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의 패권국가였던 명나라는 왜 몰락했는가?

세계 1위의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 패권제국 명나라는 왜 몰락했는가?

by 전쟁의 세계사


검.jpg 세계 해양을 지배했던 원조 '천조국' 명나라 정화의 대함대


고대 중국은 고대시대 때부터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제국이었다. 그 고대 중국의 군사력이 전 세계 바다까지 지배 했던 시기가 고대 중국 대당제국(당나라), 송나라, 중세 대원제국(원나라), 근세 명나라 시기로, 고대 중국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군사력은 당시 동서양을 통틀어 전 세계 최강이었으며, 명나라의 몰락 이후 중국은 대청제국(청나라)의 제 6대 황제 건륭제 시대 때까지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제국으로 군림했다가, 그 이후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순식간에 추월한 대영제국(영국)에 세계 최강의 칭호를 넘겨줘야 됐다.


특히 명나라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하다는 스페인 왕국과 비교했을 때도 군사력 동원 능력, 병력 규모, 그리고 군대 지휘 체계 측면 등등에서 모두 우위를 점할 정도로 군사력에 있어 명나라는 스페인보다도 훨씬 강했다. 게다가 1521년 4 ~ 5월 남해 바다에서 발발한 툰멘 해전(타마오 해전)에서 왕홍 장군이 이끄는 명나라 해군함대들이 시마오 데 안드라데가 이끄는 포르투갈 해군함대(카라벨 선단)들을 공격해 격침하기도 했고, 이듬해 재차 벌어진 제2차 타마오 해전에서 마르팀 알폰소 데 멜로가 이끄는 6척의 카라벨로 구성된 포르투갈 해군함대들을 모두 격침하는 등 실제 전쟁에서도 명나라의 해군력이 포르투갈 해군력보다 훨씬 우위에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런 명나라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끝내 몰락하고 만다. 물론 명나라처럼 스페인 왕국도 순식간에 몰락했던 것을 보면 결국 지구상에 영원한 제국이란 없다는 씁쓸한 명언을 다시금 되새이게 해 준다.


그렇다면 한때 세계 최강의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으로 세계 바다를 호령했던 명나라는 왜 몰락했는가? 그 주된 요인들을 살펴본다.



1. 군사적 요인



[1] 세계 1위의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을 보유한 명나라



세계패권영락제.jpg 15세기, 세계 최강 명나라의 군사력을 과시했던 '성조 영락제(成祖 永樂帝)'



고대 중국이나 당시 오스만제국(오스만 튀르크)도 그렇지만, 명나라의 군사, 정치체계는 마치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해 독재했던 군부독재처럼 황제 1인이 혼자서 제국 전역을 통솔하는 군사적, 정치적 구조였다. 물론 중국의 영토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황제체제라 하더라도 중세 봉건제의 지방 영주들 같은 '번왕(藩王)'들이 제국 각지에서 자치적인 사병 군대를 가지고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했었다. 이는 중앙 정부의 행정력이 제국 끝까지 미치지는 않았기에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제국 각지에 이런 독자적 군대를 가진 번왕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번왕들은 중앙 정부에 소속되지 않는 자신만의 사병 군대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번왕들은 중국에서 언제든 군사반란이나 내전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있었다. 명나라의 최전성기를 구가시켰던 영락제(永帝樂) 역시도 자신의 사병 군대들을 동원해서 '정난의 변(靖難之役)'이라는 대규모 군사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는 데 성공한 인물로서, 무려 북경(北京)에 주둔했던 '번왕 출신''연왕(燕王)'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영락제는 황제로 즉위한 이후 명나라의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영락제의 사병 군대 세력들이 강하게 군림하고 있던 '북경(北京)'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겨버린다.


검.jpg 15세기, 세계 해양의 패권을 가졌던 명나라 군함대의 중앙아시아계 출신 총사령관 '정화'


그 후, 영락제는 명나라의 군사력이 세계 최강임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세계사적인 엄청난 위업을 남기는데, 세계사적으로 그 유명한 '정화 대함대의 세계 해양 대원정'이다.


