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홍시가 딱딱해졌어요

육아규칙 위반

by 윤혜경

아는 선배 덕분에 선배 동생이 운영한다는 지방의 감 농장에 대봉감을 주문했다. 이번 대봉감은 수분이 많고 달달한 품종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과 달리 고구마도 감도 밤처럼 포근한 스타일보단 물렁거려 촉촉하고 달달한 게 좋다. 목이 메이지 않게. 나이 드는 과정이 예전 여고시절에 뵌 할머니 그리고 노쇠하신 부모님이 걸으신 길과 다르지 않다.


주황빛으로 물든 생감은 홍시 용이니 1박스를 눈앞에 두고 빨간색으로 전신이 물들 때까지 제법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AI가 보내온 홍시감과 대봉감 사진


부모님과 같은 동 아파트에 살던 친정 여동생이 부모님 네로 들어온 지 3년째이다. 여동생네 두 아이는 건강하게 성장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각자 다른 도시에 있다. 막내도 집을 떠나 다른 도시의 대학에 재학 중이다.


조금 수월해진 여동생이 직장 다니며, 연로하신 부모님께 힘이 되고 있다. 동생 덕분에 나도 안심하고 내 가정을 돌본다.


맛이 좋다는 대봉감 1박스를 추가로 주문해 보냈다. 여동생은 여름에 아주 맛있는 왕 복숭아를 보내왔었다. 그렇게 큰데 맛도 훌륭한 딱딱이 복숭아는 처음 경험했다. 대봉의 품질도 좋기를.


작은 딸에게도 대봉 한 박스를 주문해주고 싶지만, 그 아파트는 엘리베이터 교체공사 중이다. 택배는 1층에 모여진다. 퇴근 후 대봉 박스를 들고 11층까지 계단 오르기는 상상도 어렵다.


더구나 냉장고를 텅텅 비게 운영하는 딸의 스타일 상 음식을 가져가면 거의 퇴짜다. 신혼 초부터도 부부가 음식을 곧잘 하는 편이라 친정 엄마의 음식선물은

'No Thank You!'(사절)

이다.


엄마가 언니의 병원 동행으로 분주하니 엄마의 고단함을 덜어주고자 하는 속 깊은 처사이지만 가끔은 민망하다. 의사 타진 카톡 창에


"엄마, 우리는 대봉감 안 먹어요."


가 떴다. 행여 엄마가 보낼까봐 딱 잘라 의사를 전달하는 딸.


'나도 엄마에게 그랬을까?'


시간을 뒤돌아본다.

작은 딸과 나는 결정장애가 있는 건 똑같았는데...

작은 딸은 아이 엄마가 되더니 속전속결 결정자가 되고 있다.


그래도 달콤한 홍시를 향하는 대봉감은 작은 딸에게 조금 나눠주기로.




작은딸의 긴 출장 중에 사위가 주말 독박 육아 중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일요일에 육아 수고를 나누려 사위에게 카톡을 보냈다. 전화 카톡상으로 장모의 고단함을 사양하던 사위는

'아이를 보고 싶어서 가니 부담은 아니다.'

는 내 제안에 동의했다. 나도 아주 귀하게 만들어 낸 시간이므로.


아이가 외할머니와 노는 동안 아이 아빠는 눈을 붙이고 안방에서 좀 쉬도록 했다. 유치원 다니면서부터 아이는 낮잠을 생략한다. 남자아이치고는 유순한 편이다. 떼를 쓰는 일은 드물다. 대체로 대화를 통해서 해결된다.


아이부모는 주말이면 주중에 간절했던 수면과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에너지가 충만해서 잠을 자지 않으니 대책이 없다. 부부는 휴일이면 아이를 데리고 박물관, 놀이 공원, 뒷산, 놀이터, 강변 자전거 타기 등으로 아이의 세상 경험을 늘려간다.


지난봄엔 청계산 옥녀봉까지 아이 아빠가 어린 아들과 올랐다. 정상에 오른 아이의 용기를 칭찬하던 어르신이 지폐를 용돈으로 주었다고 했다.


일요일까지 육아도 해야 하는 맞벌이부부는 문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이다. 예전 사회분위기와 달리 여성의 직장생활 강도가 남성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집에서의 엄마 역할도 여전히 더 크다. 집안일은 아이아빠가 나누어 참여 중인데도.


엄마 역할은 아이의 성장속도에 맞춰 옷이나, 책 장난감 등 물건 구매나 구청 미끄럼틀 대여, 도서관 방문, 식품 구매와 집안 정리, 도우미 이모와의 시간 조절 등으로 인한 잔 일들이 적지 않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정보 교환이나 함께 프로그램 참여 의논도 간간이 주고받는다. 하원 후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보호자들의 보호 아래 친구들과 놀다 각자의 배움 일정시간에 놀이터를 떠난다.


유아원 입학 후 4주 차쯤에 보호자들과의 낯 익히기를 위해 아이 엄마는 조금 일찍 퇴근해서 놀이터에 도착했다. 엄마가 나타나자 4세의 아들아이는 궁둥이를 흔들며 미끄럼틀 주위를 친구들과 달려 다녔다. 트램펄린도 훨씬 높게 뛰었다.


자주(?) 돌아오는 유치유아원 방학 동안의 임시 돌봄 순번 정하기도 아이 엄마의 큰 업무이다. 돌발상황 시 양쪽 할머니와 돌봄 이모 전화 통화와 메시지로 가능한 시간 조절하기도 필요하다. 그마저 어려울 땐 부부 중 1인(대체로 엄마)이 재택근무를 신청한다. TV드라마 속 아이엄마의 달려 다니는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AI혁명이 몰려온다지만 엄마 역할은 전업주부였던 30여 전의모습과 그다지 바뀐 게 없다. 맞벌이 사회라 유아원 입학이 두 돌 나이에도 가능해진 점은 다른 점이다. .


