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부모님

내 살아있을 때

by 윤혜경


고래의 춤꼬리가 슬금슬금


팔순 후반과 구순 초반으로 노환의 고통에 시달리시는 부모님께 늙은 큰딸과 아픈 외손녀의 박사학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뜻밖에 친정부모님은 큰딸 모녀의 박사학위 취득과 대학교재 <아동의 문해력향상을 위한 Reading Dog> 출판에 누구보다도 기뻐하셨다.


사실 나와 딸의 대학원 동반 진학은 의료사고 피해의 두려움과 분노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으로 심리치료사의 권유로 시도된다.


식이요법이 필요한 딸의 세끼 도시락과 눕는데 필요한 양털을 들고 집에서 새벽 6시 출발하여 7시 10분발 KTX로 4주만 피크닉처럼 다녀보기로. 문제는 저녁시간 집 도착이 자정무렵이다.


남편과 이미 현지까지 이동거리와 기차시간표를 보고 숙의 끝에 답사를 했다.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바람처럼 나는 KTX 덕분에 시도는 가능했다.


수술직후부터

"수술이 잘 되었다."

는 집도의 설명과 달리

투약내용에 대한 간호사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넘겼었다.


투약내용 관련 재확인이 필요하다는 의료진으로 인해 오전으로 예정된 퇴원시간이 점심도 굶은 채 오후까지 하염없이 지연되던 것을 애써 흘리며 퇴원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면 정상생활이라던 병원 설명과 달리 퇴원 다음날부터 딸의 상황은 점점 일상에서 멀어졌다.


회복과는 거리가 먼, 갈수록 황당하게 추가되는 환자증세의 원인으로 수술 중 함께 제거된 엉뚱한 기관 손실임이 확인되지만, 의료진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이에 대한 체계적 판단은 3년째를 며칠 앞두고 변호사에게 맡겼다. 그동안 주욱 서류를 챙기며 약과 처치의 변화를 기록해 오던 나 대신.


내편을 들어주겠다는 변호사의 존재는 일단 위안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비용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법적으로 내편이 생겼다.


1위 로펌부터 알만한 대규모 로펌은 죄다 그 대학병원 협력사로 내 상담은 전화문의에서부터 거절되었다. 뉴스에서는 피해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듯 보도되던 관련 시민단체들조차도 제대로 된 안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막막한 소송을 권했다.


그렇게 '100전 100패'라는 유수의 대학병원과의 소송일지라도 불면과 분노와 불안 그리고 좌절을 내려놓기 위해.


대학병원 드나들기가 일상인 모녀의 난데없는 박사학위 소식이 그동안의 섭섭함을 녹여낼 만큼 빅히트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노부모는 위기엔 잠부터 줄이는 나를 지켜보셨던 기억으로 오래 매정한 자식을 품으셨다.


"너는 공부에는 어려서부터 다른 애들이랑 달랐어. 한번 시작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더라고. 중3에 전학 와서도 명문여고에 턱 합격했잖아. 내 친구들이 모두 놀랬지. "


과거는 늘 윤기 나게 저장되는 터라 부모님 기억도 그런 듯하다. 팡빠레를 울리며 가슴을 쫘악 펴고 들어간 여고생활은 1학년 첫 시험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도우미 언니랑 짜고 1학년 기말 성적표를 늦게 보여드린 거는 잊으셨나 보다.


보여드리기 전, 도우미언니가 내 부탁으로 등수를 면도날로 살짝 긁어서 고친 것을 당시에

'짐짓 모른 척? 아님 진짜 모르셨을까?'


교실복도 벽의 커다란 흰 갱지 위에 매월 시험결과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학년, 반, 번호, 이름과 함께 프라이버시는 고사하고 검은색 사인펜으로 써붙여져 전교생에 쫘악 공개되던 시절.


우린 자신 성적 외에도 전교 5등 이내 성적 우수자들의 전교등수 탈환전들을 관전했다. 마음깊이 숨겨둔 경쟁자의 점수와 전교 등수를 흘낏거리며 다음 달을 다짐하던 시절. 매월 성적표에 학부모 도장을 받은 후에 담임교사에게 제출하기다.


성적표가 우체부의 손을 통해 집에 배달될 때까지 나는 학교에서도 좌불안석이었다.


도우미언니가 놓쳤으면 나는 아마 3박 4일쯤 언니랑 말도 안 했을 거다. 돌아보면 언니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이.


내 성적표는 도우미언니랑 감쪽같이 복구해서 학교에 제출해야 했었다. 명문여고라지만 첫 학기에 중간 성적 밖에 못 낸 큰딸에게 교직에 계신 부모님이 실망하실 것이 두려웠었다.


