다.
`호흡이 편치 않으신 점, 심장 수술 후 조심하고 계신 점, 두 번이나 심하게 다친 골반으로 인해 앉고 서기와 걷기가 불편하신 점, 화장실을 가는 움직임이 고단하신 점` 등 이미 알고 있는데 더 편찮으신 것을 여쭙는 들 사실대로 말씀하시지도 않을 테고, 설령 알게 된다고 1000리 길 너머에서 무슨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반복되는 민망한 모발폰 안부이다. 하여 안부 묻기를 응용해 볼 요량으로 이리저리 꽤 길게 궁리를 하였다.
그러다가 친정엄마께 넌지시 '나의 서툰 <하모니카 불기>를 어머니가 지도해 주십사'라고 제안을 드렸다. 하모니카 함께 불기로 이어진 전화통화는 멀리 계신 어머니의 안녕을 최소 주 2회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배경이었다.
핸드폰을 켜놓고 아침 10시에 대한민국의 남쪽 지방과 중부의 수도에 위치한 두 도시에서 베란다의 친정어머니와 컴퓨터 실의 내 하모니카 불기가 처음 시도되었었다.
그리고 화요일의 첫 번째 시도가 곧장 밤 아르바이트 후 아침 단잠에 빠진 대학생 조카남매의 늦잠을 방해하는 뜻밖의 트러블 요인이 되었나 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두 번째 날인 목요일에 어머니는 청력이 아주 나빠진 아버지가 누워계신 안방에서 하모니카를 불게 된 경위를 간결하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늦게 잠든 조카에게 방해되지 않게 안방에서 하모니카를 부시겠다'라고 했다.
3대가 38평 방 4개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적응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물결의 파장이 읽혔다. 대부분이 경험하는 출산처럼 또 모든 사람이 감당할 노후 인생이지만, 각자에게는 여전히 두렵고 버겁다.
나 또한 아직 서른 후반인 딸의 건강회복을 돕는 보호자이자 평생 공부를 하던 중 60대에 마무리한 박사학위로 인해 연구활동 연장선상에서 조금 분주해졌을 뿐, 마음은 나의 노후 마무리에 진중하다.
따라서 고령이신 어머니의 잔잔한 변화와 파장에 더불어 긴장된다. 자식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했지만 문해력의 뒤쳐짐으로 자식들에게 한없이 져주고 의지하던 옛 부모님 스타일과 다르게 독립적이고 대졸 학력으로 경제적 능력이 있고, 아들과 딸들에게 크고 작은 경제적 도움을 나누어 주며 경제력을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은 부모님 세대가 처음 겪는 일이므로.
내 노쇠하신 어머니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며칠 계시는 동안 아버지가 떠나신 후의 혼자 남은 시간들이 많이 두려우셨다고 했다. 오 남매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와 대학강의와 기관에 자리 잡은 둘째 사위와 사회복지사인 둘째 딸네 가족을 불러들여 방 셋을 내주셨다. 결혼 후 주욱 주말 부부로 지내온 동생네는 서울에서 부모님 곁으로 내려간 후로는 두 분께 참으로 가까운 자식이다. 나는 지난번 방문 시에도 부모님이 달랑 안방만 쓰시게 된 상황임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일시 방문한 우리는 폐가 되지 않게 우리들의 잠자리를 KTX역에 가까운 숙소에 정하고 몇 시간만 머물다 온 까닭이다..
이렇게 시작된 주 2회 모녀의 <핸드폰을 통한 하모니카 함께 불기>는 예상밖으로 빨리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딸의 건강이 안정적으로 차도를 보여 한숨을 돌리고 난 요즈음 60대의 큰딸인 나는 급류의 시간에 서신 부모님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너도 늙어봐라>를 실감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