세계 패권제국 대몽골제국의 세계 정복으로 인해 수많은 중앙아시아계, 중동 아랍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무슬림들이 전쟁 포로로 중국에 끌려왔는데, '정화'는 그렇게 전 세계에서 전쟁 포로로 끌려온 수많은 무슬림 가문들 중 하나의 후손이다.


조공 체제로 주변국들을 지배했던 고대 중국과는 완전히 달리, 대원제국(원나라)은 오로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이끌고 세계 정복하면서 군사적으로 세계를 식민 지배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물론 영락제가 정화의 대함대들에게 세계 해양 대원정을 명령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추측으로는 역시 정치적 안정과 내부 단속을 위한 '세계 해양 지배와 조공 체제 확립'였다.


중국은 고대시대 때부터 패권주의였던 중화사상(중화주의)을 가지고 주변국들을 대하던 제국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외교에 있어서 평등한 외교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힘과 권력으로 외교를 하던 것이 고대 중국이었다. 막강한 군사력(무력)으로 정복하고 제압해서 중국의 영향권에 편입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 스스로 자발적으로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 중국의 외교에 있어서는 이것이 전부였다. 이는 고대 로마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기에 고대 중국과 로마가 바라보는 세계관은 나(중국 혹은 로마)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들은 전부 야만인들뿐이었다.


그리고 이성계의 케이스를 제외하면 군사 반란에 성공해도 대부분 직접 왕위에 앉기보단 섭정의 방식으로 정치에 간섭했던(연개소문 등) 한반도 국가들과는 달리, 고대시대 때부터 군사 반란들과 내전들이 엄청나게 극심했던 중국은 군사 반란에 성공한 장군은 아예 대놓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여 군림했다.(당태조 이세민, 송태조 조광윤 등등등) 문제는 전 세계 동서고금하고 어떤 국가든지 간에 군사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된 경우는 항상 정당성이 확보되지 못해서 강한 반발에 부딪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처럼 주변국들을 야만인 취급하면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도 봉기에는 성공하지만 기원전 44년 기존의 독재관과 달리 임기가 무제한인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자 이 직책을 통해 그가 왕이 되려 한다는 반대에 부딪치면서 같은 해 3월 15일에 공화정을 지키고자 하는 공모자들이자 한때 카이사르와 같이 싸웠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당하게 되는 것처럼 동서고금 하고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자는 항상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고대 중국에서 군사 반란으로 집권한 황제들은 항상 주변국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해서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황제의 정당성을 백성들로부터 입증받거나 혹은 대규모 정적 학살들을 단행해서 반대파 세력들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황제의 정당성을 확보했는데, 연왕 주체(朱棣)는 전자의 방식을 채택하여 '성조(成祖) 영락제(永帝樂)'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영락제는 세계 바다를 정복하고 지배함으로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조공들을 가져왔는데 이렇게 명나라가 세계 최강국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면서, 자연스럽게 황제인 영락제의 권위 또한 강화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황제의 정당성은 확보됐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건문제 수색설'이다.


1402년, 연왕 주체는 북경에 주둔한 자신의 사병 군대들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난징(南京)을 군사 점령하면서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성공였으나, 제2대 황제인 건문제는 이미 실종된 후였다.


