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과 예의가 우선시되던 시절을 물리는 중
'추석에 전 부치지 마세요. 예의가 아니랍니다.'
명절차림은 간소화 중
2022년 9월 5일 자 <한국경제신문>의 사회면 제목 중 "추석에 전 부치지 마세요. 예의가 아니랍니다."가 눈에 들어왔었다. 고학력 시대에 남녀 공히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 분위기와 전통가족제도의 변화에 맞춘 <성균관>의 '전통차례 예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소개하며, 명절을 여성들의 노동절이 아니라 즐거운 가족만남행사로 유도하는 기사였다.
근래에 혼인율 감소, 초혼연령 지체에 따른 미혼 독신 가정의 증가, 이혼 및 별거 관련 단독가구 증가, 고령화로 인한 노인 단독가구 증가 등의 원인으로 1인 가족 비중이 전체인구의 1/3이 넘어가게 급속히 증가하고(2022년 통계청 조사 기준 34.5%, 출처: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5065), 전통가족의 유지가 어려운 사회현상으로 인해 중요하게 여겨지던 예법들이 빠른 속도로 간소화를 향하는 중이다.
'명절 상차림 간소화'에 대한 개별적인 호·불호 입장을 떠나서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어 자주 만나고, 경제가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국내외에서 모여든 먹거리가 풍부해졌다. 예쁘게 디자인을 넣어 빚은 예술품 같은 떡과 제철과일들은 계절과 무관하게 일 년 내내 판매 중이다.
새 옷은 추석빔이나 설빔을 마련하던 옛 시대와 달리 요즘은 명절이라고 새 옷을 구매하기보다는 계절이 변화할 때마다 다가오는 계절맞이 옷 판매광고를 보며 구입하게 된다. 일 년 내내 명절스럽게 구입할 수 있다.
오빠와 남동생에게 학업을 양보당하고 일찍 밥벌이를 하고, 부엌일을 떠맡거나 출가외인으로 취급되었던 딸들이 이제 자식양육이 대충 끝나고 심신이 여유로운 50~60대가 되었다. 아직은 직장에 메인, 퇴직을 앞둔 아들보다는 한껏 여유로워진 중년의 딸들이 주체적으로 노령부모의 병원 동행보호자로 다정하게 나서는 모습이 대형종합병원에서 흔히 보인다. 그렇게 부모의 노년에 아들보다는 딸의 보살핌이 따스하다는 기사들이 이어지더니, 근래에는 < Z세대의 여아 선호사상> 뉴스도 지면에 올랐다.
IT 기술의 겁나는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도 눈이 부시게 빠른 속도로 변화 중이다.
돌아보니 명절엔
1988년 말부터 시작된 내 가족의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랜 해외생활은 내가 속했던 대한민국 사회의 가정과 교육계 생활에서의 수직적 사고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차례와 제사가 많고 서열에 따른 격식과 예의와 공손한 언행을 사람노릇의 맨 앞에 세우고, 경칭 같은 작은 일탈도 "버릇없이!"로 지적받곤 했던 고루한(?) 가정교육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큰딸이자 큰며느리인 나의 숨은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시어머님의 큰아들인 내 옆지기가 주선해 준 셈이다.
나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월말고사와 중간고사 그리고 기말고사 준비시기에 늘 제사나 추석 같은 명절이 있었다. 당시 겨우 30대 후반에서 40세 정도의 내 어머니는 스물세 살부터 시작된 큰며느리 역사가 이미 15년이 넘어섰다. 다른 도시나 농촌마을에서도 띄엄거리는 버스 편으로 어렵게 올라온 친지들이 음력일자로 맞이한 평일 제사에도 모여 함께 음식을 준비하느라 모든 방에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나만의 공간 확보가 어려웠다.
