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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선물 받은 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덕분에

by 윤혜경

세탁기에서 타는 냄새와 연기가 솔솔


15년 된, 건조기를 겸한 드럼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 뒷베란다에서 별안간 고무 타는 냄새가 난 듯하다. 연기도 흐리게 새어 나오는 듯 한 이 상황이 대개 당황스럽다.


계단식 아파트인 우리 집은 옆집과는 화재 시 피난 대비로 앞뒤베란다 모두 가벽처럼 처리되어 벽의 위쪽이 살짝 뚫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란다에서 담장 건너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극히 드물다. 벽 바로 앞 공간에 문을 달아 창고로 만든 까닭에 소음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힘세게 치면 부서져서 옆집으로 서로 대피할 수 있다는 데, 그 공간에는 대형 여행가방들을 잘 쌓아두었다. 화재 시 옆집으로 피난하기는 글렀다. 옆집도 우리 집으로 건너오기는 어려울 게고


'연기가 옆집에서 스며들어왔을까?'


"내 탓이오'를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슬쩍 '남 탓'이 먼저 앞서는 나의 사고 행태를 맞닥뜨릴 때면 민망하다.


아주 가끔 옆집 부엌이나 아래, 윗집에서 냄비째 태우는 냄새가 우리 집에 스멀스멀 들어오기도 한다. 우리 집 또한 누룽지나 찌개가 타는 냄새가 이웃으로 번져들 테다.


아, 타는듯한 냄새는 세탁기가 드디어 수명을 다했다는 신호인가 보다. 위쪽 접합부문에 녹슨 모습이 보일 정도이니 교체할 생각인데도 먼저 해야 할 일들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범인이 세탁기인가? '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 어쨌건 세탁실이 약간 희뿌여진 느낌이 시력 탓은 아닌듯하다. 타는 냄새까지 ㅠ.




*고맙게 '건조기능'이 있던 드럼세탁기


*참 유용했던 건조기능


행여 세탁기 과열로 화재가 생겨 폭발이라도 하면?'


뉴스에서 본 그 장면들이 우리 집 베란다에서 재현되는 일은 상상만으로 겁이 났다. 세탁기 전원코드를 빼고 안에 남은 빨래를 꺼내 손빨래로 마무리다. 다시 콘센트에 연결해서 전원을 켰다.


겁이 나 두근거리면서 세탁기에서 멀찍이 서서 지켜보았다. 오래된 세탁기는 고맙게도 탈수를 제대로 해주었다. 헤어짐을 앞두고 마음이 싸아해 졌다.


반려동물도 아닌 기계에 고마움이 절절하다니. 두 딸의 학교와 직장과의 거리를 배려한 여러 번의 이사에도 내색 않고 참 순하게 최선을 다한 드럼세탁기이다.



우와, 통돌이 세탁기


드디어 세탁기 정보를 위해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니, 세상에 아직도 <통돌이 세탁기>가 판매되고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되는 기본 정보로는 15년 동안 발달을 거듭한 새로운 세탁기능들로 인해 구매 판단이 어려워진다.


'어떤 제품으로 할까?'


우선 전자제품샵에 가서 모델조사를 했다. 드럼세탁기를 살펴보는 중에 상담 직원은 현재의 드럼 세탁기에는 '건조기능이 없다'라고 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이층으로 설치한다'라고.


건조기능이 빠진 드럼세탁기라니. 미처 생각지 못했다. 고가의 세탁기에 건조기능이 없다면 구태여 충분한 물헹굼이 안되어 아쉽던 드럼세탁기를 구입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그 옆에는 2000년 초반 형태의 통돌이 세탁기도 전시되어 있다.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구식세탁기가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럽다. 꾸준한 수요가 있으니 통돌이가 생산되고 있을 터인데...


'최근 세탁기를 구매한 친구에게 물어볼까?'

별 걸 다 머뭇거리는 내 모습 또한 당혹스럽다.


셔츠도 디자인만 맞으면 85~100 사이즈까지 무방한 스타일로 물건구매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데 이게 뭐람.


정사이즈는 85이지만 여름 니트도 겨울 울스웨터도 10년이 훨씬 넘게 입고 보니 사이즈가 100이다. 입어보지 않고 재료와 디자인만 고려한 터라 넉넉하고 품질이 좋아서 아주 좋아하는 옷이다.



인터넷 구매


아, 최근에 세탁기 구매 관련 서비스에 대한 좋은 경험을 전해온 또 다른 지인은 인터넷 구매를 했다는데.


인터넷 구매도 제품회사의 설치팀이 나오니 서비스는 같다고 했다. 덕분에 처음으로 대형 전자제품의 인터넷 구매 목적 검색을 시도했다.


'하이마트로 가요~' 로고송이 매일 틀어지던 2000년대 내내 가격에 맞춰 제품 질이 다르다는 백화점 직원 말에 귀를 기울여 열심히 백화점에서 전자제품을 구입해 왔는데...


'이젠 달라진 건가? ' 여러 생각이 들쭉 거린다. 이렇게 시대에 뒤처지는 중인가보다.


