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어른들은 이불실도 아껴서
6월 7일 토요일에 지자체의 <리딩독 Reading to a Dog> 테스트 프로그램 일정 1건이 마무리되었다. 6. 7. 8월이 여름이니 6월 첫 주는 이미 여름 초입에 들어선 시기이다.
이번 주는 다음 일정을 위한 PPT 12회기를 완성해서 참가자들을 위한 소책자 준비를 위해 서둘러 담당부서에 보내주어야 한다. 은사님과 함께 하는 모녀의 대학교재 출간 준비도 이달 말까지 초고가 마무리되어야 여러 차례의 교정을 거쳐 새 학기에 사용가능하다.
기초자료는 이미 준비해 두었지만 차례 정리와 새로운 해외 자료 확인이 필요하다. 할 일을 떠올리니 마음은 즐거운데 일정이 다소 빠듯하다. 자업자득이다.
이제 걸음마 수준인 분야의 대학생과 대학원 학생들을 위한 교재 출간은 출판 작업에 쏟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참으로 비경제적이다. 출판작업으로 경제인이 되는 경우라면 참 좋겠지만, 우리의 경우는 수요가 적은 시장에서 적자를 감수하고 출판을 기꺼이 지원해 주는 대학교재 전문출판사에 그저 감사하다.
머릿속은 원고 등 컴퓨터 작업 일정이 가득한데 집안일에 대한 생각이 밀고 들어온다. 계절이 초여름에서 본격 여름으로 가는 중이니 그동안 덮었던 누비이불을 홑겹 누비이불로 바꿔야 할 시기이다. 이불커버와 침대패드, 베갯잇 등 일상적인 세탁과 달리 바깥 온도 에 따라 이불 을 바꾸는 일은 즐거운 계절 행사이다.
그동안 '순장조'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한 옆지기가 기거하는 서재의 침대 이부자리도 바꿔야겠다. 몹시 깔끔하지만 소소한 변화에는 워낙 무던한 군인아저씨 같은 옆지기는 아내의 동동거리는 일정에 겨울 이불을 여름에도 덮을 기세이다.
"이불이 혹시 덥지 않아요?"
물으면 겨울 이불을 사용하고 있던 그이는 늦봄에도 늘
"괜찮은데~"
'라고 대답했다. 봄에 겨울 이불을 조금 가벼운 누비 솜이불로 바꿔주었었다. 초여름이 되었으니 여름용 얇은 누비이불로 바꿔야겠다. 큰딸이 아픈 후부터 그이는 화장실이 있는 안방을 아내와 큰딸에게 양보하고, 서재로 옮겨갔었다. 딸이 자신의 방에서 현관 쪽 화장실로 가다 거실 코너의 화분과 함께 쓰러져 다친 이후 내린 결정이었다.
*옆지기의 서재 침대 여름맞이
10년이 넘었다. 큰 아이가 점점 회복되니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큰맘 먹고 생각 끝에 '다시 방을 재배치하자'는 내 제안을 뜻밖에 그이가 거절했다. 나만 거절할 수 있는 항목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으며 아내 눈치 보지 않고 늦은 밤 군것질도 하고, TV 채널도 독점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했다.
독립하면 여성만 편리한 줄 알았던 아내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남편의 반응이다.
서른 후반의 큰딸은 아기처럼 조용히 잔다. 불면증을 겪는 내가 움직임이 많아 큰딸의 수면을 방해하니 내심 딸에게 미안하다.
가끔 코 고는 소리를 내곤 했던 그 남자 옆에서 이제부터 잠들 생각에 마음 한 편에 고민이 적지 않았었다. 십여 년 전에도 늦은 시간까지 그이의 소음에 잠을 못 자다가 새벽녘 베개를 들고 큰 아이 방으로 옮겨갔던 일이 몇 차례 있었던 까닭이다. 그이의 '안방 복귀 거절'이 내심 반가우면서도 섭섭하다.
무지개 색깔별로 혼수 이불을 해주신 친정어머니 덕분에 옷장 속 이불들은 계절별 색상을 달리해서 사용된다. 안방의 누비이불은 1983년에 맞춤이불로 제작했으니 나이가 42살쯤 되나 보다.
'요즘 홑청을 뜯는 이불을 누가 사용하냐?'고들 하지만 혼수이불들은 직장인이시던 친정어머니의 큰딸에 대한 정성 그 자체였다. 깔끔하게 손질해서 침대 위에 펼치면 킹 침대 이불 사이즈로 스프레드 겸 이불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워낙 잘 만들어서 실밥하나 뜯어진 게 안 보인다.
일요일 집 전체 청소기 돌리는 일을 마무리한 큰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함께 실을 뜯어 이불 홑청을 분리하면서 큰딸에게 이불 홑청 관련 옛 기억을 설명하였다.
