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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무

부모님 덕분에 따스하게

by 윤혜경


덕분에 따스하게


친정어머니는 그러셨다.


젊은 시절 우리가 도착하면 준비된 방의 침대 위 이부자리는 정갈하게 풀이 먹여져 있었다. 땀이 많은 사위를 위해 다림질되어 고슬고슬했다. 매번 침대커버와 이불커버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좋았다.


직장인인 친정엄마의 수면을 줄인 수고 덕분이다.


떠나올 때면 가장 예쁘게 핀 꽃화분을 골라 포장하시고, 씻어 볶은 소금과 목건강을 위한 소금물부터 챙겨주셨다.


성대기능이 튼실하지 못해 교사생활 내내 어려움을 겪었던 큰딸을 위해 모과청, 유자청, 생강청과 밑반찬들에 가는 길의 간식까지 미리 준비하셨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결혼 전부터 냠냠거렸던 단골 제과점의 나비파이들, 밤양갱, 상투과자와 밤만주는 미리 구입해 두셨다. 동생들은 맛을 못 보았을 수도 있음을 이제야 떠올린다. 돌아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친정을 그리며 오래 '냠냠'거렸었다.


이 제과점 과자들은 시드니 우체국까지 배송되기도 했다. 유아원 대기 중이어서 아직 24시간 엄마와 함께인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앉히고, 아이무릎 위에 가벼운 소포박스를 얹었다.


작은 딸은 무릎 위에 놓인 박스 위에 코를 대어보며 킁킁거렸다. 돌아오는 길 내내 아버지의 멋진 글씨체로 쓰인 친정주소와 Korea 글씨를 힐끗거리며 눈물이 방울거렸던 품목이다


친정에 들른 딸 가족에게 주고 싶은 물품들을 아주 튼실하게 끈과 테이프로 박스포장하여 차 트렁크에 싣는 일은 꼼꼼하신 아버지몫이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우리들의 손 흔들기가 끝나도 두 분은 우리들의 차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셨다.


9살 차이가 나는 바로아래 여동생은 내가 근무하던 여고로 배정되었다. 심지어 여고 2학년 때는 내 학급 학생 명단에 들어와 있어 화들짝 놀라 주임선생님과 의논 후 학급을 바꾸었다.


당시는 '최선을 다한다'라고 여겼지만 내리막길의 양가 부모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하지 못했음을 부모님의 그때 연세에 도달하고서야 깨닫는다.


60년이 넘게 부모님을 늘 든든한 느티나무처럼 내 울타리로 행복해했다. 서툰 결혼생활에 허둥대는 큰딸에 대한 응원은 흔들리지 말고 미혼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라는 신호로 이해했다. 기혼인 나는 미혼 동생들의 앞길을 막는 명패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



끝없는 민폐


첫 해외 이사 때 큰딸인 나는 바다 건너갈 최소한의 옷과 식기류 등 기본적인 이삿짐을 선별해야 했다. 2세와 4세 어린아이 둘을 돌보며 필요한 서류들을 떼고, 부동산 중개소에 집을 내놓고, 출국 전 필요한 일들을 하러 다니느라 혼이 빠져 있었다.


친정아버지의 큰 눈을 똑 닮은 나는 친정아버지가 그러시듯이 입 속에 염증이 번져서 보라색 약을 바르고, 코 끝은 이미 볼만하게 붉게 부풀어 올랐다.


출국에 필요한 크고 작은 서류 준비에 분주한 큰딸에게 방학 중인 여동생을 보내셔서 내 어린아이를 돌보게 하셨다. 덕분에 국제운전면허까지 습득했다.


결국 집 관련 사항은 부동산중개소에 사기를 당한, 세상 물정 어두운 큰며느리가 출국 후 공대 출신의 시아버님이 정리해 주셨었다. 남편은 이미 해외근무 중이다. 돌아보면 참으로 엉성한 출가외인인 딸에 큰며느리였다.