교복만 입고 나가도 누구나 알아봐 주던 그 명문여고는 중학교 때 다들 날리던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웬만큼 공부해도 전교 등수가 접착제처럼 고정되어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부를 덜하면 낙하는 확실했다. 지금도 시험 때마다 복통에 시달리던 여고생의 모습이 눈에 선선하다.


내 여고 졸업 후 42년 만에 공부에 대해서 구순 부모님이 60대 딸에게 주신 칭찬은 고래처럼 내 춤꼬리가 슬금슬금 내밀어지려고 한다. 잠깐 나이를 잊고 턱없는 희망을 품을 뻔했다.


"진작 말씀하셨다면 석사 마치고 귀국했을 때 주욱 이어서 공부를 하는 건데"

"그때 네가 교통사고 뒤처리 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은퇴 나이의 공부라 ㅎㅎ, 살고 싶어서 붙든 마음치유예요."



변명


친정부모님께 학위복을 입고 찍은 앨범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드렸다. 호주 대학 도서관에서 보았던, 단어기원과 사용례가 수록된 옥스퍼드 영어사전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두꺼운 학위 논문과 출판된 대학교재도.


이들은 사실 수년간 부모님의 안부를 외면하고 절망적인 환자인 큰딸의 병 치다꺼리에만 빠진 변명이다.


그땐 점점 나빠지는 터라

"차도가 있냐?"

는 안부전화도 사람노릇 훈수도 듣기 힘들었다. 자주 방향을 잃은 분노가 치밀기도 했었다. 사소한 간섭도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스치며 아팠었다.


"책 속에 해외기관들에게서 제공받은 컬러사진들이 많이 있어요. 예쁘긴 해도 전공서적이라 재미없으실..."

"아니다. 내 딸과 손녀가 만들었는데 내가 읽어야지. 여유 있으면 보내주라."


출판사에서 책을 20권 보내왔었다. 책 출간에 도움을 준 국내 기관들에는 출판사에 부탁해 따로 책을 선물했다. 내가 받은 20권 중 첫 권은 가장 고마운 우렁각시 옆지기에게 선물했다.


지도 교수님들과 딸의 은사님 두 분, 그리고 관련분야 강의를 하는 제부에게 책을 선물로 발송했다.


부모님께는 논문과 발간된 책이 전공서적이라 이해가 어려우실지라도 책 뒷부분 <감사의 글>에 수록된 '부모를 위한 감사인사' 줄을 읽어보시라고. 책 속지에 인사글을 적어서.


지난번 12월 지방 행사 참가 후 후배들이 준비해 준 호텔 대신 부모님 댁에 들러서 잤다. 덕분에 후배들이 함께 밤새워 정담을 꽃피웠다 했다.


부모님의 몸이 불편하신 뒤로는 침대이불류 세탁 수고라도 덜어드릴 겸 내 가족들의 숙소로 인근 호텔을 예약한다. 이번엔 밤시간 방문이다. 바깥바람 소식을 들려드리고자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 눈을 붙이는 걸로.


"너 혼자인데 내 집에 와서 자야지"

친정엄마는 전화통화에서 몇 번이나 강조하셨었다.


행사가 끝나고 미리 약속된 가까운 선후배 몇 분과 술과 차를 건네며 오래 보지 못한 동안의 안부를 교환했다. 학교 졸업 후 40여 년 만에 서로 퇴직 후의 안부를. 그리고 암 투병 중인 일부 가족들의 회복을 빌며, 남은 시간들의 행복을 응원했다.


청력이 안 좋으신 부모님께는 밤 11시쯤 부모님 집에 도착여정으로 말씀드렸다. 그리고 부모님과 합가 한 여동생에게 전화로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고3딸의 수능성적 발표를 기다리는 여동생에게 민폐가 덜 되기를.


부모님께 내가 오후 몇 시쯤 도착해서 행사 참가 후 들어간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KTX 서울 출발시간부터 부모님의 안테나가 온통 내게 향할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거짓말이 늘어간다.


"밤 10시쯤 역에 도착하고, 제자들과 짧은 담소 후 친정 도착이요"


아끼는 제자도 참여하니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절망하던 큰 아이를 위해 구입한 엽서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밤 11시 즈음에 친정집을 우회해서 가기로 하고 함께 택시를 탄 선배는 승차직후 기사님에게 우리 집 도착 후 선배집까지 택시미터기를 다시 시작하시라고 했다. 기사님의 고민이 시작되기 전에.


내 가족이 불 꺼진 1층에서 나를 데려갈 때까지 택시 기사님은 헤드라이트 불빛을 내게 비추며 보호해 주었다.


