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계 티무르 제국에게 조공을 바쳤던 신성 로마 제국
<세계 최강자들의 충돌과 세계사>
때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대몽골제국(The Great Mongol Empire)의 직접적인 세계 패권이 막을 내린 직후인 14세기 말, 전 세계는 세 명의 강력한 군사적 패권자들이 분할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북원(北元)제국'과 '오이라트 제국' 같은 중앙아시아계의 북방 대제국들을 견제하며 신흥 패권국으로 급부상한 '명(明)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서아시아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바예지트 1세(Bayezid I)'가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를 겨누며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유럽 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마저 정복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는 대몽골제국의 세계 패권과 영광을 재현하려는 '티무르(Timur)'가 파죽지세로 수많은 제국을 정복하고 있었다. 이들 중 당대 가장 강력한 군사적 패권자는 단연코 '티무르'였다.
티무르 제국의 세계 정복 전쟁으로 인해 티무르 제국과 오스만 제국, 이 두 패권 제국의 군사적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 결과는 멸망 직전의 풍전등화와 같았던 동로마 제국과 공포에 떨던 서유럽(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등)에게 기적 같은 '생명 연장'이라는 역사적 나비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제1부. 오스만 투르크 제국 '번개왕' 바예지트 1세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앙카라 대전 발발 6년 전인 1396년,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훗날 신성 로마 황제)가 주도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들이 대거 출전한 최후의 대규모 십자군인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바예지트 1세에게 처참하게 괴멸당하며 대패했다.
이 패배로 당시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입을 저지할 군사력이 전무함을 통감했으며, 이대로라면 유럽 전역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바예지트 1세는 "로마(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에 내 말의 여물을 먹이겠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한 영웅호걸이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있었으며,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제2부. 동방의 대정복자, '티무르'의 오스만 제국 정복 명분>
그때, 세계 최강의 정복자인 칭기스칸의 후예이자 그 군사적 위업을 계승한 티무르가 이끄는 티무르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페르시아, 인도 북부, 북아프리카의 맘루크 왕조까지 정복하거나 초토화시키며 빠르게 오스만 제국 국경까지 진격했다. 칭기스칸의 계승자인 그는 평생 전 세계의 수많은 전쟁터들을 누비며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不敗)의 명장이기도 했다.
티무르 제국에게 오스만 제국은 반드시 정복해야 될 신흥 경쟁 세력이자, 자신이 정복한 국가들에서 도망친 군주들을 숨겨주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것이 티무르 제국이 직접 오스만 제국을 침략하여 정복하게 되는 '서진(西進)'의 명분이 되었다.
더욱이 티무르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반드시 정복해야 될 또 하나의 확실한 명분이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되어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티무르 제국에게 정복당한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군주들이 바예지트 1세에게 의탁했고, 반대로 바예지트 1세에게 축출당한 군주들은 티무르에게 도망쳐 복수를 호소했다.
티무르는 바예지트 1세에게 "오스만 제국은 옛날 대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일개 변경의 태수(영주)에 불과하다"며, 알아서 티무르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라는 군사적 복종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격분한 바예지트 1세는 티무르에게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욕설(티무르의 황후까지 언급하며 모욕)이 담긴 답신을 보내는 등 상황은 자존심 대결로 치달았다. 먼저 도발한 것은 티무르였으나, 바예지트의 답신은 자존심 강한 티무르를 완전히 격노하게 만들었다.
<제3부.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오스만 제국 침략 개시>
1402년, 티무르 제국은 14만~20만 명에 달하는 대군단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진격했다. 티무르는 사전에 입수한 첩보들을 바탕으로 바예지트 1세가 미리 매복하고 있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우회했다. 그는 중부 아나톨리아의 '앙카라(Ankara) 대평원'으로 우회하는 천재적인 우회 기동 작전을 전개하여 오스만 제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티무르는 세계 정복자 칭기스칸의 후예답게, 칭기스칸이 구사했던 초토화 작전들을 이 앙카라 대전에서도 전개했다. 티무르 제국군은 진군 경로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도시 '시바스(Sivas)'를 무자비하게 파괴하여 바예지트 1세를 자극하고 앙카라 대평원으로 유인했다. 티무르의 함정에 걸려든 바예지트 1세는 콘스탄티노플 포위를 풀고 급히 회군하여 티무르 제국의 기병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군의 기만작전에 말려든 오스만 제국군은 폭염 아래 지독한 강행군을 해야 됐고,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탈진 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군을 사전에 무력화하기 위한 티무르의 치밀한 군사 전략들 중 하나였다.