5년 만에 귀국해서는 친정 부모님께 맡겼던 짐들을 모두 빼오는 통에 친정부모님네는 본의 아니게 이사하는 집처럼 수런수런한 상황이 된다.


내 무거운 장롱을 받아들이시느라 처분한 엄마 장롱은 내 귀국과 함께 새로 구입해야 했음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내 이사 때마다 친정도 반이사 상태가 되곤 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나이가 들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상황에서도 시부모님은 우리가 들어갈 아파트를 모두 수리해 놓으셨다. 동서들은 "본인의 취향에 맞게 수리해야 하는데... " 하고 말렸다며 고갤 흔들었다.


큰 아들 출국 1년 후 아들이 보내드린 비행기 티켓을 들고 호주를 방문하셨었다.


바리바리 선물을 준비하셔서 호주를 방문하신 시부모님은 영어 의사소통이 안 되는 곳곳에서 길눈도 어둡고 운전도 못하는 멀건 며느리와 아주 답답하셨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병원 다녀오는 길에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큰딸과 불쑥 인사드리러 가면 용돈 봉투를 한사코 밀어내시곤 했다.


거실 서랍에 기어이 넣어드리는 동안 치매기가 시작된 당신은 서둘러 뒤뚱거리며 일어나서 안방 옷장서랍에서 흰 봉투를 꺼내와 큰 손녀에게 용돈을 건네셨다. 내 큰딸은 월급을 타서 이젠 조부모께 용돈을 드릴 나이에 거꾸로 용돈을 받는 중이다.


생전 시어머님은 비용을 별로 들이지 않고도 맛깔난 밥상을 준비하시곤 했다. 구순을 앞두신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 문득 된장찌개를 할 때 김치국물을 넣으시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제 된장찌개에는 배추김치의 잘 익은 국물을 한 수저 넣어준다. 어머님은 된장국의 텁텁함을 새콤한 김칫국물 한 수저로 해결하셨다.



거실 창가에 위치한 독서테이블 위의 화분에서 피어난 <클레로덴드롱>의 붉은 입술에 스프레이로 물을 준다. 뿌리에는 듬뿍 줘야 한다. 세상 순한 꽃이다.


"목말랐구나, 아이고 미안해."


꽃을 보며 혼잣말하는 습관은 친정어머님 스타일이다.


밥 먹을 짬도 겨우 만드는 내 작은 딸은 육아와 직장일을 병행하는 중에도, 마음 환기를 위해 자주 꽃 화분을 구입하곤 한다. 내 집처럼 작은 딸 집의 식탁 위나 욕실에 앙징맞은 작은 화분이 놓여있다.


*Bottle Brush (출처: Google)


작은 딸네 현관입구에 붉은색 꽃이 핀 Bottle Brush(국내에선 '병솔나무'로 번역됨) 화분도 서있다. 아이가 6학년 시절에 대체로 온화한 기후인 시드니에서 우리 집 입구에 있던 Bottle Brush 나무와 닮았다. '우유병 닦는 솔' 모양의 꽃을 피우던 시드니의 Bottle Brush는 주로 핑크색, 붉은색 꽃을 피웠다.


식물이 탄생하고 성장하여 꽃망울을 맺고 찬란한 개화 후 다시 사그라드는 삶을 보여주는 꽃화분에 이어 초록 잎만 가득한 나무화분까지 집에 두고서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습관 또한 친정부모님에게서 나를 거쳐 작은 딸에게로 3대째 이어지는 중인 '꽃에 대한 관심'이다.



젊은 시절의 발레와 노년의 수영으로 다져진 친정 엄마 몸의 유연성 덕분에 대형교통사고 후 기적 같은 회복이 있었다지만, 엄마는 진작부터 호흡이 거친 흰머리의 할머니로 절뚝거리신다.


