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매미의 일생' 그림동화를 보고, 아빠와 매미 허물을 나무 밑에서 들여다보는 3세 아이
친정엄마의 불규칙한 일정이 좀 편안해지기를 기다리던 작은 딸네와의 만남이 드디어 올해 마지막날 시작된다. 작은 딸 부부의 잦았던 4/4분기 해외출장들이 마무리되어 차분하게 연말 휴가를 받아 아이와의 시간을 보낼 모양이다.
"엄마, 우리는 새해인사를 언제 갈까요? 바쁘시면 구정에 일정을 잡을게요"
딸의 전화에 12월 31일 저녁부터 1월 1일 새해인사를 나누고 점심까지는 여유가 있다고 답했다. 마음 같아선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답하고싶다.
"지금 당장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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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여부를 인지하지 못한 채 어디나 오르고 싶어 하는 남자아이
지혜롭지 못한 업무 방식
집에서 하는 작업은 마감에 쫓기면 휴식시간을 건너뛸 뿐만 아니라 수면시간도 대충이 된다.
학교처럼 규칙적으로 시간마다 10분씩 쉬어주는 게 중요함을 알고도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 스트레칭도 해야 하지만, 작업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수록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눈이 건조해서 시야가 뿌옇게 되고 눈이 뜨거워지면 안과처방대로 눈에 1회용 누액과 알레르기 안약을 넣는다. 눈을 감고 지압해 주는 정도로 작업을 재촉하게 된다.
* 드디어 놀이시설을 제대로 이용 중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더구나 퇴근 개념이 없이 마감에 서둘러지는 상황이라면 연말도 새해도 무미건조하게 과제를 하며 보낼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재촉 전화가 올까 소심해진다.
조용히 우렁각시처럼 많은 재료들을 정리해 준 큰딸과 함께 작업하지 않았더라면 300page가 넘는 원고와 사진 배치, 그리고 PPT 자료까지 마감을 새해로 넘길뻔했다.
무리한 작업량에도 불구하고 그 덕분에 <국내외 동물복지와 법규> 관련 자료를 꼼꼼히 정리하며 국내 동물복지가 가야 할 방향을 배울 수 있었다.
직장인인 딸 앞에서 수입도 변변찮은, 그렇지만 '신나는 늦깎이 연구자'인 친정엄마와 언니가 늘 바쁜척하게 된다. 국내에 동물을 매개로 한 심리치료 그중 특히 리딩독 즉 문해교육 관련 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새로운 분야이니 부지런히 해외자료를 국내에 들여오는 일은 꼭 하고 싶은 일이다.
이 일은 영어사용 능력이 필수지만 큰딸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경제적 대가가 거의 없거나 너무 미미해서 수입을 이 작업에 의존한다면 젊은 세대들은 매진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은 학위 논문을 쓸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이 빈곤한 국내자료였던 이유로도 이어진다. 연구자들에게 꼭 필요하나, 누구에게도 쉽게 권하기 어려운 교재출판작업이다.
어찌 내일(Tomorrow)을 내 계획대로 열어갈 수 있겠는가?
작은 딸의, 직장생활을 하시는 중인 시어머니는 바쁘신 와중에도 8년 만에 탄생한 아이의 주 1일 육아를 맡으시며 꾸준한 교감을 가지신다.
*큰아이의 칼슘장애와 만성신부전증을 지켜보며 3평 텃밭에서 늦은 수확물
딸은 직장에 메어있지 않은 친정엄마가 더 수월하게 아이와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아이 출산에 맞춰서 엄마와 언니가 산후도우미자격증반을 수료하고 동화구연을 배우고 있었으니 당연한 기대였다(신세대 육아에 40년 전의 육아방식을 대입할 수 없어서 배운 거였다).
미래는 예상밖으로 계획을 흔들어놓는다. 작은 아이에게는 엄마와 아픈 언니가 7년째 난데없는 대학원 공부에 비용을 들여가며 매달려 있는 모습이 설득력이 없을게다.
점점 늘어나는 대학병원의 여러 과를 순회하며 끝도 안 보이게 반복되는 검사와 새로 추가되는 약을 받아오며 응급실을 들락거리는 막막한 일이 얼마나 무릎의 힘을 빼놓았는지도 모를게다. 입원사실을 출근하느라 바쁜 딸에게 일일이 보고하진 않았으니까. 가끔 위급한 경우는 친구인 그 병원 의사를 통해 상황을 듣고는 있었겠지만.
뜻밖에 <반려견을 매개로 하는 심리치료>라는 즐거운 공부가 들어있는 동물응용과학과 함께 해서 대학병원 처방전을 들고 외래 약국으로 가는 내리막 길이 수월했다는. 두 손을 연인처럼 꼭 잡은 모녀가 숨을 쉬고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볼 마음이 생긴 것까지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작은 아이는 가끔 엄마가 시선을 돌릴 수 있게 아이의 즐거운 성장 동영상을 보내주고,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다. 언니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보랏빛 식품회사의 택배박스를 새벽배송으로 보내주곤 했다.
어느 때는 갑자기 마련된 회의로 퇴근이 늦어지니 도우미이모가 퇴근 후 공백이 생기는 2시간쯤 잠깐 함께 놀아줄 수 있는지를 알려온다. 이 또한 왕복 시간거리가 만만치 않으니 버겁지만, 어린아이의 작은 손과 반짝거리는 눈빛, 오물거리는 입술을 떠올리면 가슴이 뛰게 행복한 시간이다.
집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10개월 시기의 어린아이 모습이 띄워져 있다. 원고작업 중에도 중간중간 아이가 노는 동영상을 반복재생하며 새로운 힘을 얻어 마무리한다.