앙카라 대평원에 먼저 진입한 티무르 제국군은 전략적 요충지와 수원지(우물과 개울)를 모두 장악했고, 뒤늦게 도착한 오스만 제국군은 극심한 갈증 속에서 고지대를 선점한 티무르 제국군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최악의 조건에 놓였다. 그렇게 티무르의 완벽한 설계 하에 이 세계사를 결정할 대전쟁은 시작되었다.
<제4부. 중세 최후의 대규모 기병전, 티무르 제국군의 오스만 제국 침략전쟁>
티무르 제국군의 주력군대는 중앙아시아 몽골계의 세계 최정예 기병대였으며, 인도 원정에서 획득한 '전쟁 코끼리 부대(약 30마리)'와 '나프타(화약 무기의 일종) 투척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오스만 제국군은 기병보다는 '예니체리(Janissaries)'라 불리는 최정예 보병대가 주축이었고, '아나톨리아 징집병'과 '바예지트의 처남인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가 이끄는 세르비아 중장기마대'가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오스만 제국 내부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오스만 제국 좌익에 배치되었던 몽골계 타타르 기병대들이 전투 도중 티무르 제국 편으로 돌아선 것이다. 티무르 제국은 사전에 광범위하게 첩자들을 침투시켜 오스만 제국의 동태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군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인 몽골계 타타르 기병대들을 이미 매수한 상태였다.
티무르 제국이 몽골제국을 계승했다고 하여 티무르 제국군 전력에만 몽골계 기병대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몇 세기 전 대몽골제국이 세계를 지배했을 때 오스만 제국 지역 역시 몽골제국군이 정복했었고, 오스만 제국은 초기까지도 몽골제국의 식민지(Ilkhanate vassal)였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이 몽골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직후에도 오스만 제국 군대 내에는 여전히 몽골계 타타르 기병대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최정예 기병 전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5부. 티무르 제국군의 전쟁 포로로 끌려간 오스만 제국의 황제 바예지트 1세>
문제는 오스만 제국이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상태인 반면, 티무르 제국은 대원제국-북원제국과 함께 대몽골제국을 공식적으로 계승한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정통성이 강한 직계 계승 국가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몽골계 타타르 기병대들로서는 오스만 제국보다는 '진짜' 몽골제국인 '티무르 제국'에 더 강한 동족 의식과 정체성을 느꼈던 것이다. 티무르 제국군이 침투시킨 첩자들이 접근하여 배신을 유도하자, 그들은 즉각 호응하며 전광석화와 같이 오스만 제국을 배신했다.
게다가 티무르 제국 진영에 자신들의 옛 주군(망명한 아나톨리아 영주들)이 깃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본 아나톨리아 베이(Bey)들의 징집병들마저 오스만 제국을 등지고 티무르 제국 편으로 돌아섰다.
비록 세르비아 기마대와 황제 친위대인 예니체리만큼은 끝까지 바예지트를 호위하며 용맹하게 분전했으나, 전황(戰況)은 이미 티무르 제국의 완벽한 대승으로 기운 상태였다. 전멸을 직감한 세르비아 공 스테판은 바예지트 1세에게 퇴각을 권했으나, 자존심 강한 바예지트 1세는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 낙마(落馬)하여 1402년 7월 28일, 티무르 제국군의 전쟁 포로로 사로잡히고 만다.