그런 몸으로 일 년 후 두 여동생의 1개월 간격으로 연이은 출산 뒷바라지를 하셨다. 퇴직 전엔 지방에서 사업 중인 남동생의 큰아들을 데려와 초등학교 6학년 시기를 돌보셨다.


사춘기가 시작된 남자아이는 어려운 교사인 조부모보다는 마음속 깊이 부모를 그리워했을 텐데, 공부가 뭣이라고.


퇴직 직후엔 파산한 여동생네가 일어설 수 있게 합가 하셔서 육아에 도움을 주셨다. 오늘날 잘 자란 조카들과 멋지게 일어선 동생네를 보며 부모님의 혜안을 실감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부모님의 마음 읽기에 자식은 늘 뒷북이다. 하여 옛 시간을 떠올리며 내리사랑으로 품 넓은 부모님 흉내를 내어본다.


가끔 예기치 못한 돌봄 공백으로 인한 작은딸의 긴급 전화에 친정엄마를 떠올리며 버선발로 달려가보지만, 아, 뭉근한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아직도 어림없다.


게다가 병들고 힘없는 노부모의 쓸쓸함과 요양(병)원에 대한 두려움, 자식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짐작도 못한 채 여전히 내게 기대진 가족과 내 삶의 바퀴를 돌리느라 숨차다.



부담 갖지 말고 훌쩍 다녀가거라


*친정아버지의 서황금

내가 부모님을 그리며 고작 하는 일은 2015년 다녀가시며 내 단골 화원에서 친정아버지가 골라 선물해 주신 어린 서황금(황금관음죽)을 보살피는 일이다.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는 큰딸과 절망이 어른거리던 시절에 화분들을 관리할 여유가 없어 아프리칸 바이올렛부터 관음죽까지 아파트 1층 입구에 내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분이 살아남아있다. 예쁜 항아리의 군자란 화분은 누군가 가져갔지만, 비실대던 서황금은 누구의 손을 타지 않았다. 겨울 입구에서 다시 찾아왔다. 이제 물을 제때 주고, 영양분을 꽂아주고 햇살과 바람을 가끔 들여주는 일에 마음 쓴다. 다행히 잘 지낸다.


1990년대 초반에 시드니로 엄마가 보내주신 멋진 앙고라스웨터는 30년이 넘었지만 내 겨울 외투 속의 외출 스웨터이다. 많은 스웨터 중 여전히 가장 따스하고 곱다. 이번 부모님 방문길에도 외투 속에 입고 다녀왔다.


삶의 길목마다 판단이 어려울 땐

'지혜로운 친정어머니는 어떻게 하실까?'

를 상상해 본다.


더 긴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시는 부모님을 거울삼으면 적어도 치명적인 실수는 줄일 수 있을 테니. 친구들 중 유일한 큰딸인 나는 운 좋게 부모님이 계신다.


함께, 아니면 옆집에라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친구들은 육아 중인 직장맘으로 생활하는 딸과 같은 아파트의 옆 동으로 이사하거나 딸네 집과 마주 보는 집으로 이사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는 중이다.


아들을 둔 친구들은 조용하다. 오지랖은 금물이다. 아들과 며느리를 배려해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기는 당연하므로. 딸의 경우는 딸이 요청하는 육아 보조가 이유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분신인 딸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고.


12월 행사 때 잠시 방문한 내게 구순의 거동이 불편하신 친정아버지는 '고맙다'를 연발하셨다. 떠나는 시간에 보행기에 기대어 서서 내 두 손을 꼭 잡으신 아버지는 촉촉해진 눈빛으로 당신의 속을 내비치셨다.


"많이 바쁘지?

그래도 우리가 살아있을 때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네."


"부담 갖지 말고 내 딸이 시간이 될 때 훌쩍 다녀가거라."


새해 첫날 함께 저녁 식사를 끝으로 작은 딸네가 집으로 돌아갔다. 차분해진 남편은 친정 부모님 댁에 가까운 호텔 후기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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