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커피 타지마라
겨울이 되면 시어머님의 부엌 찬장 낮은 칸 왼쪽에서는 한때 전 국민의 소화제로 명성을 떨쳤던 '가스명수' 크기보다는 좀 작은 갈색 글리세린 병이 보이곤 했다.
당시 부엌일을 모두 맨손으로 하시는 50대 초반의 시어머님의 고운 손가락은 겨울이 아니어도 명절즈음이면 물에 퉁퉁 불어있었다. 한 달 전부터 명절음식을 위한 밑손질이 시작되는 까닭이다.
명절에는 큰 교자상이 2개씩 최소 2번은 돌려져야 30명이 넘는 아버지 형제들과 식솔들의 식사가 끝났다.
안방에 펼쳐진 긴 교자상에서의 남자 어른 식사가 끝나자마자 주방의 여자들은 다시 접시들을 나르고, 치우고, 닦고, 데우고.., 수저°젓가락들을 다시 씻어 2진을 위한 상차림 준비에 행주를 들고 눈도 손도 바쁘다.
한쪽에선 남자어르신들 후식으로 떡과 식혜, 과일이 놓인 작은 상들을 차리는 중이고,
작은댁들, 그분들의 사춘기 아들들, 나중엔 성인 아들과 딸들, 며느리들 그리고 어린 손주들이 밥 먹을 준비로 분주한 시각이다.
식사 후 담소를 이어가던 조부모님, 시아버님을 비롯한 작은 아버님들, 시고모님들, 사촌시동생들은 거실 소파와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시어머님의 구시렁 표현에 의하면,
'밥숟가락을 빼자마자 눈치 없이'
시아버님은 연신 내게 신호를 보내신다.
"아가, 여기 커피 한 잔~ "
다른 분들의 커피 주문도 받아 함께 커피잔을 채우고.
나의 호주 5년 생활 후 커피담당은 막내시동생으로 교체되었다.
"너는 커피 타지마라.
너무 연해.
막내가 타라.."
*Aynsley Orchard Gold(출처: Google)
시드니 대학원 시절 졸음을 쫓느라 종일 홀짝거려야 했던 연한 아메리카노 스타일에 맛 들여진 나와 달리 설탕과 프림을 진하게 넣은 막내시동생 커피는 확실히 다방 스타일의 달달함과 고소함이 뛰어났다.
(시드니 식당들이나 카페 커피는 진하고 써서 우린 뜨거운 물을 얻어 희석하곤 했다. 집에선 보리차처럼 자주 마시니 연하게).
내 옆지기도 오래전부터 '식사직후커피' 중독 수준이다. 그 남자는 대부분 직접 준비하는 커피인 데다 아내취향까지 물어 서비스를 하니 민폐는 아니다.
명절의 구시렁
당시 남자들이 옮겨 앉은 거실 소파 앞 TV화면엔 바둑 프로그램이 펼쳐져 있고, 아버님은 바둑에 취미가 있으셨다.
양가 모두 큰집이니 명절이나 제사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친정은 확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축소된 뒤에도 직계 자식이 1남 4녀이니 빠릿빠릿한 여자 일손이 많다. 시댁은 아들 삼 형제이다.
내 젊은 시절 시댁은 젊은 세대도 남자가 대부분이라 시어머니와 내 일손으론 어림도 없다. 2남 1녀씩 두신 작은 어머니 두 분까지 부엌일을 거들었다. 나중에 두 동서가 생기고선 수월해졌다.
평소 인원의 8~10배 인원인 명절과 제사 참여자들의 입을 위한 양가 어머님들의 물 밑 준비가 얼마나 많은지는 이제야 겨우 어림짐작하는 정도이다.
그렇다 해도 명절의 남녀불평등 수준은 시댁이나 친정 모두 "오십 보 백보"이다.
큰며느리인 양쪽 어머니들의 희생과 수고와 적잖은 지출로 이어지는 남자집안의 전통 이어가기에 나는 결혼 전이나 후나
입술을 비죽거렸다.
서양문화를 10년 넘게 경험한 뒤엔 가족관계와 전통 계승 그리고 가사노동의 불평등과 서열문화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졌다.