당시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연왕 주체가 군인들을 이끌고 황궁에 진입하였을 때는 이미 건문제는 없었으며, 건문제가 검으로 스스로 자결했거나 격렬한 전투로 화재가 나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지만 명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또 일부 기록에서는 건문제가 살아남아 퇴각하여 도주했다는 설이 제기되는 등으로 보아, 당시에 건문제가 빼앗긴 황위를 다시 탈환할 목적으로 휘하 군대들과 함께 잠시 퇴각해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어찌 됐든 이는 영락제의 정치적 불안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세계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영락제가 정화의 대함대에게 세계 해양 대원정을 명령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건문제를 수색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에 건문제가 만약 생존해 있었다면 명나라 내에서는 영락제 군대의 감시망을 피할 길이 없었기에 아예 해외로 눈을 돌려서 동남아시아나 다른 해외 국가들로 퇴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정화의 대함대가 세계 해외 탐험을 감행한 목적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정화의 대함대의 항해 경로에는 중동 아랍,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등등이 포함되어 있어 건문제를 찾는 시도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원인이 어찌 됐든 영락제는 황위에 오른 후, 정화(鄭和)를 해군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대규모 항해를 명령하면서 명나라의 대함대들이 세계 바다를 지배하며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과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검.jpg 한때 세계 해양을 지배했던 명나라의 정화 대함대 모형


이 정화의 대함대는 세계 해양사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탐험대였다.


그런데 이렇듯 한때 세계 바다를 지배하며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과시했던 명나라는 왜 영락제 사후, 세계 바다 패권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명나라는 영락제 사후에도 여전히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던 제국이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다시 한번 세계 바다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는데 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왜냐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잠시 동안 세계 바다를 지배했던 이유는 '명나라의 군사력이 세계 최강이다'라는 것을 단순히 전 세계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데 바로 대원제국(원나라)가 가지고 있던 세계 바다 패권을 명나라가 이어받으면서 해상 실크로드를 독점할 목적도 있었거니와, 그렇게 함으로써 중동 아랍 상인들과의 지속적인 해양 무역을 독점하기 위함도 강했다.


당시 명나라 상인들과 중동 아랍 상인들 간의 해상 무역로는 인도양과 태평양이었는데 명나라는 이 중동 아랍 상인들과의 해상 무역에서 엄청난 국가적 부와 이익들을 축적했기에 명나라는 반드시 이 해상 실크로드를 독점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영락제 사후, 얼마가지 않아 명나라는 제국 내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대운하'를 건설하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다. 이는 명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대운하 건설에 성공하면서 명나라는 더 이상 중동 아랍 상인들로부터 국가적 이익을 얻을 필요성도 없었고 내수 시장만으로 제국을 경영하는 게 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굳이 막대한 군사비를 소모하면서까지 해상 실크로드를 독점할 필요성이 더 이상 없어진 것이다.



검.jpg 호랑이(명나라)가 없는 굴(바다)에 여우(유럽)가 왕노릇하는 격


즉, 영락제 사후부터 명나라는 대운하시대로 진입하면서 세계 바다 패권은 공백기를 맞이하고, 몇 세기 후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호랑이가 떠난 굴에 늑대나 여우가 왕노릇하듯 더 이상 주인이 없는 텅 빈 인도양이나 남반구의 남태평양 바다에 우후죽순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영국 등이 상업적 목적과 교역의 목적을 가지고 각각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물론 한때 명나라와 맞먹거나 혹은 그 이상의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몽골계 티무르 제국이 존재했으나, 자신의 지계 선조인 칭기스칸의 전술들을 활용한 '아미르 티무르' 대제는 오스만 제국을 침략해 반식민지화시키는 엄청난 세계사적인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지만, 몽골계 세계제국답게 군사력에 있어서는 당연히 세계 최강이었으나 인구수가 워낙에 적다는 단점이 있다 보니 명나라의 영락제에게 추월당하고 만다.