따라서 아이의 등교 준비와 준비물 챙기기, 알림장 소통하기 등과 아침과 오후 픽업 관리도 아이엄마의 추가 업무이다. 냉동식품이나 레트로식품 주 1), 배달음식 주문을 통해 식사준비 노동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작은 딸의 경우는 도움을 청할 시댁과 친정 모두 서울이니 운이 좋다고 했다.


체력이 약한 편인 작은 딸은 늘 기관지염과 위산 역류를 달고 산다. 체력이 고갈되어 일상이 과로상태로 이어지니 마음 같아서는 친정부모가 옆동으로 옮겨가고 싶을 정도이다. 나는 아직 환자인 큰아이의 건강 회복과 자립을 위한 도움 제공 중이라 시간 여유가 크게 있지는 않다. 마음뿐이다.


주 1) 과거에 유행했던 음식이나 전통적인 조리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음식을 의미함. 레트로(Retro)란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음식에서도 옛 감성을 되살리는 트렌드가 반영된 것임



부부가 해외출장 일정 조절이 안 돼서 귀하게 '동시부재' 상황이 발생했다. 친할머니도 지방 일정 중이시다. 긴급 콜을 받은 외할머니인 나는 돌봄 이모가 퇴근 후 시간을 메꿔야 했다. 큰딸과 함께 방문해서 외손주인 훈이의 밤을 지키기로 했다.


마침 대봉감이 조금씩 홍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훈이는 내가 골라서 가져간 빨간 홍시감을 작은 손을 펴서 만져보았다. 늦은 밤이지만 홍시감을 당장 먹고 싶었을게다.


나는 아이가 잠자리 준비로 이를 이미 닦았으니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을 제안했다. 아쉬움을 눈에 담았지만 아이는 외할머니 조언대로 참았다가 아침에 먹기로 마음을 다스렸다. 신통하다.


딸은 해외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아직 익지 않은 주황색 감은 도로 가져가고 홍시감 두 알만 남겨주세요."


평일에 부부는 회사 식당에서 주로 식사를 하니 집에서는 식재료 관리도 버거워한다. 집안일의 최소화가 맞벌이 부부의 체력소모를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가 부모가 바쁜 틈에 준비해 준 음식이 변해서 버려야 될 때 마음이 여간 어렵다고 했다.


'자식이 부모의 정성을 무시하여 생긴 일'

로 느껴져서 불편하다'


고 한다. 여러 번 반복된 딸의 부탁에 어렵게 공감 비슷하게 느껴진 엄마는 음식 가져가는 일을 멈추었다.


젊은 시절 나도 그랬었다. 늙은 부모가 되니 바쁘게 사는 자식의 먹거리가 중요하고 염려된다. 엿기름으로 만든 '식혜' 등 손 많이 가는 음식을 하면 나누어 먹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든다.


규칙적으로 소득이 발생하는 자식들은 엄마가 타고 가는 택시비보다 싼 비용으로 배달받아먹을 수 있어 중요하지 않지만, 사랑값 조절이 서툰 부모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고 싶다. 나도 60이 넘어서야 양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나 보다. 죄송하게도 이미 너무 늦게.




5살의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엌의 홍시를 찾아본다. 작은 딸의 주문대로 전날 밤 주황색의 대봉감을 아이 방 입구 한 편의 낮은 장식장 위에 올려두었다. 집에 갈 때에 가져갈 요량으로.


"할머니, 자고 나니 홍시가 딱딱해졌어요. 어떡해요?"

"엥? 홍시가?"


아이의 아침 식사를 간단히 준비하다가 돌아보니 잠에서 막 깬 아이가 방을 나오자마자 주황색 대봉감부터 찾아들고 당황한 표정이다.


"할머니, 이것 보세요. 홍시가 변했어요."


"아! 훈이 것은 여기 있지. 할머니가 변하지 않게 지켰지."


"와~ "


기뻐서 조그만 두 손으로 박수를 치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색깔이 다른 두 감의 차이를 손의 촉감으로 느끼도록 했다. 아이가 자라는 시간에 가끔 옆을 지키면서 얻는 행복이다.


홍시가 딱딱해져서 어떡하냐고 울상을 지을 때의 모습과 조그만 손을 모아 손뼉 치는 모습이 며칠 동안 눈앞에 떠올라서 하루 생활 중에도 자주 웃음이 새어 나오게 행복했다.


그날 아침에는 조그만 떡 1/2쪽, 김쇠고기 꼬마주먹밥 2/3 아이 공기, 홍시 1/4이랑 준비해 주었다. 작은 입으로 새끼 제비처럼 받아먹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그 설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이엄마는 아이의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 혼자 먹도록 한다. 그날 아침 외할머니 주도로 아이까지 덩달이 아이부모의 육아 규칙을 위반했다.


외할머니가 꼬마김밥을 말아서 입에 넣어주면 아이가 신뢰감이 가득한 눈빛을 보이며 조그만 입을 벌려 받아먹는 모습이 주는 행복을 품어보려고.


홍시도 줄줄 흘러내리니 외할머니가 수저로 떠서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침에 옷에 홍시물을 흘리면 손길이 서툰 외할머니와 옷을 다시 갈아입느라 유아원에 늦을 수 있으므로.


아이 엄마가 보았으면 육아 규칙 위반에 틀림없이 마음이 상했을 터이다. 외할머니와 5살 손자는 아이 보호자 몰래 조용히 행복을 나누고, 손을 꼭 잡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SitStayRead 글 이동 양해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