"31일 저녁 식사 할 수 있게 오렴. 1월1일은 아침 먹고 가면 되지? 가서 푹 쉬고 출근하면 되겠다."
"난 점심까지 있어도 괜찮아요."
"??? 담날 출근인데? 내일 조절하자."
" 혹시 바쁘시면 우리 집에서 새해 식사하세요. 준비할게요."
"농농, 그건 엄마몫!"
번역일 마무리가 남아 있어서 휴일 저녁은 여기에 할애할 요량이었다.
새해 첫날 점심까지 먹고 갈 수도 있다는 여유로운 대답에 온 식구가 나서서 대청소를 했다. 그동안 겨울 코트며 스웨터들을 펼쳐 바람을 쐬게 했던 작은방을 치우고 침대를 정리하는데에 나는 온종일 힘을 쏟았다. 행여 온 구석을 만지고 손을 대는 아이에게 어딘가 방 귀퉁이의 먼지줄이 닿지 않도록.
큰딸이 주로 청소기를 돌려주곤 한다. 옷장 정리나 이불커버 등의 손님용 고슬고슬 풀 먹임과 교체는 내 몫이라서 미루어져 왔다. 날마다 보고 싶지만, 어쨌건 딸네의 방문일정이 정해지면 집 정리와 청소부터 비상이라 큰맘 먹는 일이다.
*매일 사용해도 30년째 변함없는 톤을 잘 유지하고 있는 영국 W사의 디너세트 일부.
해외에서 고가 디너세트 가격에 놀라서 더러는 지인의 그릇세트를 빌려다 손님초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빌리는 일은 내 방식이 아니다. 차라리 없는 대로 제각각의 접시에 담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남의 문화를 접한 김에 두 번째 해외 생활을 시작한 호주에서 격식을 갖춰서 그릇을 모았다, 귀국 무렵엔 풀세트로 12인조가 되었다.
시드니에서 초등학생의 엄마로 음식 만들기가 서툴었던 때라서 그릇이 더 돋보여서 민망했지만. 그래도 남편 회사 동료들, 이웃과 친구들, 친지들 등 주말이면 방문손님들 덕분에 청소를 정갈하게 하곤 해서 늘 집을 깔끔하게 관리했다.
지금은 누구와도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니 집으로 초대할 일은 더욱 없다. 큰 아이가 아픈 뒤로는 아무도 초대하지 못했다. 매일 매스꺼움과 복통. 의식소실과 경련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딸 옆에서 누구와 웃음을 웃겠는가?
집도 정리될 기회가 줄어들었다. 예전엔 깔끔하고 멋있게 세팅된 집안이 좋았지만, 이젠 내가 공간을 편리하게 사용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사는 집이니까. 대신 식사는 제대로 맞는 그릇에 세팅한다. 늘 초대식탁처럼. 환자 식욕을 일으키는데 도움된다.
잦은 입퇴원으로 그동안 손길을 주어온 화분들이 말라죽었다. 건강을 조금씩 회복해오며 심리치료용으로 꽃을 꽂아주다가 경제적인 화분을 다시 구입했다.
이후 꽃 화분이 조금씩 생겨서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만 관리 중이다. 혼절했다가도 물만 주면 살아나는 야생화 클레로덴드롱이나 사랑초, 그리고 4주를 목마르고도 늘 꿋꿋한 산세베리아 정도이다.
원고 업무를 연말까지 마무리해서 넘기고 나니, 마음은 가볍지만 체력이 바닥이다. 동작이 느리고 뒷머리가 아파서 자주 침대에 누워 쉬어야 했다. 고기와 생선 재우는 일을 중간중간 준비하고 방을 치웠다.
이제 먹을 수 있게 자랐다는 3세 손주를 위한 LA갈비구이는 미리 양념하고 혹시 싶어 부드러운 불고기 부위를 함께 넣어 재웠다. 아이가 좋아하는 망고, 딸기 등도 준비했다.
주문해 둔 흑임자떡은 주문이 밀려서 새해 둘째 날에 도착이란다. 해서 동네 떡집에서 떡을 사 와야 했다. 아이가 참여를 원했던 김밥과 식혜 만들기는 촉감놀이로 할 수 있게 준비했다.
작은 딸네가 쾌적하게 쉴 수 있게 침대 커버세트와 베개 그리고 가벼운 거위털 이불 커버까지 모두 세팅하고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친정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사위는 해외출장 다녀오는 길에 아이 옷을 구입하면서 장모의 겨울 점퍼와 장인의 운동복, 처재 핸드백을 구입했다며 좋은 와인 선물까지 가져왔다. 딸은 출장길에 엄마와 언니 화장품들을 준비했다며 선물했다.
어리나 늙으니 선물은 참 좋은 윤활유이다. 바쁜 일정에 시간을 할애해서 겨울파카 등을 사 온 사위의 정성에 그만 녹아버렸다. 딸이 선물했다면"지금 있는 겨울옷도 많아. 참가할 모임도 줄어드는데 무슨 새 옷이 필요하겠니? 예쁘다. 너 입어~** "했을 텐데.
사위의 선물이니 무조건 좋았고 고맙다.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니. 거기에 와인을 두 잔이나 마시고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아이는
"외할머니, 이거 보세요. 변신시켰어요. "
크리스마스에 나와 큰아이가 선물한 변신 로봇 을 들고와서 작은 손으로 펼쳐보인다.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은 별빛같다.
내일은 새해 첫날이다. 어찌 내일(Tomorrow) 을 내 계획대로 열어갈 수 있겠는가?
*퇴고도 제대로 못한 졸고를 읽어주신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시간을 맞이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