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일들이 겹쳐서 부산 근처의 강의 프로그램을 위해 내려가는 날짜는 담당자와 의논 끝에 이번에는 10월 마지막 주로 조정했다. 바로 전 주말에 다른 곳의 1박 2일 행사 일정이 있어서 좀 빡세다. 다행히 부산 일정은 우렁각시인 옆지기가 승용차 운전을 담당해 주겠다 하니 한숨 돌리는 걸로...
*사진출처: 교보문고. 1+1 모녀의 국내최초 동물매개교육 리딩독 교재
반려동물이 참여하는 '동물매개교육'(AAE, Animal-Assisted Education) 중 'Reading Dog Program'과 출판 교재 <아동의 문해력 향상을 위한 Reading Dog>을 소개하기 위해 멋진 이들과의 1박 2일 행사에 참여 후, 후배의 차로 올라오면 늦은 밤 서울 도착이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의 향기를 음미 후 3~4박 일정의 여행 가방을 챙기고 눈을 잠깐 붙이는 걸로. 준비물 목록은 일주일 전에 컴퓨터 방의 자석 칠판에 미리 꼼꼼하게 적어두었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기다.
<동물복지 및 법규> 강의를 위해 떠나는 길은 새벽 4시 즈음에 기상해서 6시 전에 출발해야 부산 쪽에서 당일 점심 직후부터 일정이 가능할 게다.
지난여름 내려갈 때는 혹시 중간에 교통체증에 걸릴까 봐 휴게소마다 화장실을 들러서 가니 목적지까지 거의 6시간 여가 걸렸었다.
이번엔 숙소도 하루 더 넉넉하게 예약했다. 일정이 늦게 끝나면 밤운전으로 서울에 오기보다는 하루 더 쉬기로. 학교 근처의 예쁜 카페에서 남편과 모처럼 티타임도 갖고 쉬엄쉬엄 귀경하기.
4일간 묵을 숙소는 목적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이동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1학기때 들른 곳과 동일한 장소로 했다. '이번엔 모두 직접 고쳐서 룸 환경이 좋다'라고 그 숙소의 여사장은 내 문의전화에 자신 있게 답했다.
* '호텔'이라는 이름을 덮어쓴 숙소의 한쪽 벽면
그곳의 기억
지난 학기에 그곳에서 머무는 4일 동안의 숙소는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정한 '호텔'이라는 명칭과 어긋나게 시설들이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첫 룸은 따뜻한 비데가 장착된 서양식 커다란 변기였는데 곧 변기가 막혀서 옆방으로 이동했다. 새로 옮긴 옆 방에서는 비데 아래의 변기물이 바닥에서 줄줄 센다. 그리고 다시 옮긴 방은 전날 밤 복도에까지 담배냄새를 풀풀 날리던 그 방이었다.
본의 아니게 3번째 방이라 더 이상의 이동은 시간과 체력의 낭비이다. 스프레이를 뿌리고 창문을 열어서 잠시 공기를 얼렸다. 열어둔 컴퓨터와 옷걸이에 정리한 옷들, 세면용품들, 책들 그리고 배낭과 아이패드에 여벌 컴퓨터까지 시간을 허비하며 옮기는 일은 정말 내게는 '난리' 그 자체였다.
그리고 미안해하는 숙소 측의 권유로 마지막으로 옮긴 방은 한쪽벽이 수리 중인 듯 까만곰팡이가 번져있는 침실과 바닥 쪽 벽의 타일 장식들이 무너져 내리다 멈춘 듯한 욕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리 중인 객실은 빼고 서울과 달리 많지 않은 객실이 이미 꽉 찬 터라 난감했다. 울고 싶었다. 그럼에도 카운터의 사장님은 임신 중인 몸으로 도움을 주고자 애써서 그나마 위안이 된 셈이다.
'인수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인테리어 공사 담당의 부실공사로 이리되어 속상하다'는 임산부 사장님의 설명을 들으며 내 속상함을 가라앉혔다.