상차림 외에도 먼 데서 오신 분들이 떠날 때 기념으로 보자기에 나누어 들고 갈 수 있게 떡과 각종 부침 전은 참으로 넉넉하게 만들고 지졌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입식부엌도 없던 시절에 오직 뭉근한 연탄불과 석유냄새를 풍기던 석유곤로로. 그 기름진 음식들은 냄새가 온통 퍼졌다. 하여 담을 맞이 댄 이웃들에도 접시에 담긴 특별음식과 식혜들이 쟁반에 놓이고 고운 상보가 덮인 채 건네졌다.
음식이 놓인 쟁반은 담을 넘어가거나 여동생들이 들고 대문밖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는 방법으로. 이사가 빈번하지 않던 시절이니 다음번엔 이웃집에서 음식이 담긴 쟁반이 담을 넘어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그 많은 음식은 어떻게 부패하지 않게 관리되었을까? 나중에 냉장고가 나타났을 때도 1983년경에는 200ml였고, 이후 발전하여 240ml 크기로 되었을 뿐인데.
다행히 나는 입학시험을 치러서 누구나 원하던 여고에 입학한 덕분에 여고시절에는 제사나 차례준비 시 내가 공부하는 방에는 각종 부침 바구니만 들여놓도록 엄마와 고모들, 그리고 작은 엄마들과 당숙모들이 배려해 주셨다. 그때 나는 공부가 벼슬인양 생색을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커다란 나무채반에 곱게 배열된 고기와 생선, 꿀을 두른 매작과와 튀긴 김부각, 기름을 두르고 얌전하게 빚어진 야채부침들에 눈길을 주면, 사흘쯤 굶어도 족할 만큼 매슥거렸다. 그래도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서로를 부르는 소리,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소리 등 큰 소음들은 방문 밖에 있으니 감사했다.
"네 발 빼라, 내 발 넣는다."
심지어 대학병원 가는 날에 여관이나 자신들의 아들집 대신 큰집의 늘 한결같이 예를 갖춰 반가워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품 덕분에 작은할아버지들도, 육촌도, 팔촌 친지도 아이들이 올망졸망한 우리 집에 대부분 빈손으로 와서 자고 갔다. 삼 형제의 맏이인 할아버지는 먼저 하늘로 가시고 할아버지의 동생인 두 작은할아버지들의 아들들은 내게 모두 당숙이다. 작은할아버지의 딸들을 나는 고모로 불렀다. 나보다 어려도, 학교후배여도 고모다.
군의 별을 단 당숙 부부도 운전병이 모는 군용차로 시골 본가에 내려가는 길에 집안의 큰 형님 부부인 내 아버지, 어머니와 하룻밤을 자고 내려갔다. 군부대에서 곧바로 오느라 미처 선물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며 냉장고 속의 남은 '군용 소고기'라는 어른 주먹만 한 고깃덩이를 건네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준, 전방에서 온 반가운 사촌동생 내외를 위해 부모님은 새로운 지출을 하여 한우불고기와 굴비구이가 들어간 식사를 준비했다. 대부분이 가난하던 시절이다.
내 할머니가 치매와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계시던 8개월 동안 어렵게 구한 가사도우미는 집안의 환자를 보살피지 않는데도 할머니의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으로 그만두기도 했다. 새로 일손을 구하느라 엄마가 힘드셨다. 저학년 담임이 된 어머니는 점심시간에 도보로 편도 10여분 거리의 집에 들러 할머니의 배변을 직접 처리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어머니 배변을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론 뭔가를 잘 고치시는 손재주가 탁월하신 아버지는 직장맘인 엄마의 일손을 도와 집안 청소도 하시고, 이불을 개켜 자개장 속에 넣는 등 도움이 되고자 애쓰셨다. 못을 박아주는 일도 잘하셨다. 그리고 체구가 가녀린 내 어머니가 아버지의 어머니 즉 내 할머니의 엉덩이를 씻고 관리했다. 할머니의 천 기저귀 또한 퇴근 후 어머니가 마당 한쪽에 마련된 수돗가에서 맨손으로 빨고 삶아 널었다, 종이 기저귀가 없던 시절에.
