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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살 반 아이가 준 최고의 새해선물

외할머니 집에서 살고 싶어요

by 윤혜경


2023년 12월 31일 '김밥'과 '와인'


2023년 12월 31일 저녁은 송년손님인 사위와 딸 그리고 세 살 된 손주를 위해 우리 집 세 식구 중


남편은

아이용 닭꼬치구이

성인용 새우소금구이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아내는

사위가 좋아하는 갈비구이

딸이 좋아하는 가자미 전분구이


큰딸은

야채샐러드

후식

아이를 위한 과일 등

을 준비했다.


송년특별 메뉴로 지난번 작은 딸 집 방문 때 아이가 원했던 김밥 만들기를 추가로 준비했다.


(사진출처: 구글) 미니김발

지난가을 작은 딸의 퇴근 시간이 늦어져서 2시간쯤 돌봄을 하던 시간에 저녁을 다 먹이고 뒤처리가 끝났을 때다.


아이는 내가 여름에 선물해 준 아이용 김발을 싱크대 서랍에서 찾아 흔들며 내게로 왔다.

선물과 준 사람을 잘 연결하다니 또 감격이다. 어린아이의 조그만 머릿속에 입력된 게 많다.


"외할머니, 오늘 김밥 만들고 싶어요."

"저녁 먹었는데?"

"그래도 외할머니랑 김밥 만들고 싶어요."

"어, 재료가... 그래 김이 있나 보자."


<김밥 만들기>를 즐거운 놀이로 이해하는 아이를 위해 둘이 함께 냉장고와 찬장을 뒤졌지만, 큰 김은 고사하고 도시락 김도 찾지 못했다.


세 살 어린아이는 부모의 노력으로 말씨가 참 예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남자아이 특유의 소리지름에서 조그만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부드러운 톤으로 "스톱"을 표현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이가 "STOP"을 말하면 어른도 다시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아이의 생각을 듣고 의논을 한다. 아이의 일방적 주장에 어른이 "Stop"을 말해도 효과는 같다. 톤을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다.


"엄마가 분명히 준비해 놨는데... 어디 있지?"

"할머니 생각엔 김이 집에 없는듯하네."

"아니에요. 지난번에 우리 엄마랑 김을 샀어요."

'우리 엄마는 김을 어디에 두셨을까? 할머니는 안 보이는데?'

"이상하다? 분명히 있었는데...?"


결국 김을 찾지 못해 손바닥만 한 김발만 애꿎게 흔들어 보인다. 곧 포기하고 트럭놀이로 관심이 옮겨갔다. 눈물을 흘리거나 떼쓰지 않아서 늦은 밤에 지하슈퍼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연유로 올해 12월 31일 저녁메뉴 준비는 남편 따로 아내 따로이다. 마치 백화점 지하 1층의 식당코너에 모여 앉은 주문처럼. 넓지 않은 주방에서 '함께 따로따로' 고집쟁이 남의 편과 눈치껏 스텝을 밟으며 소음이 나지 않게.


아이와 함께 만들 김밥을 위해 시금치나물, 불고기, 당근볶음, 단무지 등재료를 준비하고 소금과 매실즙, 참기름 등 밑간을 마친 따뜻한 밥을 식탁 위에 놓았다.


각자 앞에 얇은 플라스틱 도마와 비닐을 씌운 성인용 김발 2개가 놓여 번갈아 사용할 수 있다.


아이는 김밥 만들기에는 잠시 참여하고 다시 쌀놀이를 하러 갔다. 덕분에 사위와 작은 딸이 열심히 김밥을 말았다. 사위는 음식 만들기를 곧잘 시도하는 편이다.


"저는 김밥 만들기는 처음입니다."

"군대에서도?"

"사 먹기만 했습니다."


작은 딸과의 결혼 후 내가 차린 사위의 생일상에 사위는 내 생일상을 차려주는 것으로 답하였었다.


두 딸바라기였던 나는 당시 예의를 갖추는 신혼부부 앞에서 20대 중반의 아깝고 아까운 내 작은 딸을 일찍 출가시킨 게 실감 나 눈앞이 흐려졌었다.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지나고 보니 작은 딸의 이른 결혼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3년 후 시작된 투병으로 잦은 입퇴원과 응급실을 안방처럼 드나들던 큰 아이에만 집중해서 24시간 함께 할 수 있었으므로.


대신 작은딸은 결혼적응 과정에서 도란도란 격려해 줄 친정이 없던 시간이다.


성글게 말아져서 내가 다시 꼭꼭 눌러준 김밥의 외모는 제법 그럴듯했다. 김밥에 맞게 심심한 우거지 된장국을 끓였다. 그이는 저녁 술안주로 생오징어 버터구이와 닭 근위 튀김에 마늘구이를 곁들여 준비했다.