그녀와 말을 주고받은들 옮겨본 룸들에서 이미 경험을 했으므로 포기하기로. 사실 자료 점검하느라 잠이 부족한 터라 정신도 없었다. 학교에 문의해서 소개받은 이곳보다 사진 상 좋아 보였던 다른 숙소로의 이동 또한 거리가 있으니 번거로울 터이다.
까만곰팡이가 얼룩진 이 객실의 욕실바닥은 무엇보다도 샤워물이 즉시 번져서 미끄러웠다. 피곤에 지쳐 순발력이 떨어지면 나이 든 사람들은 넘어지기 딱 좋은 위험한 상태였다.
모텔의 역할을 하는 이곳은 호텔 명칭에도 불구하고 젊은 연인들이 2~3시간 짧게 사용하느라 인기인 곳이라고 했다.
나처럼 연박 시 정가에 추가요금을 1박당 2만 원씩 추가한다고도. 연이은 숙박이 벌금을 물 일이라니 쯧. 인터넷 예약이어도 '연박 추가비용은 별도'라는 설명이었다. 평생 처음 들어본 외계언어처럼... 상황이 좀 꼬이는 중인가 보다.
나는 강의 일정에 종일 나가 있지만, 이 곰팡이가 피어오른 숙소에서 책만 읽으며 빵이나 컵라면으로 숨죽이고 있을 그이에게 미안하다. 대신 나는 아침부터 환히 비치는 욕실의 밤색 유리문을 미처 보지 못하고 이마를 세게 부딪치는 것으로 액땜을 하고.
은퇴한 지 오래된 옆지기가 성미 급한 젊은 시절과 달리 무던한 성품으로 바뀐 게 천만다행이다. 부지런한 그이가 승용차 청소용 타월을 꺼내 올라와서 세면대와 샤워탭에서 흘러내리는 욕실 바닥의 물을 닦고 또 닦았다.
마치 자신의 집 욕실처럼. 운동신경이 둔해진 우리는 그이의 수고 덕분에 욕실 물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불상사는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아침은 샤워기가 흔들거려 불안하여 머리는 감지 못하고 신속 샤워만 했다. 그리고 아침에 학교로 가기 전에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에게 불편경험을 전하고, '혹시 몰랐다면 우리가 떠난 후에 고치시라' 부탁했다.
*흔들거리는 샤워기
"흔들거리는 샤워기 탓에 난 지금 머리를 감지 못하고 출근하는 중"
이라고.
내가 강의하는 동안 옆지기가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학교로 와서 오후 내내 기다렸다. 연박 관련 추가비용은 받지 않더라고 그이는 전했다. 저 지경의 룸에 추가 비용까지 받았으면 다툼을 싫어하는 내가 전화를 했을 지도.
"심하십니다~"
쯤으로.
참으로 많은 여행 일정들에서 여태 본 적이 없는,
<호텔>이라는 이름을 빌어 쓴, 이렇게 안락하지 않은 숙소경험이라니. 지난여름 학기의 숙소 경험은 그렇게 구겨진 느낌으로 남아있다.
다시 2학기 강의 녹화를 위해 문자 그대로 crispy(느낌을 살려 번역하기가 좀 애매합니다)한 가을에 다른 지방으로 여행하기이다. 운전자 옆좌석에 앉아서 가끔 'backseat driver' 역할을 하며 운전자가 졸지 않게 소소한 간식 서비스만 건네고, 오롯이 차창밖을 음미하는 시간이 열릴 테고. 문득 설렘이...
남편의 의견을 물으니 혹시 고쳤다면 다시 그 숙소에 묵자고 했다. 일단 학교까지의 이동 거리가 쾌적하고, 전망이 좋은 이유가 컸다. 전화 문의에 그 숙소의 여사장은 다행히 내부수선을 다 마쳐서 <좋은 룸>을 준비해 주겠다고 상큼한 목소리로 답했다.
* 일단 깔끔해진 내부
사실 녹화는 사흘 만에 끝낼 수 있을 텐데, 이번엔 좀 까탈스러운 내용이 중간에 있어서 수업 지도안을 마지막 날 밤에 추가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단 나흘동안 머물 수 있게 예약을 했다.