그때도 시골에서 올라오신 작은할아버지는 결핵을 치료 중인 대학병원에 다니는 동안 큰 형님의 아들로 '큰 조카'인 내 아버지 집에 와서 묵으셨다. 이른 시간에 아침밥상을 물린 후 안방에서 출근준비로 바쁜 내 부모님의 움직임 옆에서 작은할아버지가 숭늉을 드시며 동아일보를 보고 계시던 모습이 어렴풋하다. 큰딸인 나는 바쁜 몸짓을 보이는 식으로 조용히 툴툴대었다.
내 어머니는 아직 초등생인 어린 세 딸들에게 작은할아버지의 폐결핵이 옮을까 봐 마음이 쓰였겠지만, 작은할아버지의 며느리인 전업주부 당숙모가 '자신의 아이들이 어려 전염될까 거절한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 한 달쯤 머무르시고 아주 가끔 퇴근길에 당숙이 들르셨다.
우린 같은 상에서 나란히 나란히 앉아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조용히 밥과 국그릇 수저등을 연탄불 위의 솥에 넣어 끓이곤 하셨다. 그리고 당숙모 설득에 실패한(어쩌면 당숙은 자식들 걱정에 당숙모 설득은 시도도 안 했을지도) 당숙이 와서 작은할아버지를 다시 시골집으로 모셔갔다. 다행히 작은할아버지의 결핵은 우리 가족 중 누구에게도 옮겨지지 않았다. 그 당숙과 당숙모는 우리 집 제사에 늘 참석하고, 분주한 엄마를 도와 정말 열심히 일손을 보태서 어린 시절의 내 눈엔 참 정성 많으신 친척이셨다. 당시 자신의 불편만 보살피던 대학생 큰딸인 나는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고단함은 깨닫지 못했었다.
어디서 주무셨을까? 내 부모님과 안방에서? 아님 반신불수가 되어 말도 못 하시고 누우신 채, 자신의 똥을 성한 팔의 손가락으로 벽에 문지르곤 하시던 할머니와 대학생인 내 남동생과 함께 건넌방에서? 딸이 넷인 우리 집의 딸들 방에서? 방이 셋인데 어디서 주무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윗목에 피아노가 놓여있던 네 딸들의 방이 크긴 했다.
특히 세 번째 첩의 자식까지 얻어 가족이 번창한 막내 작은할아버지 가족 구성원들은 도시의 우리 집을 자신들의 도시 간이 숙소쯤으로 활용했다. 막내할아버지의 늦둥이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당신의 큰 조카인 내 아버지에게 "책상과 책상용 램프" 구매를 시외전화로 부탁했다, 비용처리도 없이.
그녀에게 "(사촌) 오빠"라고 불리던 내 아버지는 자신의 큰딸이 최고의 여고에 입학하였음에도, 월급을 타자마자 사촌 여동생으로 나의 오촌 고모이자 나와 동학년인 그녀의 학교 앞 자치방에 '책상'과 '책상용 램프'를 먼저 설치해 주었다. 구멍가게 외상은 가능했지만 책상구입이 가능한 마이너스통장이 탄생하기 전이다.
1970년대 막내할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새마을 지도자가 되어 서울 단체의 모임이나 해외견학이 잦아진 새마을당숙도 지나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서 우리 딸들 방에서 함께 잤다, 마을회관처럼. 그 무렵 당숙옆에 누웠던 초등학교 저학년 막내 여동생은 늘 대문입구에 앉아서 혼자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곤 했었다. 그날 밤 당숙을 엄마로 여겼는지 밤에 그리운 엄마의 목을 어루만지듯 당숙의 목을 쓰다듬었다고 했다. 아침에 당숙은 밥상 앞에서 내 막내여동생이 문지른 목의 붉은 자국을 보여주시며 멋적어했다.
