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지 않아서 고마워

오래된 사진첩 덕분에

by 윤혜경

자료 찾기 보조가 된 그 남자


그 남자는 그 여자의 벼슬놀이에 보조가 되었다. 이사 직후 벽장에 임시로 쌓아둔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아내가 요청한 야생동물 자료를 찾고 있다.


아내인 나는 3월 초 개강에 맞춰 출간 예정인 책의 조판본 최종 교정이 늦어져 초조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구글링으로 올려둔 사진 중 아직 사용 승인을 받지 못한 것들은 승인된 자료로 교체해야 했다.


교정 시간이 짧아 수정 요청 사진들이 편집부에서 그대로 돌아온 페이지를 발견하고 걱정이 하나 더 얹혔다. 이번 교재는 지난 책 출간 때의 편집자가 아니어서 더 불안했다.

누적된 과로로 예고 없이 아팠고, 긴 수면이 필요한 휴식이 추가되었다. 거기에 이사가 겹쳐서 1월 말에 끝났어야 할 작업이 6주나 멈춰있었다. 결국 가장 바쁜 시기에 일이 얹혔다.


출판사 역시 여러 권의 마감이 겹쳐 도로 사정처럼 트래픽 잼 상태일 것이다. 저자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저자 스스로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르다.



내가 직접 사진을 찍어도 안된다고?


해외 자료들 사용 승인 절차에 시간이 걸려 난감하던 차에, 해외 거주 시절 방문한 야생동물 서식지가 떠올랐다. 어디에 있을까? 문제는 시간이다.


요즘은 갈수록 엄격해지는 저작권·상표권 관리로 공공기관의 사진도 승인을 받아야 쓸 수 있다. 이 상식은 이번 출간 작업에서 알게 되었다.


출처 표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원고에 올렸는데, 검수 과정에서 수정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받았다. 심지어 내가 구입한 책의 표지를 직접 촬영해도 출판용 교재에 싣기 위해서는 해당 출판사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니, 대형서점 홈페이지에서 복사한 것도 아니고, 내가 구입한 책 표지를 내가 찍어 올려도 무단사용이라고?"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건 당연히 그 책 출판사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

그제야 책 표지도 누군가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자료 사용 승인 요청을 여러 기관에 보냈다. 마감은 눈앞이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관 자료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부분은 빠르게 처리해 주었다.


해외 기관은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우리 가족의 여행지 사진이었다.


야생동물 보존 정책이 모범적으로 시행되는 국가 중 하나인 호주에서 두 차례, 10여 년을 살았다. 큰 아이 기준으로 유아원부터 초3까지, 중1부터 고2까지. 당시 중2와 초6의 두 딸은 여러 차례의 국내외 전학으로 긴장해 있었다.


두 딸의 안전한 정착을 위해 우리는 두 아이의 전학 후 첫 휴가 때 호주 북부 열대지역으로 떠났다. 야생동물 안내원의 도움으로 열대 기후의 Rain Forest를 4륜 구동차를 타고 방문했다. 동물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생태계 설명을 들었던 장면이 생생하다.


타잔 영화에서 본 태초의 숲처럼 잘 보존된 곳이었다. 더불어 지역주민의 경제활동을 위해 제한적인 관광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골드코스트의 해양 포유류 공원과 수족관이 있는 Sea World, 커럼빈의 Wildlife Sanctuary Garden의 앵무새 먹이 주기, 케언즈 Great Barrier Reef 방문, 남극에서 헤엄쳐 온 Fairy Penguin의 산란을 위한 한 밤중의 필립 아일랜드 상륙작전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남극 꼬마 펭귄이 산란을 위해 호주 멜버른 부근의 섬에 상륙하여 둥지 굴로 가는 모습(개인 촬영 금지. 안내인이 가족당 1장씩만 찍어줌)


도망가지 않아서 고마워!


다음날 새벽, 아직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게 남편이 몇 장의 사진을 건넸다. 기대하던 동물 사진 대신 결혼 전 교사시절의 내 사진이었다. 원고에 몰두하느라 정서가 바짝 마른 내게 그가 말했다.


"당신 참 고마워. 일벌레였던 내 곁에서 도망가지 않고 두 딸을 이렇게 잘 키워줘서~"

"사진은?"

"아, 여기."

"난 지금 정서가 고갈되어서... 쏘리."


새벽녘까지 사진을 찾느라 애쓴 남편에게 메마른 응답을 하며 벼슬 중이다.

아침 6시 전까지 꼼꼼히 마지막 교정을 마친 뒤 출판사로 파일을 보냈다. 그리고 등을 폈다.

"미안, 내가 좀 정신이 없어. 자고 나서 얘기하게요~**


근래에 처음으로 깊이 잤다. 아침 9시, 짧은 수면 뒤 창밖의 햇살이 따뜻해 보였다.

바깥이 아직 영하의 날씨일 텐데도... 마음이 편안해진 덕분이다.


"늘 남에게만 긴장하는 여자 때문에 당신이 고생이 많네. 왕 미안~**"

아내가 눈뜨기를 기다리며, 식탁 위에 아침식사를 차리는 남편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그대로 놓고 보기


젊은 시절엔 '버럭 범수' 남편 덕분에 당시 반휴일인 토요일과 온휴일인 일요일이 편치 않았다. 주말에 333번 버스를 타고 아이를 등에 업고, 기저귀 가방을 메고 시댁에 가는 날은 시간이 빠르게 가서 편안했다.


60이 넘어 돌아보니, 당시엔 그이도 회사에서 버거운 업무에 시달렸겠다. 으례 새벽 별이 비치는 시간에 통근차를 타고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곤 했으니 일요일 집안일에 따스한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겠다. 그때 나는 나 말고 '그 남자가 바뀌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상대를 그대로 놓고 보려는 노력'

이 가능해진 것이다.


남편을 내 생각대로 바꾸려고 했던 젊은 시절의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여전히 처음 겪는 사건인양 입으로는 낮게 구시렁댄다). 나 자신을 바꾸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덕분이다.


우리는 여전히 취향도 생각도 많이 다르다.

그 남자는 싱싱한 김치를, 그 여자는 익은 김치를 좋아한다.

그 남자는 건강검진 후에도 죽을 먹지 않는다.

그 여자는 일 년 내내 죽과 물누룽지를 좋아한다.

그 남자는 만두를 좋아하지만, 그 여자는 만두를 고르지 않는다.


이젠 그 남자도 동지에 팥죽을 함께 먹고, 그 여자는 싱싱한 김치와 만두를 먹는다.

40여 년을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상대를 존중하기'가 평화를 위한 특효약임을.


큰 아이의 건강에 오랜 비상사태를 겪으며,

'가족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음'

을 배웠다. 덕분에 그보다 작은 일은 내려놓게 된다. 지금은 큰아이의 자존감을 위한 응원이 더 중요한 까닭이다.


젊은 시절 같으면 어림없을 버럭범수 남편의 묵묵한 도움 덕분에 나는 가끔 방자해진다. 버럭 하는 남자에게 "예쁘게 말하기"

를 주문한다. 다만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며, 젊은 시절 '을'의 억울함을 살살 풀어본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420여 페이지에 이르는 긴 여정이 마무리되고, 컬러 편집으로 가독성을 높인 교재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큰딸의 힘겨운 시간을 함께 걸으며, 전문교재를 두 번째 출간하게 되었다.

옆에서 아내의 벼슬놀이를 묵묵히 응원해 준 옆지기와, 꼼꼼하게 교정을 맡아준 큰딸 덕분에

70 깃발을 저만치 앞둔 내 인생이 파릇파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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