그리고 몽골계 티무르제국에게 정복당하고 멸망직전까지 갔던 오스만 제국도 동로마 제국을 침략해 멸망시키는 등 세계사적인 위업을 달성하지만 문제는 오스만 튀르크는 해상 제국이 아니라 육상 제국이었다는 점이다. 오스만 제국은 한때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데다가, 한때 세계 최강대국 대몽골제국의 칭기스칸의 직계인 '황금씨족'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으로 군림했으며 몽골계 크림 칸국이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 동맹국으로서 오스만 투르크과 함께 유럽을 침략하는 데 앞장섰으나 육지에서는 유럽을 갈아버릴 정도로 막강한 크림 칸국과 오스만 투르크가 세계 바다 정복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오스만 투르크는 바르바리 해적단이라는 사략선들을 운용해서 서유럽 영국, 프랑스 등의 해안가나 남유럽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등의 해안가를 끊임없이 공격해 백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술탄의 후궁으로 삼거나 노예 시장에서 사고파는 등 백인 노예 무역들을 주도했으나 남아메리카나 남태평양 진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검.jpg 명나라, 오스만 튀르크는 빠르지만 거북이를 얕잡아 보던 토끼였고, 유럽은 느리지만 쉬지 않았던 거북이와 같았다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이 같은 중국, 오스만 제국과 유럽의 상황을 '토끼와 거북이'로 비유하곤 한다. 명나라는 이미 영락제 시대 때까지 세계 바다를 지배했었지만, 문제는 명나라는 이미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 1위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보유한 대제국이었다. 즉, 굳이 막대한 군사비를 소모하면서까지 무리해서 세계 바다 패권을 유지할 필요성이 없어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운하도 이미 건설이 완료되었고, 이미 명나라는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에서 세계 1위였기에 더 이상 아쉬운 게 없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도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이슬람 세계의 맹주라는 자부심이 있었고(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술탄국들도 오스만 제국을 이슬람의 큰 형님으로 섬길 정도) 주변국들이 알아서 오스만 제국의 종교를 수입해 갔기 때문에 굳이 유럽처럼 힘들게 포교 활동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동유럽(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 벨라루스, 조지아 등등등)은 한때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몽골제국의 식민지배에서 가까스로 해방됐으나 240년간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국토 전역이 완전히 초토화가 돼있었고, 서유럽이나 남유럽은 몽골제국의 킵차크칸국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유럽 전역에 퍼트린 흑사병으로 인해 엄청나게 죽어나가고 있었으며(몽골제국이 이탈리아를 침략하면서 퍼트린 흑사병에 의해 사망한 유럽 인구는 17세기 때까지를 합치면 약 3억 7,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됨), 이런 흑사병으로 인해 마녀재판들과 유대인 사냥들이 극심해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몽골제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오스만 제국마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을 완전히 고립시키면서 유럽은 그야말로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유럽의 대항해시대의 잔인성들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당시 유럽에 처했던 상황들을 볼 때 유럽도 결코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상황이라 전 세계의 대륙들을 중국(명나라), 몽골(티무르제국, 북원제국, 무굴제국), 튀르크(오스만 제국)가 다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블루오션'이었던 바다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기에 명나라는 자신들이 보유한 세계 1위의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이 오히려 결과적으로 명나라를 안주하게 만들었고, 유럽의 도전을 우습게 봤던 것이다.


비록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거북이(서구열강들)이 결국 토끼(중국)을 추월해 결승점에 완전히 도달하는 데 성공한 시기는 대청제국(청나라) 건륭제 사후인 19세기 때부터였지만 말이다.




[2] 해금정책(海禁政策)