"선배님, 어서 가세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요즘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성 상대 범죄가 너무 많아서"


최근 아파트 엘리베이터나 입구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강력사고 뉴스가 이어졌던 까닭에 안전한 귀가를 보고자 택시기사님과 선배는 계속 기다렸다.


학교 때도 남자선배들은 항상 여학생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나누어서 집까지 동행해주곤 했었다. 참 귀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하는 수없이 11층 집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에게 1층 엘리베이터 앞으로 내려와 달라고 전화로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여동생이 내 옆에 서서 가방을 받는 것을 보고서야, 선배는 손을 흔들며 택시를 돌려 떠났다.


"외지인이니 친정식구들이 나를 보호해서 올라가야 한다고.

선배가 낯선 곳에서 나 혼자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만류해서"


"언니, 참 고마운 분이네요."


'갑자기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

형부 보호가 없으니 선배들이 ㅠㅠ

미안해. 넌 나보다 훨씬 젊은데...

내가 외지인이라 마음이 쓰이나 보다. "

9살 아래의 여동생에게 몹시 미안했다. 상황에 대한 내 변명이 자꾸 길어진다. 세상이 참 거칠어져서 불특정다수 폭력과 사고 앞에 모두 조심할 수밖에 없어진 요즘이 좀 슬프기도.



내 살아있을 때


부모님은 그 늦은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시는 중이었다.


'아이고!

차라리 미리 알리지 않고 들를걸.'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이제야 공감하는 멀건 큰딸은 90대 부모님의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의 크기와 쓸쓸함을 잘 알지 못한다. 겨우 짐작해 볼 뿐.


직장인인 여동생이 밤늦게 픽업 나오겠다고 계속되는 전화에 몇 차례나 만류했다. 모임에 참석한 남자 선배가 바래다주는 걸 선택했지만, 친정부모님과 여동생이 늦은 시간에 앉아 기다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수입이 없이 너희는 병원비만 늘어서 걱정이다."

는 부모님께

'원고료를 받았다'

는 핑계로 편하게 용돈을 드렸다.


다음 날 떠나는 인사를 드리는 내게

현관 입구에서 보조기에 기대어 선 채 아버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바쁘지야?

그래도 얼마나 살 지 알 수 없으니

내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다녀가면 좋겠다. "

자식들에게 주문을 하지 않는 편인 구순의 친정아버지는 행사 참여와 부모님 뵙기를 잘 맞춰서 내려온 내게 어렵게 진심을 보이셨다.


"언니,

아버지는 건강하세요. 걱정 마시고 천천히..."


KTX역 앞에서 나를 내려주며 여동생은 나와 큰아이의 건강을 걱정한다.


차에서 내리는 내게 용돈을 드린 내손이 무안하게 30대 후반의 내 큰딸 용돈 봉투가 내게 전달되었다.


"언니, 이건 엄마가 '제노' 에게. 이건 제가...."

"이건 아니다."

"나는 매달 월급이 들어오니까 이젠 여유가 있어요."


뿌리치는 내게 고3 수험생의 엄마인 여동생이 말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건데 역류하니 편치 않다.



새해 항공티켓


곧이어 다음날 지방으로 마지막 강의차 내려가는 차속에서 옆자리의 남편에게 친정부모님의 말씀을 전했다.


함께 새해 첫 주 평일에 부모님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직장맘인 여동생의 주말 휴식을 망치지 않게 1월 4일 목요일에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새해 신정을 지내고 마음은 어떤 음식을 준비할까로 설레며 머릿속에 메뉴들이 팝업 중이다, 곧바로 임플란트가 불가능한 아버지의 부실한 치아를 생각하며 하나씩 내려놓는다.


결국은 칼집을 잘 넣어 보드랍게 만든 La갈비, 야채, 과일만 남았다. 홈쇼핑에서 히트 중인 유명 떡집이 집 가까이 있어서 지난번 방문 때 같이 들를까 생각이 분분했다. 두 분의 소화상태가 좋지 않아서 떡은 비추라는 여동생의 만류에 pass패스다. 이미 여동생이 준비해 두고 내 지출을 줄여주고자 하는 배려였다.


복통이 좀 심해진 딸을 남겨두고 우리 부부만 친정부모님께 가기로 하고 항공 티켓을 끊었다.


"혼자 남아있는 동안 네 상황 문자를 30분마다 해야 해."


한참 후에 자신도 가겠다며 갑자기 항공사 검색을. 이미 자리가 동나서 비즈니스석이다.


큰애의 귀여운 사이즈 3mm 암 수술 후 거의 9년여 만에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나 보다. 큰아이에게는 의식소실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오랜 병치레로 폐쇄된 공간에서 빈맥과 부정맥에 이어 호흡곤란도 생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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