<제6부. 티무르 제국의 오스만 제국 반식민지화가 유럽 전역에 미친 영향력과 충격>
앙카라 대전의 결과는 유럽 세계에 번개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불과 몇 년 전 니코폴리스에서 유럽 최강국들의 연합군들을 가볍게 박살 내며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지옥에서 온 악마' 바예지트 1세가, 오스만 제국보다 훨씬 더 군사력이 막강한 먼 동쪽(중앙아시아)에서 온 '세계 최강 제국 티무르 제국의 황제' 티무르에게 대패하여 전쟁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은 유럽 세계에게 있어 마치 신의 구원과도 같았다.
함락 직전이었던 유럽의 최후의 보루(堡壘),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군의 철수로 인해 기적적으로 50년의 수명을 연장받았다. 오늘날 전 세계 역사학자들은 만약 티무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오스만 제국의 정복 위업은 1453년의 메흐메트 2세가 아니라 바예지트 1세에 의해 달성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을 가장 지배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시 서유럽의 군주들은 티무르를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로 칭송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스페인(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3세'는 티무르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특히 스페인 사절 '루이 곤잘레스 데 클라비호(Ruy González de Clavijo)'는 티무르의 군사적 수도 사마르칸트까지 직접 찾아가 그를 알현하고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유럽 세계를 구원해준 티무르를 찬양하는 방대한 기록까지 남겼다. 서유럽 왕국들은 각종 금은보화와 귀한 예물들까지 바쳤는데, 이는 형식상 외교적 예물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인 티무르 제국에 바치는 '조공(朝貢)'의 성격이 짙었다. 이는 티무르 제국에게 제발 서유럽, 남유럽까지는 침략, 정복, 식민지화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애원이나 다름없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제노바, 베네치아) 상인들 역시 티무르 제국을 찬양했다. 비록 티무르 제국군이 아나톨리아 서부의 스미르나(이즈미르)에 있던 구호기사단 성채를 함락시켰음에도, 유럽은 오스만 제국을 궤멸시킨 사실 하나만으로 티무르를 가장 열렬히 찬양했다. 유럽 국가들의 서신에서는 칭기스칸의 후예인 티무르를 향해 "전 세계의 정복자", "세계 최강의 무적 황제"라는 극존칭이 사용되었다.
특히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는 티무르에게 신속(臣屬)을 맹세하며 조공을 바쳤고, 신성 로마 제국 또한 사실상 티무르 제국의 군사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는 과거 오스만 제국에 바치던 조공이 티무르 제국으로 대상만 바뀐 셈이었다. 유럽이 이토록 티무르 제국을 찬양하고 조공을 바친 이유는 명확했다. 오스만 제국조차 막지 못해 멸망 직전까지 갔던 유럽 세계에게, 그 오스만 제국을 가볍게 정복한 대몽골제국의 계승자 티무르 제국이 마음만 먹고 서진한다면 유럽 전체가 티무르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서양의 기록에서는 이를 '외교적 예물'로 애써 포장하려 하지만, 당시의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를 고려할 때 이는 사실상 "유럽을 침략, 정복, 식민지화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의 뇌물성 조공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전 세계 역사학계의 만장합치(滿場合致)된 공론(公論)이다. 티무르 제국의 공식 기록관들 역시 이 사건을 "프랑크(유럽)의 국왕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티무르에게 군사적으로 복종하며 조공을 바쳤다"라고 기술했다.
<제7부. 몽골계 티무르 제국의 중국 침략 계획>
그 이후의 세계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티무르 제국군이 유럽을 정복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조공들을 많이 삥 뜯어서라기보단, '명나라 정복'이라는 최우선 군사적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세까지도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 아닌 '중국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와 중동'이었다. 유럽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시대를 지나고 있었기에 대항해시대 훨씬 이전인 당시까지는 세계의 '변방'에 불과했다. 따라서 티무르에게 있어 세계의 중심인 '중국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세계 패권을 진정으로 만천하에 과시하고, 그 위업을 만세(萬世)에 떨치는 길이었다. 게다가 중국 정복은 세계 정복자 칭기스칸 역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군사 임무였기도 했다.