검.jpg 옛날부터 일본 나가사키현에 설치돼있는 명나라의 해적왕 '왕직' 동상


이는 앞서 전술한 부분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명나라 정화의 대함대가 세계 해양을 탐험하고 돌아왔을 때, 정화의 대함대는 명나라가 세계 최강이라는 것만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하여 영락제 사후, 세계 최대 규모의 대운하 건설에 성공한 명나라는 더 이상 세계 해양 패권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고 급기야 '해금정책(海禁政策)'이라는 강경책을 때려 상인들의 무역선이 바다에 나가는 것도 제한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오스만 제국도 서서히 내리막길로 향하면서 명나라, 티무르제국, 오스만 제국, 무굴제국 같은 세계를 지배했던 동양 세력들이 서양을 정복하던 '동세서점(東勢西占)'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해금정책의 이유는 단순히 대운하 건설뿐만이 아니었는데, 이는 당시 명나라가 가진 세계 최강의 군사 기술들을 그 누구도 베끼지 못하도록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이기도 했다. 만약 명나라가 독점했던 이러한 세계 최강의 군사 기술들을 누군가 보고 따라 한다면 명나라가 독점한 세계 패권의 자리에 라이벌 국가가 생기는 격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이러한 해금정책으로 인해 중국 상인들이 바다로 나가기가 힘들어졌는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적으로 돈 욕심하면 중국 상인들을 따라올 자들이 없다는 점이다. 옛날부터 중국 한족들은 돈이 되는 일이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내는 족속들이었기에 중앙 정부가 강하게 탄압했음에도 중국 상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명나라군인들의 감시망을 피해 몰래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중국 상인들의 대대적인 후원을 받은 명나라 해적들이 많아지면서 대해적시대가 열리게 돼버린 것이다.


이 명나라 해적들은 왜구들까지 흡수해서 어마어마하게 세력을 키웠고, 급기야 눈에 보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침탈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에 이르렀다. 영락제 시대 때까진 정화의 세계 해양 대원정으로 명나라 군함대들이 중동 아랍, 아라비아해, 인도양과 태평양의 치안을 모두 독점하고 담당하면서 경찰의 역할까지 했는데 이제는 그런 명나라 군함대들이 더 이상 경찰의 역할을 하지 않으니 순식간에 명나라 해적들이 들끓기 시작하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jpg 명나라 '왕직'은 세계적인 만화 '원피스'에서 가장 강한 해적단인 '록스 해적단' 내에서도 가장 강한 해적에 한 명으로 등장


그리고 이런 명나라의 해적들 중 세계 바다를 가장 혼란하게 만든 해적들은 해적왕 '왕직(王直)'과 필리핀과 스페인 함대들을 공격한 '임봉(林鳳, 리마홍)'이다.


'왕직(王直)'은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의 바다까지 제패했던 명실상부한 '해적왕'이었고, '임봉(리마홍)'은 자신의 해적단이 명나라 군함대에게 격침당하면서 궤멸 직전까지 가자 가까스로 명나라 군함대들의 감시망을 피해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필리핀을 침략하면서 필리핀에 자신만의 해적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대해적이었다.


정확히는 명나라 군함대들의 대대적인 포격과 공격, 진압으로 명나라의 해적 연합 함대들의 총사령관인 '왕직(王直)'이 체포되어 처형되자, 임봉은 급하게 퇴각하여 1571년 광둥성, 푸젠의 섬들을 해군기지화시키려고 기습했으나 뒤이어 추격해온 명나라 군함대들에게 쫓겨 결국 필리핀 남일로코스(Ilocos Sur)을 침략해 임봉의 해군기지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임봉의 야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필리핀 전체를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어서 해적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임봉은 휘하 해적들을 이끌고 스페인 왕국의 마띤 데 고티(Martín de Goiti) 대위가 이끄는 해군 부대들을 공격해 학살한 후 고티 대위를 살해한다.


결국 스페인 혼자서는 임봉을 막는 게 불가능했기에 스페인 왕국은 명나라에게 스페인 군인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고, 명나라 황제도 해적단들을 완전히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군함대들을 파견하면서 명나라-스페인 연합 함대가 구축되어 임봉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렇듯, 명나라가 영락제 사후에 시행했던 해금정책은 엄청난 나비효과가 되어 불법 무기 거래들과 밀무역들을 발달시킴은 물론, 인도양과 태평양 바다는 명나라 해적들이 점령하게 만들었다.






[3] 세계적 요인 : 누르하치의 대제국과 군사적 패권 전쟁



대청제국(청나라)의 세계 최강 기병대, '팔기군' 갑옷 실물 모습


사실상 이게 가장 큰 이유로, 명나라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군사적 원인이기도 하다.

