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라퍼 녹다운(knock down)

모른 체 할 걸

by 윤혜경

오늘 일정은 나도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나 보다. 피곤이 머리 위까지 쌓여 눈뜰 힘도 충분치 않은 상태로 하필 퇴근 시간, 문자 그대로 러시아워(rush hour)에 지하철을 탔다. 차라리 더 늦게 이동할 걸 ㅜ.


노약자석에 운 좋게 한 자리를 얻었다. 모처럼 자리에 앉아 가는 중인데 겨우 서너 정거장 후 만삭의 임산부가 바로 내 앞에 섰다.


''아는 체할까? 모른 체할까?'

'

자리양보가 부담된 젊은이들이 눈을 감고 잠든 체한다는 말을 실천하고 싶다. 바지가 의자에 붙어버렸다. 마음속에 갈등이 일렁거린다. 평소엔 나이를 잊고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더 어르신, 초등학교 아동들, 환자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자리양보를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진심으로 눈을 감고 앉아있고 싶다. 그렇다 해도 잠든 척하기엔 서있는 여성의 앞으로 나온 둥근 배가 커서 맘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혹시 비만 아가씨인가?'

한 손으로 든 핸드폰을 보느라 정신없는 그 여성이 앞으로 내민 배를 몇 번이나 곁눈으로 확인했다. 여성의 동그랗게 부른 배에 걸린 원피스 앞자락이 위로 들려 올라가 있다. 임산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더블 체크하느라 신발도 확인했다. 임산부가 되면 착용하는 아주 낮은 발레용 토슈즈 형상의 구두이다. 배 모습이 확실히 다르다. 난 두 딸을 출산한 엄마이니 어찌 분간을 못하겠는가?


'맞네, 맞아! '

하는 수없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여기 앉으세요~"


말을 빼자마자 상대 여성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저 임산부 아닌데요?" 했다.

"....."

나는 순간 멍했다.


"아니..."

라고 더듬은듯 하다.


"그러니까 살 좀 빼랬지!"

얼씨구. 곁에 선 일행인지 웬 남자까지 거들었다.


당황해서 나도 뭐라고 했는데 어떤 문장을 내놓았는지 기억에 없다.


"아니, 피곤해 보여서요."

라고 한 것도 같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아니 그녀 때문에 너무 당황해 피곤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있지이, 난 오늘~"

샤워 후 나와서 서재 남편에게로 갔다. 그리고 사연을 전하니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 퍼진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여러 번 비슷한 경험이 있었나 봐. 그토록 빠르게 대답한 걸 보면."


"양보도 정도껏 해야지. 당신은 심해. 자기도 피곤에 절어있구먼 뭘 맨날 양보한다고. 이제 당신도 65세가 넘은 노인이야. 제발 나이 좀 기억해!"


옆지기의 이어지는 연설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오지라퍼 녹다운(knock down)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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