"1980년대 까지도 내 할머니는 헌 이불 실을 길게 끊어서 빼셨어. 가난하지 않았어도 재활용 목적으로. 홑청을 말린 후 다시 이불에 홑청을 입힐 때 그 실부터 쓰셔. 절약이 몸에 베였던 그 시대엔 사람이 만든 쓰레기가 참 적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큰딸은 부엌에서 그릇을 들고 왔다. 큰딸과 나는 이불 홑청을 빼낸 후 실을 길게 빼어서 그릇에 담았다. 오래 아팠지만 이제 조금씩 일어서는 큰딸과의 교감이 참 좋다. 요즘은 '딸 덕분에'를 노래하는 중이다.
*'이불 홑청 분리하기'에서 얻은 헌 실
'이번엔 헌 실을 사용해서 이불 홑청을 꿰맬까?'
한번 더 사용하는 실의 양은 사실 환경보호와는 거리가 멀게 아주 적다. 그러나 엄마의 옛 추억을 듣자마자 헌 실을 길게 뜯어 모은 딸의 정성을 보니 실천해야 할 것 같다.
내 초여름 준비는 옷장 속 여름옷의 위치를 손이 쉽게 닿는 중간 칸으로 옮겨오는 일에서 시작된다. 다음엔 각 방마다 가벼운 새 이불과 새 베갯잇으로 바꿔준다. 가족들은 후줄해진 이불과 베갯잇을 잘 세탁된 향긋한 제품으로 바꿔주면 행복해한다.
가족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물론 집안일에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늘 갈등이 일지만, 두어 시간 침대 정리와 이불배치로 온 가족이 상쾌해지니 가성비는 최고다.
밀가루로 묽은 풀을 쑤어 식힌 후 물을 섞어 이불 홑청과 모시이불, 베갯잇을 넣어 조물거린 후 탈수 후 널어준다. 반쯤 말린 후 보자기에 싸서 발로 밟아 펴주면 주름들이 반듯하게 펴지는데 이때 체중이 좀 더 나가는 가족이 밟아주면 훨씬 좋다.
우리 집에선 남편이 몇 번만 밟으면 이불 홑청의 순면 촉감이 부드러워진다. 방망이와 다듬이가 없는 대신 발로 밟아도 쓸만하다. 그리고 조금 덜 마른 상태에서 다림질을 해주면 아주 고슬 거리는 촉감이 생긴다. 덕분에 여름 잠자리가 행복하다.
친정어머니는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늘 이부자리 관리를 잘해주셨다. 정작 당시에는 대학을 다닌다고 밖으로 도느라 나는 조금의 도움 손길도 못 드렸었다.
초등학교 시절 풀 먹이고 반쯤 말려진 이불 홑청을 감싼 보자기 위를 조그마한 발로 할머니 옆에 서서 함께 밟아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듬이질에 짧게 동참했던 기억도. 아파트에선 어림없다. 의자 끄는 소리도 나지 않게 생활 소음을 조심하는 판국이니.
이제 나이가 드니 옛 기억을 되살려 계절 바뀜에 따른 이불손질을 재현해 본다. 가족 반응이 좋으니 보람이 크다. 2000년대 초반 귀국 후 수면시간이 부족할 만큼 바쁠 때 집안일을 도와주던 내 또래 분께 '삼베 이불에 풀 먹이기'를 하고 싶다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요즘 세상에 누가 풀을 먹여요?"
했다.
'요즘 세상에... '라는 그녀의 답변에 공감했다. 4시간 청소와 빨래 전담인데 손이 빠른 그녀는 보통 3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마치고 퇴근했다. 풀 먹이는 일은 그 시간 안에 끝맺을 수 없어 그녀는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맡아서 했다. 나는 시간제 노동을 제공하는 그녀와 달리 종일 집에 있는 날을 선택해서 할 수 있으니 어렵지 않았다. 초여름 쉬는 날에 짬짬이 하던 업무를 멈추고 휴식 시간마다 이어서 할 수 있는 일인 까닭이다.
이제 2025년 초여름 준비는 신발장의 여름 신발을 중간 칸으로 옮겨두는 일까지 다 끝났다. 우리 집의 계절 준비는 그 계절에 맞는 옷차림, 침대이불 교체, 신발장 여름 신발 위치 찾아주기로 시작된다.
올여름엔 콩물국수를 몇 번쯤 만들게 될까? 컴퓨터 작업이 조금 밀려있긴 하지만 가족을 위한 의식주 준비가 먼저이다. 체력감소는 아쉽지만, 시간여유를 만들 수 있는 '나이 듦' 이 참 좋다. 좀 많이 나이가 들어보니, 내 할 일은 내가 조절할 여유가 있어서 감사하다. 집중력 감소는 실감 중이다. 감당해야 한다. 이불 빨래를 널고서 여름 이불로 바뀐 침대 위를 돌아보았다. 상쾌하기 그지없다.
사계절이 분명한 덕분에 이렇게 분위기를 계절마다 바꿀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다. 아직은 이 정도의 작은 사치를 감당할 체력이 되니 더욱 감사하다. 이불 교체 후 통창으로 올려다 본 6월 초의 서울 하늘이 차암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