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를 잊고
다음날 아침 일찍 프로그램 관련 지자체 회의에 참석 예정이었다. 울 스웨터의 목에 자꾸 걸리는 단발머리를 겨울 내내 짧은 쇼트커트로 만들었다.
매번 더 짧아져서 머리끝이 삐친다.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미용실 원장님과 의논 끝에 짧은 머리에 파마를 했다. 우와, 3시간을 미용실에 있었다.
그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머리손질 시간을 아끼고자 시도한 짧은 헤어스타일이 뜻밖에 잦은 머리손질을 필요로 했다.
*단발머리와 쇼트커트 모습
(출처: https://chatgpt.com/)
큰 아이가 병원 신세를 지기 전에는 이웃에 사는 후배와 함께 체인점 미용실이 개원했을 때부터 다녔다. 오래 다니는 동안 신참이었던 전담 헤어디자이너가 승진을 거듭해서 부원장이 되었다.
그녀의 성장과 승진 위치에 따라 점점 오르는 서비스 비용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응급환자가 된 딸과 내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딸의 잦은 응급실행으로 인해 부모는 기존에 하던 경제활동을 멈추었으므로.
미용실 이용 목적이 상실되니 머리를 질끈 묶고 다녔다. 1년도 넘게 미용실을 갈 필요가 없었다. 향긋한 허브티와 비스킷의 여유는 일상의 순번에서 밀려났다. 잦은 입원과 긴 치료 과정에서 성인인 큰딸의 줄어든 근육을 키우기 위해 함께 탁구장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이웃 주민을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머리 스타일이 예쁜 그 젊은 주민은 자신이 이용하는 우리 집 앞에 있는 개인 미용실을 소개해주었다.
딸이 샤워를 할 수 없게 된 시기엔 샴푸서비스가 필요했다. 집에서 욕실 바닥에 비치 타월을 깔고 큰딸을 눕혀서 수술 부위와 상처에 물이 묻지 않게 샴푸 하는 일이 자주 생겨서다. 개인 미용실이 아파트 상가 내에 있다 하니 딸을 설득하기도 쉬웠다.
뭔가를 바꾸는 일에 익숙지 않은 나이가 되니 개인 미용실이 처음엔 서먹했다. 미용실 체인점의 나긋나긋한 서비스 제공에 오래 적응된 내겐 나이가 있는 편인 원장의 무뚝뚝함도, 널찍한 공간에서 좁은 공간으로의 변화도 낯설었다. 그래도 의료보험 혜택이 없는 자가면역 입원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는 큰딸의 상황을 생각하면 불편함보다는 가격의 매력이 컸다.
부가 서비스 비용이 빠진 가격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들르니 그곳의 가족적인 분위기에 적응되었다. 들락거리던 마음의 작은 소용돌이도 안정되었다. 오래전 일이다.
지난주에 작은 딸이 내 회의 참가 일정에 맞춰 자신의 단골인 체인점 미용실에 내 머리 손질을 위한 예약을 해주었다. 이미 일정 액수를 결제해 두었으니 부담 없다며 추천했다. 예전엔 내가 미용실과 네일숍에 미리 일정액수를 결제해 두어 동생들과 딸들이 서비스를 받게 했던 방식이다.
머릿속으로 체인점 미용실의 동선을 상상해 보다가 결국 취소를 했다. 다시 넓은 공간의 체인점 미용실에 앉아 불필요한 서비스가 포함된 두 배 이상의 가격을 내고 받을 엄두가 나지 않은 까닭이다. 누가 지불하던지 간에.
작은 딸은 못내 아쉬워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적응에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 개인 미용실을 다닌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유명 미용실 체인점과 같은 커피와 비스킷 서비스는 없지만, 일단 가격이 반값이니 매력 있다. 유기견이던 콜리와 레트리버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며 유기견센터에서 미용봉사를 하는 개인 미용실 원장님과는 반려견을 화제로 얘기를 나누니 행복이 덤으로 얹힌다.
머리를 감은 후 유명 체인점과 같은 머리전체의 지압 서비스는 없지만, 미용실 원장님의 솜씨가 좋아서 고객의 피곤한 얼굴이 환해지도록 머리를 손질해 준다.
이번엔 조금 야무지게 말아서 볼륨이 쉬이 풀어지지 않게 했다고 원장님이 설명했다. 나는 피곤하면 시력까지 제대로 작동이 안 된다. 하여 머리 형태에 대한 언급은 '상큼하게 해 달라'라고 하면 된다. 원장님의 센스 어린 손길에 그저 고맙다.
문제는 오래 유지해 왔던 단발머리는 빗질만 하면 되는데 반해, 이번 겨울에 경쾌해 보이도록 계속 짧게 쳐올려진 쇼트커트 머리의 펌은 샤워 후 조금 손질이 필요하다.
*단발머리와 겨우내 갈수록 짧아진 쇼트커트 모습
(출처: https://chatgpt.com/)
원장님은 내 머리스타일이 '예쁜 스타'일이라고 한다. 샤워 후 거울을 보면 각자 길을 찾고 있는 머리칼이 내 눈엔 참 산만하다. 미용실에선 원장님 손이 몇 번 지나가면 요놈들이 단정하고 볼륨 있게 자리를 잡는다.
샤워 후 말린 짧은 머리는 새로 돋는 잔디처럼 삐죽거려서 외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헤어드라이 쪽엔 손재주가 참 없다. 겨울이니 다행히 모직모자가 늘 올려져서 밖에서는 괜찮다.
생머리건 파마머리건 일 년 내내 나는 머리 위에 모자를 얹어야 안심이 되어 외출을 편하게 한다. 여름에는 햇살을 가려주고 봄과 가울에는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두 눈을 괴롭히지 않도록 모자 속에 잘 가두어 둘 수 있다. 겨울엔 확실히 추운 온도를 적어도 2~3도나 올려준다고 하니 난 모자가 정말 좋다. 젊은 시절부터 안방 한편에는 모자상자가 포개어 올려져 있다.
문제는 실내에서 좀 중요한 회의를 할 때이다. 심지어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경우엔 단정하지 않은 머리스타일에 신경이 쓰인다. 원고준비를 하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이번 봄에 열심히 길러서 여름에는 단발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머리 관리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일은 정말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던 중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건강하게 이런저런 궁리를 할 수 있는 현재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사는 중임을.
*2000년 초반 시드니에서 썼던 감사 카드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운동화, 구두, 샌들 중에 옷과 분위기에 맞춰 선택할 수 있고, 길게 짧게 그리고 생머리와 파마머리를 선택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거울에 비친 삐쳐진 짧은 머리를 보며 60대에 정수리의 머리숱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칼슘조절장애로 고생하는 30대 후반의 큰딸은 오늘 아침에도 한 움큼 빠진 머리칼을 주워 담았다. 엄마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딸의 병원 일정이 예전보다는 꿈처럼 수월해졌다. 여러 부작용들은 지금 방법이 없으니 나중 일이다.
옆지기, 큰딸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맛보고 소통을 하는 하루 일상이 참으로 감사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길거리 보행자들의 일상을 부러워했던 병동 입원 시절을 까맣게 있고 오늘 맞이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감사를 잊고 지낸 교만함을 반성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슴에 잘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