바로 '아이신기오르 누르하치'가 건국한 제국주의, 군국주의 성향의 대제국, '후금제국'의 명나라 침략이다.


고대시대 때 세계적으로 군사적 야망이 가장 강했던 흉노제국이 문명국으로 주변국들의 부러움을 샀던 로마 제국을 정복할 목적을 가지고 침략하면서 로마 제국이 망하기 시작했고 결국 먼 훗날 동로마 제국은 오합지졸, 동네북으로 전락해 버리면서 오스만 투르크의 강력한 청동대포에 의해 멸망당한다.


한때 세계 최강의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으로 세계 바다를 제패했던 명나라 역시도 그런 로마제국처럼 북방 유목민족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겪게 된다. 로마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킨 유목민족은 돌궐족이라면 명나라는 여진족이라는 두 제국 다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족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1616년, 건주여진의 유목민 기병 군대 수장 '아이신기오르 누르하치'는 수도를 심양으로 이전하고 후금제국 건국을 선포한다. 중앙아시아계나 혹은 만주계나 시베리아, 북아시아계 유목민족이 제국을 건국한다면 그 목적은 딱 하나뿐이다. 중국과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마침내 후금제국과 명나라 간의 기나긴 대전쟁이 개시된다.


그리고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의 기동력을 앞세운 후금제국군은 명나라 군대와의 야전에서 승리한다. 이후 1644년 대청제국(청나라) 팔기군이 명나라 수도 북경(베이징)까지 모두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서, 마침내 명나라가 보유했던 세계 최강의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은 모두 대청제국이 차지하게 된다.






2. 정치적 요인




[1] 영락제(永帝樂) 사후, 황제들의 리더십 부재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대는 '고대 중국 대당제국(당나라), 고대 중국 송나라, 대청제국(청나라) 시대'다.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 바로 '명나라' 시대다.

명나라는 초기 명태조 주원장에 의해 대학살이 일어난 이후, 영락제(永帝樂)라는 세계사적인 영웅이 등장하였으나 황제가 죽고 난 이후에는 뛰어난 황제들이 등장하질 못하고 대부분 폭군 아니면 암군 등이 등장했다.


그중 명나라 몰락에 큰 기여를 했다는 4대 암군은 유명하다.


명나라 4대 암군은 제10대 황제 무종 정덕제(武宗 正德帝), 제11대 황제 세종 가정제, 제13대 황제 신종 만력제, 제15대 희종 천계제다.


무종 정덕제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명한 '전쟁광'이었다. 정덕제의 묘호부터가 무종(武宗)이다. 그렇다. 순전히 군사적인 '군인 황제'에게만 주어지는 묘호다.


정덕제는 소년 시절 때부터 직접 야생 표범을 사육하거나 긴 장창으로 야생 표범을 사냥하는 놀이를 즐긴 것으로도 유명하고, 오죽하면 표범 전용 사육장까지 건설했다.


정덕제는 1507년에 자금성 서쪽에 거대한 동물원을 건설하고 이곳에 전 세계의 모든 야생 맹수들을 넣기 시작한다. 그 후에 친위군단들에게 칙령을 하달해 표범, 호랑이, 늑대, 스라소니, 불곰 등등등의 중국에 원래 서식하는 야생 맹수들을 포획해 오고, 그 옛날 정화의 대함대가 전 세계의 대양들을 모험하며 아프리카 케냐까지 원정한 후에 가져온 사자, 치타, 기린, 타조 등등등 아프리카 케냐에만 서식하는 희귀한 동물들과 맹수들까지도 자신의 동물원에 넣은 후에 표범이 있는 동물원이란 뜻이 '표방'이라 명명한다.


