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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 가는 길을 취소할 뻔

어머, 선생님도

by 윤혜경

요즘 서울 한파가 겨울분위기를 내고 있다. 4주 전에 지인의 초대를 받아 오늘 음악회를 가기로 했으나 다른 업무에 밀려 아침 내내 생각이 복잡했다.


최소한 오후 5시부터 간단한 외출준비를 하고, 약을 집에서 먹을 수 있게 이른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떠나야 할게다. 콘서트는 밤 9.30에 끝날 예정이니 밤늦게 돌아와 씻고 나면 자정이 되는 건가... 의욕이 앞서서 예약했나? 머리가 무겁다.


고맙게 초대장을 보낸 지인은 전문직 정년퇴직 후 강의 외에도 여러 분야의 취미와 특기활동에 시간투자를 하느라 하루를 48시간처럼 활용하는 듯하다. 이번엔 가수가 되어 싱글 음반을 냈다고 했다. 그녀는 체력관리를 어떻게 할까? 여러 생각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올망졸망 이어진다.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에서 만난 12월)


11월은 한 해 마무리 일정으로 좀 빡빡하다. 중간중간 미팅도 있어서 선택이 가능한 일에 시간을 써야 할 때는 고민을 하게 된다. 지혜로이 11월을 잘 마무리하면 12월 인사 나누기가 즐거울텐데... 생의 내리막길에 서고 보니 체력이 떨어져 업무효율이 예전 같지 않음을 실감하는 중이라 될수록 불필요한 외출을 줄이게 된다..


큰 아이는 30대 초반이던 2015년 교육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암 수술 후 의식소실로 인한 부상과 치료과정을 몇 차례 겪은 후부터 점점 폐쇄공간을 힘들어한다. 오랫동안 극장도 공연장도 못 갔다. 미술관 조차도 호흡이 편치않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했다. 신장기능과 자율신경계 조절기능을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동안 30대 후반이 된 큰딸의 신장기능이 제법 회복되면서 최근 아빠의 권유로 아빠 고교 동창회 주관 콘서트에 아빠와 함께 다녀왔다.


아파서 시작한 공부 덕분에 '동물매개심리치료(동물교감치유)', '읽기도우미견 프로그램' , '동물복지와 법규를 비롯한 생명존중' 등 동물응용과학 분야를 나와 함께 연구하고 번역작업 중인 큰딸에게 물었다.


"혹시 압구정 부근 합창공연에 같이 갈 수 있는지?"

"무슨?"


문득 내게 좀 문제가 생긴듯하다. 딸의 외출 시 보호자가 필요하던 시절부터 집에서도 밖에서도 1+1으로 생활하는 게 9년째이다 보니 이젠 혼자 집을 나서면 헛헛하다. 환자보호자 역할로 시작된 동행인데 어느덧 반대로 딸의 도움을 받는 일이 늘어나면서 그 쾌적함에 나도 모르게 딸에게 의지해가는 중인가보다.


딸의 전해질 조절 능력이 많이 회복되면서 주치의 조언대로 올해부터 차로 편도 40여분 거리의 '병원 혈액검사 혼자 가기'를 시도중이다. 대신 30분 간격으로 보호자의 불안을 진저시키기위한 이동동선 보고용 카톡메시지는 필수다. 혼자 병원검사 가기가 시도되면서부터 ' 함께 외출' 제안에 가끔 "No, thank you!"로 답하는 딸의 여유가 생기는 중이고.


9년여를 붙어다니다가 이젠 조금씩 독립을 시도 중인 성인 딸의 변화 필요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점점 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인지한거다. 집안 일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옆지기는 장보기와 식사 준비, 다림질, 음식물 쓰레기 및 재활용품 분리 처리, 딸은 설겆이, 청소, 빨래 널기와 정리, 나는 빨래와 기본 살림, 그리고 밑반찬 마련, 냉장고 및 수납장 정리 등으로 나누니 훨씬 수월하다. 상대가 외출 중일 땐 누구나 대신 담당해서 정갈함을 유지하는 선의도 이어진다. 물론 주부인 나의 시간투자가 가장 많지만.