다행히 방문한 숙소도 지난여름과 다르게 깔끔했다. 지난번의 경험 덕분에 기대치가 낮아서 상대적으로 좋아 보이기도 했을 테다. 생각을 돌려먹으니 편안하게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고운 가을의 녹화작업은 고맙게도 술술 풀렸다.
혹시 기억하세요?
마지막 날은 점심 후 촬영기사의 배려로 내 맘 속에 아쉽게 남은 부분들을 재촬영하고도, 작업은 아직 햇살이 밝은 오후 시간에 모두 끝났다. 마음이 가뿐해진 상황에서 이 도시를 떠나기 전에 지난 학기에 내게 도움을 준 <화장품 코너의 산타였던 그녀>에게 들러야겠다. 7월에 만난 두 번째 산타클로스
*산타였던 그녀에게서 구입한 화장품
지난 학기에 서울에서 밤샘 작업 후 10분 눈을 붙이고 떠난다는 게 잠결에 화장품 가방과 여행가방을 통째 안방 문 뒤에 세워둔 채 그이가 옮겨준 겉옷들과 구두만 차 뒷트렁크에 담아 부산 근처의 대학에 도착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몹시 당황하여 길거리의 숍을 찾아 헤매다 롯데마트 건물을 겨우 발견하고 한숨을 돌렸었다. 오늘 서울로 향하기 전에 안부를 전하고 싶은 사람... 지난여름 숍 문을 열고 들어선 나의 노랗게 뜬 얼굴을 빠른 손놀림으로 멋지게 화장을 해준 롯데마트 <미샤 화장품> 코너의 은인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첫 미팅에 노란 얼굴로 출현한 내 모습에 담당자들과 촬영 기사는 얼마나 황당했을지.... 그 여름날 오후에 전화로 남편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은 서울의 큰딸이 급히 KTX로 내 화장품 가방과 여행 가방을 들고 내려와 건네주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서울로 향했다.
나는 그때 여기저기 민폐투성이가 되었었다. 젊은 시절과 달리 나의 실수를 책망하지 않고 조용히 큰 아이와 의논해서 해결해 준 내 옆지기도 큰 바위 얼굴처럼 든든했었다.
그리고 몇 개월 만인 이번 가을에 나는 롯대마트 <미샤 화장품> 코너의 그녀에게 안부를 전하기로. 그녀 덕분에 '미샤'를 알고 오랫동안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는 방법을 딸과 함께 이리저리 생각하며 즐거웠다.
그리고 그날 바로 옆의 제과점에서 그녀의 티타임을 위한 달달한 쿠키세트를 골랐다.
"혹시 저를 기억하세요?"
" ~ "
"지난번에 참 감사했어요. 그때 구입한 쿠션화장품도 잘 쓰고 있어요."
"아이고, 오셨네요."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다음날 안 오셔서 '해결되셨나 보다' 했어요."
"네, 서울에서 큰 딸이 제 여행가방들을 가지고 내려와서 해결되었어요. 그렇게 중요한 날에 짐을 통째 집에 놓고 오는 그런 정신없는 일도 생기네요. 왕민폐였어요."
"피곤하시면 그럴 수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해드린 건데, 그걸 여태 기억하시고..."
화장품 코너의 그녀는 웃음이 환하다. 그녀는 내게 부산 옆 도시인 <양산>의 대표이고 외교관이다. 나는 이 도시를 기억할 때마다 그녀의 환한 웃음을 기억할 것이고, 그녀의 친절한 손놀림과 내 얼굴 위의 터치를 떠올릴 것이므로. 그녀에게도 즐거운 기억이길~""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서울로의 긴 여정에 대비해 미리 화장품 코너 옆의 화장실에 들렀다. 그리고 나오니 화장품 코너의 그녀가 나를 소리 내어 불렀다.
그녀는 나의 젖은 손을 잡고 내게 크리넥스 티슈를 내밀었다. 손수건을 차에 두고 온 나의 젖은 손을 '닦고 떠나라'는 배려이다. 아, 오늘도 그녀의 배려 덕분에 따스한 마음으로 서울로 향하는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