명나라의 사자.jpg 명나라 정화의 대함대가 아프리카 케냐 원정후 전리품으로 가져온 '사자'를 영락제에게 바치러 가는 모습


그리고 정덕제는 직접 명태도(明太刀) 같은 날카로운 명검이나 긴 장창을 들고 휘하 군인들과 함께 맹수 우리에 들어가서 표범이나 사자, 호랑이와 혈투를 벌이며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게다가 정덕제의 취미는 표범, 사자, 호랑이 사냥뿐만이 아니라 '전쟁놀이'도 있었다.


명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영락제가 북원(北元)제국을 북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으로 더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가 다시 북원제국이 역공을 가하는 등 중앙아시아의 북원제국, 모굴리스탄과의 끊임없이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가 정덕제 시대 때는 치열한 전쟁들이 계속되던 명나라 역사상 거의 유일한 휴전기였다. 그렇다 보니 정덕제는 자신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선봉장이 되어 친정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문제는 정덕제 시대 때가 되면 이미 전 세계는 화약 무기로 전쟁하던 시대였고, 명나라는 화약 무기가 가장 고도로 발전한 대제국 중 하나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옛날 고대 ~ 중세시대 때처럼 중국 황제들이 선봉장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던 시대는 이미 진즉 지나간 것이다. 따라서 정덕제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도 선봉장이 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광기에 가득 찬 전쟁광, 정덕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든 직접 전쟁을 하고 싶어서 한 가지 꾀를 낸다.


그것은 바로 정덕제의 '카게무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정덕제는 실제로 '주수(朱壽)'라는 군인에게 친히 선봉장이 돼서 나가 싸울 수 있는 군사적 권한을 가진 대장군의 직위를 임명했다. 그런데 그 '주수(朱壽)'라는 군인은 다름 아닌 정덕제 본인이었다. 정덕제의 본명인 '주후조(朱厚照)'를 변형시킨 이름인 것이다.


황제로서 만약 전쟁터에 참전한다 해도 군 통수권자처럼 맨 위에서 총사령관의 역할만 수행할 게 뻔하니, 정덕제가 직접 자기 자신에게 선봉장이 돼서 나가 싸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대장군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덕제는 군대를 이끌고 출병할 때면 항상 '주수'의 이름으로 출병했으며, 대장군인 본인이 황제인 본인에게 전쟁 보고서를 올리기도 하고,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전쟁의 전공을 세우면 황제인 본인이 대장군인 본인에게 날카로운 보검을 하사하는 등의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당연히 명나라의 모든 장군, 군인, 부하, 신하들은 대장군 '주수'가 황제인 정덕제 '주후조' 본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덕제가 이 같은 행각을 한 것은 신분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명나라 법과 군법 등에 걸리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519년, 대장군 주수를 태사직으로까지 임명했는데 이에 몇몇 대신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군인들을 시켜 감옥에 처넣기까지 했다. 그렇게 군법상으로는 '정덕제 주후조'와 '위무대장군 진국공 주수'라는 같은 인물이 서로 동시대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1518년 7월 2일에는 주수를 태사에 임명하고,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투옥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 법률적으로는 '정덕제 주후조'와 '위무대장군 진국공 주수'가 동시에 각각 존재하게 되었다. 다음은 황제 주후조가 대장군 주수에게 하달한 칙령이다.


"이제 특별히 군무를 총독하는 '위무대장군 총사령관(총병관)'에 주수를 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고 병력을 배치해 공격하거나 수비하게 하니 각 지역에 제어할 명령을 내려서 반드시 오랑캐를 쓸어버리도록 하라!" - 1518년 7월 2일 '명나라 무종실록'


작은 키와 삐쩍 마른 체구를 가졌음에도 소년 시절 때부터 '전쟁광'으로 악명 높았던 명나라 정덕제


정덕제는 어린 황태자 시절 때부터 도검과 갑옷을 착용한 채로 말을 타고 휘하 군인들을 조직해 자신만의 군대를 조직해서 전쟁하는 전쟁놀이를 매우 즐겼다. 또한 어린 소년 시절 때부터 스스로 '대장군'이 되고 싶어 했기에 자신의 휘하 호위 군인들로 편성된 군인들을 거느리고 직접 작전을 수행하여 적진을 돌파하는 놀이를 즐겨했는데 효종은 황태자가 명태조 주원장이나 명 성조 영락제처럼 전쟁을 잘하는 황제가 되기를 바랐으므로 전쟁놀이를 좋아하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고 한다.