큰며느리로 끝까지 의무만 부여된 나는 그런 날 행사, 특히 평일 제사 참여 후 집에 돌아와서 장남인 남편에게 구시렁거렸다.
"나는 내 딸들이 내 제사는 지내지 않게 할 거야.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이어지는 전통 유지는 공평하지 않아."
남편은 귀를 막은 듯 커피를 마시며 TV화면에 눈을 고정시켰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훗날 남편은 해외장기거주 기회를 3번이나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해외에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시댁 여자 일손 중 나만 일방적 희생에서 자주 길게 탈출한 셈이다.
내 기억 속의 양가 명절은 남녀 차별의 극치이고, 부당함의 종합세트였다. 가사노동에 익숙해진 여자들 노력으로 가족들이 명절에 맛있고 귀한 특식을 맛볼 수 있음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후일 내가 본 서양가정의 손님초대 파티준비에선 남자 구성원들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
그곳 남자들은 내 대학시절 서클 활동에서처럼 청소, 정리, 테이블세팅, 음악 준비, 술 준비, 바비큐 준비 및 구이, 아이들과 놀아주기, 반려견 챙기기, 선물포장, 여흥 준비 등을 나눠 맡았다.
그 시절의 문제는 한국명절에서는 외벌이건 맞벌이건 간에 약한 여자보다 체력 좋은 남자들이 늘 구경꾼이고 오롯이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 손님이라는 점이었다.
'엄마들'이 문제!
50년대생으로 친정엄마 시엄마가 되는 중인 친구들과 얘기 끝에 우리 가정 전통계승에서의 문제는 '엄마들'의 남녀차별 의식이 개선되지 않음이 가장 큰 원인으로 결론 내렸다.
엄마들이 가정교육을 통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도 외면해 온 결과는 여성 입장을 존중하지 않고 힘으로 윽박지르는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고, 여성 비혼 증가나 이혼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은 내가 들은 다음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연구결과에서도 보고되고 있다.
"내 아들이 부엌에 있는 거는 못 보겠어."
"야야, 남자가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다."
"그까짓 거, 며칠 내가 수고하면 모두 맛있게 먹고 즐거운데 뭘 그리 따질꼬!"
"신혼 집들이초대를 받고 갔더니 며느리는 단장하느라 안 나오고 아들이 부엌에서 스파게티를 만든다고 정신이 없더라고."
"평소에 늘 그런가 봐."
아들 신혼집에 다녀온 내 친구의 남편은 문자 그대로 집안일보다는 외벌이로 가족을 지금껏 지원하는 386세대이다.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뽑을 줄 아는 정도라나. 부엌일은 친구전담이다.
'아들이 며느리를 위해 식사준비에 최적화되어 있더라'
친의 푸념에 딸들 엄마인 몇몇 친구는 친구아들을 응원했다.
"지혜로운 아들이야."
엄마들 희생 덕분에 결혼 전 명절은 딸인 나도 특식에 들뜨고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작은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 고모들, 당숙들, 당숙모들, 그리고 사촌들과 시공간을 초월해서 따스한 안부를 주고받는, 몹시 정겨워지는 시간이 되곤 했다.
친정은 명절과 제사 전날이면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생존 형제들이 오셨다. 아버지형제에 더해 그분들 직계자손인 아버지 사촌형제들도 모였다. 작은할아버지들, 할머니들, 사촌고모들, 당숙들, 당숙모들까지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고,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넘쳤다. 수는 점점 줄었지만. 내 기대보단 느린 속도로.
어떻게 모두 먹을 수 있었을까? 엄만 직장여성이었는데. 명절 음식준비를 모두 끝내고 제기 준비까지 마무리되고서야 며느리들은 잠자리에 들어가 다리를 폈다. 다행히 시댁은 제기를 몇 개만 사용하고 큰 접시로 대체했다.
다행히 해외여행과 해외거주의 자유로움 덕분에 해외문화를 접하며 아주 빠르게 자녀들도 부모도 바뀌고 있는 중이다.
"우리 먹을 건 하나도 안남을 걸!"
