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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지구온난화가 늦춰진다면

먼저 서비스 센터에 수선을

by 윤혜경

고무바킹이 깨어진 바퀴


1박 2일 일정에 동반하는 내 오래된 가방은 크기가 자그마해서 좋다. 그래서 공주 부근 강의에 함께 다녀온, 서른 살이 넘은 여행가방의 바퀴를 닦으려 들어서 보니 2개 바퀴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고무재질이 으깨져 일부는 분실된 듯하다. 전혀 예상지 못했던 모습이다. 여태 작은 가방의 하체를 들여다볼 생각을 못한 채, 물수건으로 대강 바퀴둘레 먼지들만 닦아주곤 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요즘 여행가방들은 4개의 바퀴가 달린 가방이 반듯이 선채 굴러가게 만들어졌지만, 내 오래 오래된 가방은 바퀴가 2개라서 비스듬히 눕힌 자세로 끌고 가야 한다. 바로 뒤에 오던 사람이 내 가방에 걸려 넘어질 뻔한 적도 있다. 하여 직각으로 세울 순 없지만 바짝 당겨 끌자면 차라리 들고 가는 게 수월하다.


하여 '들다 끌다'를 반복하며 지하 역사를 이동해서 지하철 승강장에 도착한다. 공항에서도 내 가방의 바퀴소리가 귀에 꽉 차서 민망하기 그지없다. 먼 이동거리를 역시 거의 들고 간다.

요즈음 유행하는 4바퀴 가방
요즘 가방은 색상도 예쁘다

(출처: SAMSONITE)


사람들은 그 많던 여행 가방들을 모두 새로 바꾸었을까? 요즘 지하철 역내에서 마주치는 여행가방들은 바퀴가 4개로 구르는데 소음도 없다. 색상도 다양하게 예쁘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면 오십견의 어깨를 기우뚱거리며 나는 여행 가방을 들어서 소음이 나지 않게 하려니 등에 땀이 난다.


(출처 : 곁에서 30년 넘게 함께 한 여행가방)


그런데 오래된 내 가방의 내부는 아주 멀쩡하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15박의 겨울 유럽 여행에도 2번이나 함께하며 임무를 말끔히 완수했다. 겨울 유럽의 긴 일정에는 화장품 가방만 위에 얹었을 뿐이었다. 대신 옆지기와 딸들 가방에 헤어드라이어나 비상약품 등 공동물품은 양보했었다. 그리하여 여행지에서의 가족사진에는 똑같은 거위털 점퍼 차림으로만 찍혀있다. 같이 간 다른 일행은 큰 가방을 2개 들고 와서 의상과 부츠까지 자주 바꾸니 산뜻해보이긴 했다.


이번에 지방에 다녀와서 바퀴를 씻어주려 자세히 보니 2개 바퀴를 둘러싼 고무바킹이 찢겨 부분적으로 사라졌다. 우와, 이런 상태로 작동되었었네.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떠올랐다. 이젠 주민센터에서 스티커를 구입해 붙여서 1층 재활용센터에 내려놓아야겠다.



그만큼 썼으면 이제 새로 구입할 때


"이번에 미니 여행가방을 새로 구입해야겠어요."

"아. 그러기 전에 서비스센터에 수선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게..."

"예? 이렇게 오래된걸 어떻게 수선해요? 부품도 없을 텐데."

"아니이, 좋은 가방이니 알아보고, 안된다면 그때 버리면 되지."

"좋은 가방... ???"


'ㅠ 이 남자가 가난하긴 한가 보네'


그 남자의 제안이 불편하지만,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받아놓고 낭비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동의했다. 이미 마음속에선 보나 마나 수선이 안될 테니 어떤 걸 구매할지 검색을 해 볼 요량이다. 그 남자는 자신이 내 가방을 직접 들고 백화점 판매코너에 다녀오겠다고. 내게 맡기면 일 년은 그냥 넘길게 뻔할 테니.