정덕제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당시 희대의 명장이었던 '왕양명 장군'이 지방 영주(번왕)들의 군사 반란을 진압하러 출병한 틈을 타 지방 영주들 중 하나였던 영왕(寧王) 주신호가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정덕제는 놀라긴커녕 오히려 영왕 주신호와 직접 백병전을 개시할 기회가 생겼다면서 쾌재를 부르며 빨리 전쟁터로 가서 싸우고 싶어서 군대를 이끌고 출병식을 서둘렀는데, 그때 하필 왕양명 장군이 군사 반란을 진압한 후에 수도로 행군하는 길에 이번에는 영왕 주신호가 대규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을 이끌고 곧바로 영왕 주신호의 군대를 공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정덕제는 오히려 황제인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전할 기회가 사라졌다며 분노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게다가 나중에 정덕제는 영왕 주신호를 전쟁포로로 끌고 온 왕양명 장군에게 영왕을 다시 풀어주라고 협박한 후, 영왕 주신호에게 군대 병력까지 줘서 다시 군사 반란을 일으키라고 독촉까지 했다. 이번에야말로 황제인 자신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영왕 주신호 군대와 직접 백병전을 개시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이 소식을 들은 왕양명 장군은 엄청나게 극대노했다.


이렇게 영왕의 군사 반란이 평정된 이후에도 정덕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진으로 원정 나가는 등등등 그야말로 세계사에서 가장 전쟁을 좋아한 전쟁광 황제 1순위에 오를 만한 악행들을 많이 했다.









3. 경제적 요인



[1] 세계 패권제국으로서의 은본위제(銀本位制) 파산



중국 명나라는 세계 1위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가진 대제국이자 세계 패권제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명나라는 은본위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면서 전 세계의 패권국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즉, 중국 명나라의 국가 화폐인 '은'을 전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21세기 미국의 기축통화가 달러이며 이 달러로 미국의 패권이 유지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크나큰 문제가 있다. 중국 대륙에는 땅에 강철이나 철제 무기들을 제작하는데 쓰는 금속들이나 화약 무기의 재료인 화약의 재료들은 엄청나게 많이 있는데, 정작 금과 은 같은 보석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즉, 중국 대륙 자체가 막강한 무기들을 제작하는데 쓸 재료들은 엄청나게 많이 있는데 엄청나게 많이 있지만, 금과 은 같은 보석류를 제작하는데 쓸 자원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명나라의 국가 화폐인 '은'은 점점 고갈 상태로 치달았다. 특히 명나라 후기로 갈수록 은 고갈 현상이 매우 심각해져 간다. 그래서 명나라는 '은'을 전적으로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일본,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같은 당시 세계적인 은 생산국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들을 가져와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중앙아시아의 유목 대제국들인 북원제국, 오이라트 제국, 모굴리스탄과 만주-시베리아의 대청제국이나 임진왜란의 일본군 등등등과의 전쟁들이 치열해지면서 막대한 양의 '군사비'가 소모됐고 이렇게 군사비 소모가 심해지니 명나라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명나라 경제가 휘청거리니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에게 직격타를 때린 것이다. 명나라가 막대한 양의 은들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가져가니 처음에는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도 손해는 아니었는데 점점 이게 심해지자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도 손해를 입기 시작했다. 게다가 명나라 경제까지 휘청거리자 자연스럽게 스페인, 포르투갈에게도 영향이 가서 스페인 왕국은 무려 7번이나 파산을 겪었고 포르투갈 왕국도 자연스럽게 망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나비 효과라도 되듯이 명나라가 거의 몰락하자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도 같이 따라서 망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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