오래 전의 친정에서는 요를 깔고 모두 따스한 방에 누워 잘 자고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 다음날 명절 행사를 거창하게 마치고 정담을 나누는 시간은 서먹함이나 거리감 따윈 모두 녹여냈다.
명절행사가 끝나고 모두 휴식 중일 때 명절 속의 양가 엄마는 음식들을 집집이 나누어 보자기 꾸러미들을 꾸리느라 바빴다.
초등학교 시절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나는 의기투합해서 달콤한 약과와 찹쌀떡 그리고 눈처럼 하얀 유과를 안방 벽장 가방 속에 숨겨두었다.
"엄마는 또 다 싸줄 거야. 우리 먹을 건 하나도 안남을 걸!"
그리고 낡은 가죽 가방 속에서 곰팡이가 편 음식을 나중에 발견한 엄마는 한숨을 쉬셨다.
국제공항의 꽃다발과 공동사회의 봉고차 환송
친정은 특히 명절날 헤어질 땐 마치 공항 환송객들처럼 마당에서부터 대문밖으로 이어지며 인사가 길었다. 요즘 같으면 소음으로 고발당했을지도. 단독주택이니 가능했겠지만.
심지어 아쉬워서 어린아이들 일부는 서로 손을 붙잡고 안 떨어졌다.
덕분에 내가 어린 두 딸과 1989년 해외거주차 첫 출국할 때도, 1993년 12월 크리스마스에 호주에서 5년 만에 처음 귀국했을 때도 작은 아버지댁 외삼촌댁등 친지들이 공항에 나오셔서 '스타 BTS' 맞이하듯 꽃다발을 주시고 선물을 안겨주셨다.
오늘날이면 상상도 어려운... 친지들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돌려드리지 못한 미안함.
민망하게도 나로 인해 엄마가 휠체어에 앉아 귀국하실 때는 외가와 친가 친지들이 봉고차와 승용차 여러 개로 공항에 마중 나오셨다.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 나는 공항 유리도어가 열릴 때마다 휠체어를 놓아두고 숨고 싶었다. 그때 창백한 내 몸무게는 43kg였다.
그렇게 명절을 지내고도 헤어짐이 아쉬워서 결국 고모나 사촌들은 만류에 못 이긴 척 짐을 다시 풀고 우리 집에서 더 머물다 갔다.
친정 사촌동생은 신정 때는 내친김에 겨울방학 내내 우리 집에 남아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았다. 평화롭던 국민학교 시절일 게다.
한 달을 우리 집에서 놀고 떠날 때 친정엄마는 내 동생들 운동회 구멍은 외면하고, 사촌여동생의 발에 새 신발을 신겨 보내곤 했다. 우린 사촌동생 포함하여 지금도 1남 5녀처럼 지낸다.
우리 오 남매에 더해져서 북적거리던 큰집의 방학기간. 전 학년 720여 명의 시험 등수가 교실 복도 벽에 크게 붙는 월말시험 때마다 복통을 앓던 여고시절 나는 방문을 잠가 어린 동생들의 떠드는 소리를 차단하고 문제집을 풀었었다.
글리세린에 물 한방을
다행히 시댁 친지들은 시아버지 형제들로 모두 서울이거나 그들의 직장이 있는 수원 등 거주자여서 명절 밤이 되면 귀가했다. 이어서 두 시 동생네 가족이 떠나고 나면 우리 가족만 시댁에 남았다.
시어머님은 그럴 때 냉장고 한쪽에 넣어둔 소고기 덩이를 내 꾸러미 쇼핑백에 살짝 더 넣어주셨다.
"아이들 먹여라"
그때 내 집은 어머니집 앞동에 위치했다. 첫 번째 해외근무 때 시아버님이 관리해 주시던 남편통장으로 우리 집을 아버님 집 앞동으로 옮겨놓으신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시어머님은 물에 퉁퉁 불은 손 피부 위에 싱크대 선반 한 편의 갈색병 글리세린을 몇 방울 떨어뜨리셨다. 수도꼭지의 물 몇 방울과 재빠르게 섞어 두 손의 안과 밖에 골고루 바르셨다.
"이래야 손가락이 안트더라. 내가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잖니. 내두면 손가락이 막 갈라져서 여간 아파. 너도 이거 좀 써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