아, 서비스가 너무 좋은 서비스 센터


용감하게 구식 가방을 들고 나간 그 남자는 얼마 후 전화로 내게 알려왔다. 불황에 이 해외 상품 판매처가 소공동의 백화점 본점으로 합해졌다고. 그래서 집 근처의 H백화점으로 가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왔다.


"매장 직원이 '오래된 제품이라 부품이 없을 수 있어 확실히 수선을 장담할 수 없지만, 접수는 해 주겠다'네요. 기본 수선가가 택배비 포함 3만 5천 원이래요. 괜찮죠? 안되면 할 수 없지만 일단 맡길게요."


'우와, 그걸 수선해 준다고? 택배비 포함 3만 5천 원에? 체면이 중한 그 남자는 민망했을텐데 ... 백화점 직원이 가방을 보고 대개 황당했겠다.ㅎㅎ'

'그런데 나는 어쩐다? 모처럼 시간을 할애해서 짧은 시간에 작은 가방을 골라 쿠팡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설레는 중인데 ㅠㅠ'


그 남자는 젊은 시절 K드라마 남자 주인공처럼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었다. 가족이 뭔가가 필요하다는 내색을 보이기 무섭게 호주머니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구해오던 그 남자는 은퇴역사가 길어지면서 별수없이 태도가 변했다.



지구촌 살리기에 작은 손 보태기


요즘 이 남자는 <지구촌 살리기>라며 재활용에 과하게 열심이다. 딸과 나는 심지어 일요일 재활용품 중 낡은 보올(bowl)조차도 옆동의 재활용품 마대 속에 넣어준다. 행여 그 남자가 발견하고

"어? 우리 건데?"

하고 주어올까 봐.


태생이 서울쥐인 이 남자는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음이 신기할 만큼 물건이 귀하던 시절의 시골 할아버지 코스프레가 심하다. 당근마켓을 사용하지 않아도 우리 동과 옆동만 휘리릭 둘러보면 쓸만하지만 연차가 수년 된 물건들이 가끔 나온다. 동화구연과 그림동화 스토리텔러 과정 수료 후, 연구소의 <읽기 도우미견에게 소리 내어 동화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위해 구입한 흰색 책꽂이 3개를 제하고는 나머지 그림책 책꽂이는 거의 그렇게 늘렸다.


늙은 그 남자와 그 남자의 늙은 아내 그리고 시원찮은 큰딸이 낑낑거리며 책꽂이를 주워 오는 모습을 본 경비 아저씨가 말렸다. 제대로 된 도구도 없는 우리를 위해 사무실에서 바퀴 달린 납작 수레를 들고 와서 시원스레 거실까지 옮겨주었다. 나는 계속 어디를 붙들어주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따랐었다. 그리하여 연구실로 옮겨가기 전까지 일단 거실에 진열된 그림동화 책장들은 하나하나 작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혹시 바퀴 4개로 세팅은 안된데요? 2개로 도로 달면 소리가 요란할 텐데..."

"디자인이 다른데 4개를 어떻게 달아, 안 되지!"

"물어보지도 않고..."

"물어보나마나지. 그걸 어떻게 불어보나?"

"ㅠㅠ. 알아서 하세요."


'그래도 못 고친다'에 한 표


속으로는

'ㅋㅋ, 못고친다에 한 표~*'

를 뇌까리며 전화를 끊었다.


'새로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밖으로 내놓지 못한 채 우물거리는 나도 참 이 나이에...


이 남자는 서른 살이 넘은 가방을 기어이 고쳐올 모양이다.

'설마 부품이 있지 않겠지? 담당 직원은 나이 지긋한 고객의 청에 얼마나 황당했을까?'


< 개화에 열심인 클레로덴드롱>


"그렇게 해서 지구온난화가 늦춰지겠소? 아낄걸 아껴야지 쯧!"

<1회 용품 안 쓰기>에 열심인 나는 뾰족해진 마음을 '클레로덴드롱' 옆에서 구시렁거림으로 달래는 중이다.

(눈독을 들이는 중인 가방들)
(출처 Samsonite)

https://www.samsonite.co.kr/lugg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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