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 일본의 군사적 대립과 대만의 반중감정의 역사
옛날 중국 대청제국이 세계 최강의 기병력을 자랑하던 건륭제·옹정제·강희제 시대까지 중국 대청제국은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정복하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인 티베트, 위구르(동튀르키스탄)과 남아시아 국가인 부탄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인 네팔, 베트남, 미얀마, 대만(타이완) 등을 오랫동안 식민 지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대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대만에 여행 가본 수많은 한국인들 중 이런 궁금증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만은 역사적으로 일본의 속국이었으면서 왜 친일 성향이 압도적으로 많을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대만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제 1부 '대만 원주민의 시기'>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은 대부분 세계의 주요 종교인 이슬람교, 불교, 유교를 받아들여 나름의 문명 국가를 형성하였다. 특히 베트남과 미얀마는 근대 시기의 동남아시아의 패권국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동남아시아 최강국이었다. 베트남이 그렇게 발전한 가장 큰 이유는 고대 중국이 베트남을 1000년간 식민 지배하면서 유교가 그 땅에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과 미얀마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근대 시대의 동남아시아에도 한때 패권국이 있었던 것처럼, 반대로 '기록'이나 ‘문자’조차 없는 지역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대만과 필리핀이다. 이 지역들은 지구상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지역이었던 메소 아메리카의 잉카·아즈텍·마야 문명과 마찬가지로 ‘문자’조차 없던 석기 시대였다. 하지만 돌멩이를 들고 싸웠던 구석기~신석기 수준의 석기 문명이었던 잉카 문명이나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과는 달리, 그래도 대만과 필리핀의 원주민들은 청동기 수준의 무기는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비록 건축 기술이나 과학 기술, 의학 기술은 잉카 문명이 훨씬 발전했지만, '무기'나 '군사력'만큼은 대만 원주민들이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대만과 필리핀의 고대사는 여전히 세계 사학계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게다가 고대시대의 세계 패권국이었던 당시 중국이 대만이나 필리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 대만의 고대사를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고대 중국의 관심은 언제나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북방 제국들에 있었고, 흉노 제국 등 중앙아시아의 강대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느라 바빴기 때문에, 미개인으로 여겨진 필리핀 섬과 대만 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계 군사 패권국인 대원제국의 대모험가인 '주달관(朱答㘜)'이 특명을 하달받아 크메르 제국을 모험해 기록하여 황제에게 보고한 보고서이자 모험서인『진랍풍토기』나, 명나라 영락제가 정화(鄭和)의 대함대를 파병시켜 아프리카 케냐까지 탐험하는 동안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을 탐험·기록한 사례 외에는, 동남아시아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만 원주민의 정체>
여하튼, 이렇게 고대시대와 중세시대를 거쳐 근세시기인 대항해시가 되면서 1590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대만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대만에는 문명 국가나 강력한 부족, 통치자가 아예 전무했다. 비록 포르투갈인이 먼저 발견했으나 현재 타이완 섬에 터전을 꾸린 사람은 네덜란드인이었다. 빈 땅에 들어서는 것처럼 ‘무혈입성’한 네덜란드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농사를 지었는데, 이들은 스스로 농사 짓기보다는 대만의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에게 차와 사탕수수 재배를 대신하도록 요구했다. 중앙집권적 체제나 봉건적 부족 개념이 전혀 없던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은 무기력하게 그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모아이로 유명한 라틴 아메리카의 칠레의 이스터 섬의 주민들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대만의 오스트로네시아어 원주민들이 언제 대만을 떠나 이스터 섬까지 정착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대만 원주민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최초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바다의 탐험민족’이라 불렸으며, 전 세계 바다를 항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탐험 범위도 매우 넓어 라틴 아메리카의 이스터 섬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말라가시어), 하와이(하와이어), 뉴질랜드(마오리어)까지 가서 그곳에 터전을 꾸려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곳 원주민들은 대만 원주민들과 유전적으로 비슷하다. 하지만 대만 원주민들은 마다가스카르, 이스터 섬, 하와이, 뉴질랜드로 대규모로는 이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만 섬에는 여전히 오스트로네시아어 원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네덜란드인이 대만으로 이주해오자, 잠시나마 대만은 네덜란드의 종속국이 되었다.
<제 2부 '명나라 정성공 장군의 대만 점령기 (1661년)'>
1644년, 군사·경제·기술 면에서 세계 패권국, 중심국, 기반이었던 명나라는 결국 대청제국의 세계 최강의 기병대인 팔기군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멸망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명나라 멸망 직후, 잔여 군벌들은 최남단으로 남하하여 ‘남명(南明) 제국’을 세우고 항쟁을 이어갔으나, 이 남명 제국마저 대청제국에게 정복당하면서 중국 대륙 전역은 완전히 대청제국의 정복지가 되었다.