하이마트와 백화점 판매용 제품의 모델번호가 구분된 것을 백화점 매장직원이 백화점의 비싼 가격을 그렇게 합리화해서 고객을 끌었을지도.


대신 그들은 최선의 서비스로 고객의 편안한 구매에 도움을 주었으니 가치가 있다. 고객을 위한 질 좋은 서비스 덕분에 구매자도 편안했으니까.


이제 보니 세탁기 가격도 참 다양하다. 표준화가 어려운 식품과 달리 동일한 공산품 가격인데 백화점 매장에는 최신제품의 기본가격이 100만 원이 넘었다. 가격대도 다양했다. 세탁기 크기 또한 다양해서 선택단계가 많다.


블랙? 화이트?

밀크? 크림?

슈거? 노슈거?

핫? 아이스?


문득 젊은 시절 시드니 맥도널드 매장 안에서 줄 서서 영어로 커피를 주문하며 진땀 흘렸던 생각이 떠올랐다. 예산을 정하고도 물건구입이 쉽지 않다. 이 모든 걸 전문가의 조언한 줄 없이 나 혼자 결정해야 하다니.


새로 만난 통돌이 세탁기


그렇게 제법 시간을 투자해서 예스런 통돌이 세탁기를 예전 드럼세탁기의 2배 용량인 21kg 크기로 구입했다.


10, 12, 16, 19, 21, 23 kg로 크기와 가격도 다양해서 결정장애 수준의 어려움을 겪은 후 이왕이면 작은 누빔매트 정도는 세탁할 수 있는 크기로. 같은 크기지만 1년 전 모델은 가격이 할인되었다.



드럼세탁기와 헤어지기


이틀 만에 세탁기가 온다고 메시지가 왔다. 예상보다 빠르다.


'이제 드럼세탁기와 헤어지네.'

흰색의 드럼세탁기를 새삼스레 들여다보았다.



*에어클리닝 기능


'어머, 에어클리닝 기능도 있었네. '

15년을 함께 하는 동안 사용한 적 없는 기능이 이제야 눈에 띄다니. 난 참 멀건하다.



마지막으로 거의 건조된 타월 3장을 넣고 건조기능을 눌렀다. 따끈하게 나온 타월 촉감이 참 좋다.


오래 고맙고 고마웠던 드럼세탁기와의 이별이 참으로 아쉬웠다. 이제 새 건조기를 구입할 때까지는 건조기능이 우리 집엔 없다.











*30분 건조만으로도 덜 마른 빨래를 마무리해주던 건조기능




통돌이 세탁기의 귀환


개인적으로는 서비스 시스템이 우수한 회사가 좋다, 설령 가격이 더 높아도. 세탁기 가격은 타회사 제품보다 저렴하기까지 해서 S전자 세탁기로 결정했다.


백화점에서 20년째 컴퓨터부터 에어컨 등 대형가전제품들을, 이어서 작은딸 혼수제품까지 선택에 도움을 주던 판매책임자의 서비스가 생략된 만큼 가격도 의미 있게 저렴하다. 대신 자체적인 판단을 위해 특징들을 읽고 비교하느라 내 시간을 많이 썼다.


젊은 시절엔 시간단가가 높은 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백화점 전문직원의 설명과 권유에 의지하는 게 더 경제적이고 행복했다.


이젠 직접적인 지출을 줄이는 게 필요한 상황이다. 백화점보다 의미 있게 저렴한 가격이 마음에 와닿았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덕분에


친구말대로 설치팀은 창문에 고가사다리를 설치해서 드럼세탁기를 내리고 새 제품을 설치했다. 세탁실 청소는 미리 해두었으나 세탁기가 놓여있는 바닥은 드럼세탁기가 아래층으로 내려진 후 하려고 했는데...


고가사다리 설치에 시간이 걸리는 동안 잠시 부엌을 정리할 때 설치기사가 바닥걸레를 요청했었다.


마른 타월을 건넸는데 금세 드럼세탁기가 내려지고 기사분이 직접 세탁기 바닥 부분을 닦아냈나 보다.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에 새 제품 설치까지 완료하고 사용설명을 위해 나를 불렀다. 사용설명도 알아듣기 쉽게. 참 좋다.


새 세탁기를 설치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세탁실에 눈길이 갔다. 마치 화분의 꽃에 주는 눈길처럼 설렘과 기쁨이 담겨서. 보낸 드럼세탁기에 대한 고마움, 그리움과 별개로 새 세탁기를 환영하는 마음도 자라는 중이다.


내일은 새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어 가동해 봐야겠다. 1990년대 사용했던 세탁방식을 유지한 2024년 통돌이세탁기의 기능이 궁금하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덕분에 오늘 행복해서 감사하다. 돌아보면 젊은 시절엔 내일에 시선을 두느라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잊는 일이 잦았었다.


오늘은 행복을 전하고 간 S전자 설치팀이 보내온 사용 불편 유무 문자에 응답하며 감사를 전하고, 구입후기에 감사를 담아 응하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분들도 행복한 하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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