남편의 새해 메뉴


새해 첫날 아침


자수프

PB의 갓 구운 빵

홍합 스튜

구운 베이컨과 야채샐러드

올리브와 청양고추에 마요네즈를 섞은 그 남자의 특제 소스





새해 첫날 점심


디너 접시에 밥 소량

사이드보올에 담은 새해 떡국

LA 갈비

야채샐러드

김치, 물김치

오이장아찌, 매실장아찌 무침


사위가 특별선물로 웃으며 강조한 고급와인

그리고 호두파이, 빵들을 후식으로.


식후에 사위가 바람처럼 나가서 사 온 남편의 최애호인 별다방의 카푸치노와 우리들의 커피들



큰딸이 준비한 망고, 딸기, 키위, 오렌지, 배

아이와 함께 만든 식혜까지.


점심까지 먹은 후, 남편은 작은 딸을 더 쉬게 하고 싶었다, 내게 묻지도 않고.


*실수로 참깨용기 뚜껑이 열리며 La갈비 위로 쏟아지고 ㅠㅠ


"저녁까지 쉬었다 가도 괜찮아."


남편의 제안에 딸과 사위는 짧게 낮잠을 잤다. 어린아이는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부모가 잠든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외할머니의 그리움을 알아차린 듯.


잠깐 휴식을 취한 아이아빠는 뒷산의 눈과 놀이터를 보고 싶어 하는 3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날렵하게 나갔다.


잠시 뒤에 잘 조성된 나지막한 뒷산의 둘레길에서 쌓인 눈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이 카톡방에 올라왔다. 아이의 분리불안이 겨울 산의 눈을 보며 편안해지기를.




새해첫날 저녁


저녁식사를 이미 준비했는데 작은 딸은

"지난번 언니가 아주 좋아하던 닭메뉴 추가할게요." 했다. 필요할까? 주저하다가 딸의 제안 이유가 있겠지 싶어 따르기로.

그렇게 배달된 P닭 메뉴의 멋진 포장에 나는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저렴한 육류인 닭이 아주 깔끔하고 예쁘게 포장되어 왔다. 덕분에 나도 P닭의 고객이 되기로. 미리 준비한 저녁상에 더해서 모두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

아이도 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행복해했다. 새해 1월 1일에 음식배달이 되는 세상이라니. 그 서비스를 위해 새해 첫날에도 쉬지 않는 그들 덕분에 우리 모두 행복하여 감사했다.








"외할머니 집에서 살고 싶어요."


수런수런 했던 작은 딸네가 떠나고 나니 금세 적막하다. 수선스럽던 반려견 <수리>도 아이의 빈자리를 채우진 못한다. 입을 닫고 덩달아 늘어져서 눈만 꿈벅거린다.


아이가 다니던 동선마다 아이의 놀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벌써 그리울 지경이다.




떠날 때 아이는

"외할머니 집에서 살고 싶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했던 톤으로 반복했다.


아이가 내게 준 최고의 새해 선물이다.


다행이다. 도움을 제때 주지 못해 부채감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아이가 즐거워해서. 심지어 외할머니네서 살고 싶다는 마음까지 소리 내어 전달한 덕분에 구름그네를 탄 듯 내 스텝이 건들거린다.



가족 그리고 남의 편 덕분에


작은 딸네가 아이와 함께 떠난 후 우리는 뒤처리가 남아있었지만 남편과 큰딸의 손길이 빨랐다. 흐트러진 쌀알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리며 침대 등 뒷정리를 하면서도, 아이가 했던 말과 동작을 끝없이 반복하며 우린 엔도르핀(endorphine: 몸 안에서 분비되는 모르핀. 세르토닌과 함께 행복호르몬으로 불림)을 만들어냈다.


적어도 오늘 그이와 큰딸의 눈부신 활약으로 부엌일에서 잠깐잠깐 해방된 나는 2023년 마지막 날과 2024년 새해 첫날에 세 살 손주와 눈높이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


새해 첫날 아이와 외가의 라포형성은 대성공이다. 지금도 난 댄스가수들의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고 싶게 들떠 있으니.


가족들 덕분에 행복하고 참으로 감사하다. 특히 남편의 늘어가는 손맛과 반짝거리는 센스 덕분에 연말연시 귀한 아이 손님초대가 훨씬 수월했다.


한때 결혼생활로 인한 경력단절에 대한 원망과 삶의 독립을 주장하며 남의 편이라고 눈을 흘기던 긴 시간들이 지난 이제는 내편으로 불러야 할까 보다.


그 남자는 내일 또 순간 남의 편으로 변신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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