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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남의 편

덕수궁 뜨락 산책 덕분에

by 윤혜경

지방에 자리 잡은 친구들이 서울 친구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KTX를 탔다. KTX로 도착하는 친구를 맞이하러 용산역으로 마중 갔다.


학창 시절부터 우아했던 친구는 수년 전 뇌 수술을 했다. 이후 시신경에 피해가 가서 거리 조정에 어려움이 생겼다. 여러 과정을 통해 거리에 대한 느낌으로 짐작하여 움직인다고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큰 기둥 피하기나 계단 내려가기는 여간 조심스러워져서 여전히 동행이 필요하다.


그녀의 사랑 가득한 딸 부부는 그녀의 서울행 땐 용산역으로 마중 나간다. 오늘은 직장인인 그녀 딸대신 친구인 내가 나가기로.


대학병원에서 예약된 치료를 받고 가는 길에 남편의 도움을 받아 차로 지하철역까지 갔다. 덕분에 늦지 않게 용산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같이 종로의 식당으로 향하는 우리 둘의 꼭 잡은 손과 발걸음이 포근했다.


덕수궁 가는 길

성치 않은 몸으로 먼 길을 달려온 귀한 그녀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함께 가을 덕수궁을 걸었다. 다른 친구는 그녀의 반쪽이 운전을 해서 서울까지 왔다. 그래도 둘 다 조심조심 회복 중이니 감사하다.


사람의 일은 참 알 수 없다. 가장 먼저 그만둘 것 같던 야리야리한 친구는 부부가 한 길을 걸어 정년퇴직을 했다. 장학사까지 하고 교장으로 퇴직할 것으로 점쳤던 모범생 친구는 심성이 여린 자녀 둘을 잘 키운 대신, 일찍 직장을 포기했다. 나는 남의 편의 국내외 이동 발령 덕분에 시작한 일마다 경력단절로 귀결되곤 했다.


*그리움이 뒷모습에 얹혀


요 며칠 갑자기 끼어든 초겨울의 추위가 오늘은 물러나서 우리는 가을의 선선함을 만끽할 수 있다. 여기저기 물든 나뭇잎이 고운 가을날, 설명하지 않아도 따스한 눈빛인 친구들과의 눈 맞춤이 좋았다. 모처럼 편안하게 걸으며 내 두 눈은 푸른 하늘과 햇살을 받는 나무들, 연못 그리고 바람을 종일 볼 수 있었다.


오늘도 어쩌다 보니 새벽 5시에 컴퓨터를 껐다. 하루를 쉴 예정이므로. 브런치를 쓸 겨를이 없어 미루고 또 미룬다. 이젠 동시다발적으로 머리를 굴리기가 어렵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해도 과부하가 걸리면 일어서서 시선을 하늘에 두고 체증을 풀어준다.




아주 오래전 이 귀한 친구들과 오늘처럼 덕수궁의 앞 뒤 뜨락을 거닐었었다. 그때 갑자기 내 까만 구두의 뒷 굽이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4.5센티 높이나 되는데. 시드니의 대학원 시절 남편이 먼저 귀임발령을 받고 떠나면서 선물했던 신발이다.

'어찌한다?'


머리를 맨 까만 끈을 빼어 구두 몸통과 굽을 붙여 짚신 묶듯 묶었다. 몇 걸음 걸으니 다시 구두 굽이 철퍼덕거린다. 전날 비가 와서 길도 질척이는데 참 난감하다.


'근방에 신발 파는 곳이 있을까?'


궁지에 몰린 나는 승용차로 40분 거리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말했다. 마침 그이는 외로운 해외생활을 접으려 사표를 쓰고 귀국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집에 편히 머물기 시작한 시기이다. 사연을 들은 그 남자는 당장 집 신발장에서 내 여벌 단화를 들고 운전해서 덕수궁 부근까지 와주었다.


그이를 기다리는 동안에 친구들과 덕수궁 뜨락의 찻집에서 진하게 우려진 따끈한 대추차를 마실 수 있었다.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우리는 연못에 시선을 얹고 지나간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오늘 덕수궁 찻집은 아쉽게도 수리 중이다.

추억 속의 대추차 향을 불러오는 순간 문득


'그 남자는 기꺼이 늘 아내 편이 되고, 그 남자의 아내는 남의 편 노릇을 해왔음'


을 기억해 내었다.


마음속으로 많이 미안하고, 새삼 고맙다. 지방에서 KTX로 달려온 친구들 덕분에 덕수궁 뜨락을 걸으며 되살아난 기억 덕분이다.

*운동화로 통일한 모녀


오늘 우리는 모두 운동화 차림이다. 아마도 친구들 중 내가 가장 늦게 운동화 대열에 끼어들었을 테다. 이렇게 편한 운동화가 이제 키높이 기능에 가벼움까지 장착했으니 매력 가득이다. 요즘은 볼 좁은 구두대신 운동화 속에 사는 두 발이 본래 모습대로 예뻐지는 중이다.

*깨어진 유물들의 작품화


점점 동시다발적 일은 힘들어서 한 번에 한 가지만 해야 하는 삶의 내리막길이지만, 덕분에 반쪽의 고마움을 인지하고 더불어 두 발도 고와지는 중이니, 내리막길도 고마운 시간이다.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운 게 사람의 마음이니 얼마나 가랴마는, 적어도 오늘은 그 남자에게 참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이 시간이 감사하다.


젊은 시절의 '버럭 범수'에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중인 그 남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지하철 역 앞에서 기다릴게."


아내의 귀갓길에 픽업서비스 제안이다. 사랑을 담은 "가을의 기도"를 시작해야겠다.

덕수궁 뜨락에서(아래가 회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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