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와 촉감놀이

쌀놀이와 식혜 만들기

by 윤혜경


쌀 촉감놀이


한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저녁때 내 집에 도착한 조그마한 아이는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거실 한쪽에 놓인 운동기구 스테퍼 (stepper)에 올라 앙징맞은 두발을 아슬하게 벌려 발판을 움직여본다.


드디어 성공이다. 금세 또 자랐나 보다. 그리고 아이는 배시시 웃음 지으며 부엌으로 갔다. 그곳에서 바퀴 달린 작은 쌀통을 살짝 잡아끌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기에 관심이 있어요"


쌀놀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는 몸짓이다.


스태퍼에 오르기 전에는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쌀놀이는 어질러지니 할머니의 수고로움이 동반되어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난 고갤 끄덕이며, 만 3.8세 남아의 촉감놀이를 위해 10여 년 전 사용한 작은 딸의 대형 폐백 보자기를 꺼냈다. 빨강과 파랑 색깔의 이중 보자기는 아이가 쌀놀이를 하기에 두툼하고 크기가 넉넉하다.


*장난김 역할을 잘 해준 쌀통


작은 딸에게도 똑같은 쌀통을 구입해 보냈지만 집밥 먹을 기회가 적어 쌀통속에서 여름 벌레 발생 우려가 컸다. 진작 폐기처분하고 쌀은 냉장고에 넣어둔다. 대신 아이가 커피콩들을 트럭에 싣거나 손등 위에 올려쌓는 놀이를 할 수 있게 도운다.


아이는 우리 집에선 쌀통의 버튼을 눌러서 1인분씩 쌀이 내려오는 소리가 좋은가보다. 그렇게 버튼놀이를 하다가 성에 안 차면 쌀을 뿌린다.


이럴 때 나는 아이가 쌀을 뿌리고 놀 수 있게 부엌 한쪽에 일단 대형 보자기를 편다. 식사준비가 시작되니 복잡한 공간이지만.


아이는 금세 폐백보자기 위에 앉아서 가져온 꼬마 자동차들을 쌀 위에 놓고 쌀을 쏟아 올린다. 자신의 주먹에 담아 다시 쏟아내 보고, 뭐가 그리 좋은 지 시종 '깔깔' 댄다. 높이 올린 주먹 사이로 쌀알이 빠져 내리는 모습이 좋은가보다.


끝없이 내게도 권해서 난 꼼짝없이 아이와 함께 쌀을 든 손을 높이 올려 쌀을 쏟아내리는 놀이를 했다. 기분이 들떠보이면 보자기와 거실로의 이동을 제안한다, 합당한 이유를 대며. 아이는 대체로 수긍한다. 거실에 아이를 위해 세탁해 둔 흰색의 둥근 러그(rug)를 편다.



*그림동화에 나오는 이야기 소품


아이의 주의를 돌리려 미리 시간 들여 준비한 놀이를 꺼내보았다. 부직포로 만든 커다란 배(ship)를 검은 패널에 붙이고 어부가 탄 배 속에서 복어, 오징어, 갈치 등 <물고기 그림 꺼내기>도 했지만, 아이의 관심은 금세 쌀놀이로 집중되었다.


나는 작년에 배워둔 <먹보다람쥐 그림자극>을 펼칠 기회만 엿보는 중이다. 도구 없이 구연동화로 몇 번 해주니 눈이 반짝거리고 질문이 이어졌었다. 그림자극은 성인이 모두 참여해야 해서 적당한 시점을 잡아야 한다.


사이즈가 다른 계량컵들에 쌀을 열심히 담아 옮기는 어린아이는 작은 손을 모아 손뼉을 치며 웃음소리를 베란다 풍경처럼 울려준다.


작은 손등 위에 쌀을 쌓아 올린다. 앙징맞은 발 위에 쌓아 발을 숨기고, 서서 발로 밟아보기도 한다. 곡식 중 쌀은 손에 닿는 촉감이 특별히 좋다. 아이는 쌀을 넣어 만든 콩(?) 주머니 던져 올리고 받는 놀이도 좋아한다.


물론 촉감놀이에 사용된 쌀은 일부 쌀눈이 떨어지고 작은 이물질들이 있어 아이가 간 뒤에는 따로 보관한다. 젊은 부부는 미안해하며 놀이에 사용된 쌀을 빗자루로 쓸어 담아 폐기하여 엄마의 수고를 덜고 싶어 한다.


부모세대는 쌀에 대한 소중한 감정을 지닌 세대이기에 놀이에 사용되어 먼지가 섞여있더라도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한다.


플라스틱 대야에 담아 까부르며 먼지나 반려견 수리의 털, 머리카락들을 정전기를 이용해 제거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별도로 담아둔다. 밥으로 만들기 전에 물로 여러 번 더 잘 씻어야 하는 기분 좋은 수고는 덤이다. 아직은 밝은 눈으로 구분해 낼 수 있어 감사하다.