그렇기에 티무르는 칭기스칸의 후예로서 중국 대륙을 반드시 정복해야 될 강한 의무감을 항상 사명(使命)처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엄청난 사실은 당시 명나라는 쇠락한 말기가 아니라 최전성기인 영락제 치세의 시작점이었다는 점. 만약 티무르가 당시 명나라를 침공했다면, '티무르 대 영락제'라는 그야말로 세계사 최대의 군사적 라이벌 대전이 성사될 뻔했고, 만약 성사만 됐다면 그야말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모든 밀덕들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라이벌전으로 각인될 뻔했다. 게다가 티무르는 사전에 이미 전 세계에 수많은 첩자들을 침투시켰고, 동포였던 북원제국이 명나라에 밀리는 상황이었기에 몽골계 세계 제국인 티무르 제국이 자신들의 큰형님인 북원제국의 복수를 위해 명나라를 침공해야 된다는 명분 또한 완벽했다.
하지만 신은 티무르에게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주었으나, '장수(長壽)'는 허락하지 않았다. 평생을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정복 전쟁들에서 모두 전승했던 기병 군인 출신의 황제 티무르는 1405년, 중국 원정길인 '오트라르(Otrar)'에서 '병사(病死)'하고 만다. 가장 직접적 사인은 병사였으나, 쉴 새 없는 정복 전쟁으로 누적된 '과로(過勞)'가 원인이었다. 그는 선조인 칭기스칸의 길을 따라 세계를 정복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마저 칭기스칸처럼 세계 원정 도중 '과로사(過勞死)'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티무르)는 평생을 동경했던 자신의 선조인 칭기스칸처럼 세계 최강, 세계 패권, 그리고 죽음마저 완벽히 똑같은 길을 걷게 된 것.
티무르 제국의 전쟁 포로가 된 바예지트 1세는 어떻게 됐는가? 그는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 제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술탄인 자신은 티무르 제국군의 전쟁 포로가 된 현실을 비관하다가 화병으로 사망했다. 물론 일설에는 자살설도 있으나 화병으로 인한 사망이 유력하다.
오스만 제국 역사상 막강한 술탄 중 하나였던 바예지트 1세의 죽음 이후, 오스만 제국은 남겨진 네 아들(슐레이만, 이사, 메흐메트, 무사) 간의 치열한 내전으로 11년간(1402~1413년) 대공위 시대(Ottoman Interregnum)라는 대혼란기에 빠졌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 및 동로마 제국 멸망은 반세기 가까이 지체되었다.
<제8부. 그 이후의 세계사, 티무르 제국의 분열>
1405년 티무르가 급사하면서 그가 이룩한 세계 제국은 급속히 분열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세계 정복, 세계 패권으로 인해 세계사는 송두리째 뒤바뀌게 된다. 티무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무력화시킨 덕분에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이 사라진 유럽은 시간을 벌어 르네상스로 나아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이었고, 미래에 부활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대혼란기의 내전에서 최종 승리한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재통일되었고, 국력을 부활하여 결국 1453년 희대의 정복군주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만다.
1402년 당시 티무르에게 보낸 '조공'과 '찬양'은 당시 유럽 세계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로 남았다. 이 사건은 단순히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겪은 '성장통'이자 '예방주사'로도 해석된다.
오스만 제국은 옛날 대몽골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음에도, 앙카라 대전에서 또다시 대몽골제국의 후예인 티무르 제국에게 대패하며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뼈아픈 패배를 통해 오스만 제국은 국가 시스템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1인 독재의 위험성을 깨닫고 보다 체계적인 관료제와 예니체리 제도를 강화했으며, 이것이 훗날 쉴레이만 대제 시대의 최전성기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유럽은 티무르 제국을 '동맹국'으로 여겼으나, 티무르 제국에게 유럽은 단지 '곧 정복할 예정인 서쪽 끝의 작은 변방'일 뿐이었다. 티무르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오스만 제국 다음 차례는 명나라와 유럽 세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