엄마 외출 목적지를 들으면 딸은 눈이 침침해지곤 하는 엄마를 위해 지하철 지도를 크게 복사해서 색을 입혀 표시해 둔다. 마치 지방에서 상경한 어르신 취급이다. 환승역까지 적어주니 원. 입술과 손가락 자주 건조한 제 엄마를 위해 아주 작은 물병과 핸드크림도 외출 가방에 미리 넣어준다. 이렇게 크고 작은 준비를 섬세하게 해주는 딸 덕분에 나이 지긋한 엄마는 편리함을 누린다.


회복탄력성을 보면 역시 젊음이 좋다. 물론 아프기 전으로의 회복은 불가하다. 그러나 신장은 좋아지지 않는 기관이라던 닥터의 notice에도 불구하고 만성 신부전 수첩시절 막막하던 신장수치가 아주 조금씩 좋아지는 걸 보면 꿈같다. 혈관에 쌓이는 석회질은 두렵지만, 몸 상태가 좋을 땐 매사에 우렁각시처럼 딸의 손길도 빠르다.


10월에는 아빠의 제안을 받아들여 딸이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아빠의 고교 동창회 주관 음악회를 용산으로 다녀왔다. 이번 압구정 음악회 장소는 딸이 미리 지도를 뽑아주어 수월하게 찾았다. 예약 덕분에 좌석도 아주 좋았다


아, 합창단이 입장해서 4열로 배열 후 지휘자의 손끝에 시선을 집중하는데, 맨 뒷줄에 큰 아이 초등학교 6학년때의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큰아이의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수업 학교를 주선해 주신 은사님이다. 학위논문 통과를 보고 드리니 선물을 준비해서 달려오셨다. 대학교재 출간 보고 때는 바쁘신 일정을 미루고 직접 차로 우릴 픽업하셔서 풍광이 멋진 레스토랑으로 안내하셨다. 미리 예약해두셨다고. 그렇게 제자와 학부모 공저 책 출간 턱을 크게 내셨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연구소에서 출간한 선생님 저서들과 편리한 에코백을 우리 모녀에게 따로 선물해 주셨다. 큰 아이가 서울 귀국 후 적응을 어려워하던 초등학교 6학년 시기에 엄마노릇을 해주셨던 담임선생님이시다.


음성이 고우신 선생님께서 교회성가대 하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곳의 무대에서 뵐 줄은... 그 반가움이라니. 무대 위의 지인과 선생님 사진을 행사 주최 측의 안내에 맞춰 앙코르 시간에 찍었다.


유독 기온이 내려간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출발 전에는 그냥 집에 있을까를 끝없이 상상했었다. 한편으론 이런 행사 덕분에 외출을 위한 준비를 하는 즐거움을 외면할 수 없다. 따뜻한 외투를 그리고 외투에 맞춰 윗옷과 바지를, 편안한 구두와 배낭을 고르는 설렘의 기쁨이라니. 큰딸을 살짝 부추기니 밤길에 엄마 혼자 가는 게 못 미더워서 따라나섰다. 와, 든든함. 큰딸 덕분에 다소 들떠서 집밖으로 나섰다.


기대보다 더 잘 준비된 합창콘서트에서는 합창단 공연에 어린 위탁 아동들의 합창, 남녀 성악가의 독창, 스트링앙상블 협연과 춤까지 볼 수 있었다.


"오늘 참 잘 왔다. 그지? "

"선생님을 여기서 뵐 줄은. 세상 참 좁다."


출연진과의 사진 한 컷을 위한 대기줄이 워낙 길어서 우린 빠르게 포기했다. 공연장을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조차 상쾌하다.


외출을 주저하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딸과 길로 나서기를 참 잘했다. 예정보다 늦게 끝났지만, 돌아오는 내내 유쾌했다. 열심히 살아낼 자극을 얻은 그 밤의 여운이 길다.


(*출처: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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