식혜 만들기


*예전에 만든 식혜 사진. 식혜밥을 끓이지 않고 여러 번 씻어 따로 얹어주면 하얗게 떠오른 밥알이 예쁘다.



다음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식혜 만들기에 아이가 참여케 했다. 엿기름에 물을 부은 뒤 손을 깨끗이 씻은 아이가 주물러서 뽀얀 물이 생기는 걸 보게 하니 웃음을 자꾸 터트린다.


"네가 잘 섞은 가루가 식혜로 변하려면 4시간만 기다리면 돼. 우리는 점심 먹고 나서 훈이가 만든 식혜를 먹을 수 있어."

"우와, 맛있겠다. 외할머니, 식혜 좋아요."


아이가 눈을 또 깜박거린다. 아이 돌봄 이모가 잠시 아파서 새 돌보미를 구했을 때 그랬었다.


당시 자기편은 아무도 없이 종일 낯선 사람의 다른 스타일 육아에 적응하느라 긴장했었나 보다. 이번엔 며칠 전 영상통화 때보다는 훨씬 줄어서 다행이다. 어린이집 담임교사가 처음 발견해서 면담이 이루어졌었다.


이번에도 그동안 잘 도와주던 아이 돌봄 이모가 암수술 후유증으로 피치 못하게 쉬게 되었다. 헤어짐은 참 불편하다. 서로 상황이 딱해서 폭풍눈물을 쏟았었다. 몸의 이상을 느끼고 8주 전 의논했으나 연말 회사일에 바빠서 새 사람을 뽑을 짬이 없었다.


새 돌봄 이모를 구할 때까지 가까이 계시는 친할머니댁에서 3일을, 부모와 4일을 나누어 지내며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


할머니는 산후조리 이후부터 지금까지 주 1일 돌봄을 이어오신다. 공직 은퇴와 함께 아이 돌봄 일정을 늘려보기로.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조차도 엄마 대신이 될 수는 없나 보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10월쯤 작은딸의 해외 출장 중 사위의 부탁으로 내가 아이집에 가서 돌봐주던 밤에 아이는 잘 놀다가 내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외할머니, 엄마 보고 싶어요."

"아, 우리 엄마 보고 싶다.

나는 엄마가 보고 싶은데...

할머니, 엄마 보여주세요."


마침 핀란드에 머무는 아이엄마가 시차를 잘 확인해서 페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핸드폰에 비친 엄마얼굴을 손가락으로 만지게 하는 정도였다. 알코올로 미처 닦지 못한 상태인 핸드폰을 내밀었다.


"엄마 코 만져봐,

입술도.

엄마랑 뽀뽀했어?

엄마 귀도 만졌어?"

엄마 안아봐."


한사코 엄마가 나타난 핸드폰을 계속 켜놓아 달라는 아이에게 "엄마는 곧 회의 들어가. 외할머니랑 잘 자. 엄마가 서울 가서 만나자" 하며 아이엄마가 끊으려고 했다.


전화 끊을 때 <빨간 버튼 누르기>'를 좋아하는 아이지만, 이번엔 핸드폰의 빨간 버튼을 행여 외할머니가 누를까 봐 작은 손으로 가렸다. 아이엄마가 다정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은 후 아이는 내게 기댔다.


"외할머니, 안아주세요."


내게서 제 엄마 냄새라도 난다면 좋겠다. 이러니 둘째 출산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못한다.


돌아보면 나도 어린 시절 해가 지면 퇴근하신 엄마가 집에 계셔서 차분히 책을 읽을 수 있게 안정되었다. 심지어 결혼 후에도 해가 질 무렵이면 친정엄마가 그리웠다. 직장생활을 하던 엄마를 여고시절까지 서운해했었다. 자랑하고 싶던 입학식도 졸업식도 못 오셔서.


딸의 업무도 아이양육도 중요한 상황에서 친정엄마인 나는 행여 어린아이의 심리불안에 딸이 흔들릴까 소심해진다. 말수 적은 딸이 한 줄로 아이의 정서를 언급하는 걸 나는 듣기만 한다. 부추겨지거나 걱정을 키우는 일이 될까 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정서안정은 가장 중요하다. 어쩔고?


다행히 어린아이는 오늘 2023년 마지막 날의 내 대응이 아주 마땅한가 보다. 외할머니 노릇에 합격점을 받은 듯하다.


"외할머니, 우리 집에 오세요.

엄마, 난 외할머니 집에서 살래.

아빠엄마만 집에 가!"



*퇴고도 제대로 못한 졸고를 읽어주신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시간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래도 씩씩하게 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