막내 할아버지의 막내딸이자 나보다 어리지만 어쨌든 오촌 막내고모가 우울증으로 정신과 진료가 필요했을 때도 막내할머니와 고모가 함께 직장맘이 부엌살림을 꾸려나가는 우리 집에 묵으며 대학병원에 다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작은어머니가 되는 그분께 깍듯했다. 물론 내게 작은 할머니가 되시는 그분도 막내 사촌고모도 선했다. 나를 쥐어박는 심술보 셋째 딸인 사촌고모 즉 당신의 늦둥이 딸을 내 앞에서 가끔 야단쳐주시고, 점방(국민학교 앞의 조그마한 문구점 겸 잡화가게)을 운영하시면서 가끔 사탕을 호주머니에 몰래몰래 넣어주셨던 기억을 바탕으로.
그 댁의 큰 딸인 사촌큰고모는 초등학교 졸업이지만 남편이 정미소를 해서 대성공을 한 사업가로 알려졌었다. 어느 날 밤 뭔가 투자가 망했다고 울며 찾아왔다. 요청사항은 밤마다 우리 집 대문을 열어놓아 달라는 거였다. 번화한 길거리에서 밤 포장마차로 어묵 같은 먹거리를 팔겠다며 바퀴 달린 리어카를 개조한 이동가게를 사촌큰오빠네 집인 우리 집 입구 마당에 놓아둘 수 있게. 담을 넘는 도둑이 있어서 방범꾼이 지나던 시절인데, 그녀로 인해 우리는 밤 11시 무렵이면 대문 양쪽을 활짝 열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마당까지 훤히 들여다보게 열어두곤 했다. 길바닥에 나앉을 지경이 되었다는 호소 앞에서 그녀의 큰 아버지 아들인 사촌오빠가 어떻게 <No!>를 할 수 있겠는가? 모두 모두 피치 못할 사정들이었다.
다행히 길지 않은 시간에 접고, 다시 그녀의 시댁 근거지로 내려갔다고 했다. 며칠째 대문을 열어두었지만, 소식도 없이 그녀와 리어카가 오지 않아서 다시 대문을 굳게 닫아걸 수 있었다. 그제야 우리 가족은 대문을 잠그고 원래대로 평안해졌다.
내 어머니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돌이켜보면 여교사인 어머니는 점잖으시고 자신의 친족들에게 예를 다하여 덕을 쌓는 아버지 덕분에, 출근하는 평일에 방문한 친지들과 자신들의 볼일을 위해 도시를 방문한 시골 마을사람들에게도 딸들의 방을 내어주고 식사를 제공했다. 그 방의 주인인 여고생 딸과 어린 딸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았다. 그들이 떠날 때면 아버지가, 나중엔 나와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걸어서 편도 4~50여분 거리의 버스 터미널에 가서 차표를 미리 끊어 어르신들의 손에 공손하게 쥐어주는 일 또한 수반되었었다. 통금이 없어진 80년대까지도 우리 집은 늘 객식구가 끊이지 않으며, "네 발 빼라 내 발 넣는다."의 우스갯소리가 실현되고 있었다.
이렇게 예를 다하는 부모님 덕분에 친지들은 우리들에게 참 따스하셨다. 늘 반가워하시고, 내 부모님이 주빈인 우리 집안 제사에 달려오셔서 일손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돌아봐도 참 버거운 큰 며느리 임무였다.
교사로 매일 아침 식사 준비와 도시락 7개를 싸고 설거지까지 끝내고서야 숨을 돌리던 내 어머니는 식사를 제대로 하셨을까? 아침상을 치우고서야 공간이 생긴 안방에서 매만진 듯 긴 속눈썹과 두 눈이 참 예쁜 내 어머니는 동그란 간이 거울 앞에 앉아 가볍게 화장을 하고,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서서 출근하셨다.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고 나면 어머니는 대가족의 밑반찬 준비로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대부분 가사 도우미 언니가 집에 있었지만 가끔은 미처 구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연탄재 쓰레기 수거차가 오는 날이면, 대학생이던 나는 재가 되어 가벼워진 연탄이 8개쯤 들어있는 비닐봉지 '를 수거차 위에 선 청소아저씨에게 들어 올려주기' 당번이 된다.
수거차 뒤편에 올려주다 힘에 부쳐 손을 놓치면 다시 추락하는 연탄재 봉투로 인해 나는 머리와 옷에 연탄재를 허옇게 뒤집어쓰기도 했다. 보다 못해 가끔은 청소아저씨가 날렵하게 수거차에서 내려와 나 대신 우리 집 연탄재 비닐봉지를 번쩍 들어 트럭 위에 던져 올리기도 했다. 그런 날엔 다시 머리를 감느라 대학의 통학버스를 놓치곤 했다.
명절 차례를 지내고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서 문중 선산에 내려가실 때면, 내 부모님은 막내 작은 할아버지네 올망졸망 손주들을 위한 용돈을 늘 준비하시곤 했다. 큰 형님의 큰아들 즉 집안의 장손인 아버지를 항상 지지해 주시던 막내할아버지셨다. 그분의 큰아들인 장군 당숙내외는 훗날 서울에서 오랜 이웃집 점잖은 댁의 아들이라며 나의 옆지기를 소개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장군당숙네가 어련히 잘 알아보셨을 것이란 믿음으로 이 남자의 양말 속 발가락도 세어보지 않은 채, 남자의 건강검사도 없이 덜컥 결혼식을 올렸다.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아무리 담을 맞대고 십 년이 넘게 산 이웃일지라도 당숙부부는 그 당시에 내 시아버지의 회사가 그즈음에 부도가 나서 재판 중임은 모르셨나 보다. 당시 30대 그룹사 회장의 처남인 것은 바른 정보였지만 그 또한 영양가가 별로 없어 보였다..
장군당숙내외는 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지방에서 오신 친지들을 위한 잠자리로 막 대학입시를 치른 고3 수험생이 있는 자신들의 새로 지은 집을 제공하고, 친지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셨다. 신혼여행지까지 왕복 차량도 제공해 주셔서 호사스럽게 다녀왔다. 이후에도 신혼집을 방문하셔서 도자기 찻잔세트를 선물해 주셨다. 나는 수차례의 국내외 이사에도 그 찻잔세트를 지금도 장식장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철없이 잊고 살다가 그 감사함이 이제야 새록새록이다. 요즘 시대라면 이토록 서로 진하게 폐 끼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일이고, 이 모든 것이 부모님이 쌓은 사랑 덕분이다.
작은 딸이 대학입시에 자신이 원하는 학교와 과를 선택해 줄줄이 합격소식을 전했을 때, 남편의 친구는
"삼대가 공을 쌓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데, 정말 공을 많이 쌓으셨나 봅니다. "라고 축하를 전했다. 양가 조부모님부터 양가 부모님의 헌신이 쌓은 공덕에 힘입어 가능했을게다. 그분들의 지지와 기도가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얻는 거야."와 같은 냉정한 표현으로 작은 아이에게 '행여 행운에 기대는 욕심은 부리지 말라.'라고 했던 나보다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고작 서른 후반의 나이에 모두를 포용하고 아버지의 까탈스러움을 받든 인자한 팔순 후반의 어머니를 보는 4명의 딸들 눈빛은 지금도 안타까움 그 자체이다. 내 어머니는 '격식과 예의가 우선시되어 터무니없이 불평등한 아내와 장손며느리와 오 남매 엄마의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내가 두 분께 감사인사를 드리는 방법은 두 분의 응원 덕분에 두 분의 큰딸 모녀가 오래 일그러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에 걸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동안 모은 해외자료들을 토대로 곧바로 '모녀 공저, 대학 전문교재'를 발간하면서 학위 논문과 책의 '감사의 글'에 두 분께 감사인사를 드리는 글을 '한 문장 추가하기'였다, 생전에 출간된 책을 바칠 수 있게 기다려주신 두 분께 더욱 감사드리며.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인생의 스승이신 어머니 신선생님과 아버지 윤선생님께 사랑과 감사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