남명 제국의 총사령관은 남해에서 해적왕으로 악명 높던 정성공 장군이었다. 정성공의 부친은 명나라 말기의 해적 출신의 귀족 가문 정지룡(鄭芝龍)이었다. 정성공은 부친의 피를 이어받아 남해에서 강력한 함대를 이끌고 해적왕으로 등극했다. 또한 정성공의 모친은 일본 히라도 번(平戸藩)의 영주 타가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의 자식 타가와 마츠(田川松)였다. 정성공은 히라도에서 태어나 7세 때까지 살다가 명나라 복건성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명청 전쟁이 1644년 대청제국의 대승리로 끝나자 해적 귀족 가문이었던 정지룡은 몰락했다. 정성공과 그의 일족은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걸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계속 항쟁을 이어갔으나, 당대 세계 최강의 기병대를 이끌던 대청제국의 황제가 팔기군을 앞세워 결국 대청제국은 남명 제국까지 정복하여 남명 제국을 멸망시켰다.
남명 제국의 잔당 병력을 이끌고 함대를 타고 바다로 나선 정성공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자, 할 수 없이 ‘미개인들이 거주하는’ 대만을 점령하기로 계획했다. 당시 대만 섬은 네덜란드의 종속국이었다. 정성공 장군의 해군들은 대만 섬을 침공하여 네덜란드 해군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학살한 후, 1661년 대만을 완전히 점령했다.
정성공 장군은 복건성에 남아 있던 남명 제국의 백성들을 신속히 대만으로 이주시키고, 자신을 초대 황제로 추대하여 대만 최초의 국가인 ‘정씨 국가(동녕국)’를 세웠다. 이 국가가 대만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제국이라고 한다. 이때 세계 3대 국제 마피아 조직으로 악명 높은 ‘중국의 삼합회’도 결성되었다. 중국의 삼합회 자체가 애초에 반청복명의 기치로 연합한 대규모 초국가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남명 제국의 마지막 백성으로서 복건성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이들이 대만의 1세대 본성인인 ‘복건인’이다.
<제 3부 '세계 최강의 기병대 팔기군을 앞세운 대청제국(청나라)의 대만 식민지배기'>
세계 최강의 기병대 팔기군을 운용한 대청제국(청나라)에 의한 대만 식민지배기는 대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이자 ‘대만 정체성’이 형성된 가장 결정적 시대였다. 정성공 장군의 남명군이 네덜란드군을 몰살시키고 대만을 점령한 후 세운 ‘정씨 국가’는 ‘반청복명’을 국시로 삼고 항전 체제를 체계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성공 장군과 그를 지지하는 한족 군벌 세력들은 대만의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을 납치하는 등으로 대규모로 활용하여 그들을 이용해 명나라 부흥운동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정성공 장군이 곧 사망하자, 정씨 국가의 한족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이 대만 섬의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야망을 드러내며 갖은 수탈과 폭력을 일으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점차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 계획들은 당시 대만 섬에 몰래 주둔했던 대청제국의 첩보부대에 의해 황제에게 보고되어 모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대청제국 황제들은 팔기군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패권 국가인 준가르 제국, 카자흐스탄의 전신인 카자흐칸국, 러시아 제국과 패권 전쟁하느라 남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대청제국의 황제들은 내전으로 삼번의 난까지 진압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대청제국이 준가르 제국, 카자흐 칸국,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시작하고, 내전까지 진압하면서 강희제는 남쪽에 관심을 돌려 이참에 빠르게 대만 섬을 정복하고 식민지화했다. 이 식민지배기를 대청제국이 대만을 식민지배하던 시대라고 하여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대만청치시기'라고 정의했다. 당연히 정씨 국가는 단번에 궤멸당했고, 광기에 휩싸인 대청제국의 군인들은 반청복명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본성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광기’는 전염된다"는 말처럼, 강력한 대청제국의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던 본성인들은 그 광기에 동화되어 오히려 대만 섬의 원주민들인 오스트로네시아어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분풀이하기 시작했다. 최첨단의 총과 대포로 중무장한 본성인들의 압도적 화력을 견디지 못한 오스트로네시아어 원주민들은 대부분 산골짜기로 도망쳤다. 그러던 중 이 시대에 광둥성·광저우성 출신 한족 군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해 왔는데, 이들을 ‘객가인’이라 부른다. 객가인들도 본성인 편에 합세하여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 학살에 가담했다. 이렇게 옛날부터 주도적인 중국 한족들의 대만 원주민 학살로 인해 대만 원주민들의 반중감정의 토대는 점점 쌓여만 갔던 것이다.
<제 4부 '일제강점기'>
근대 시기에 들어 1895년경 대청제국이 쇠락하자 일본은 대청제국의 식민지였던 대만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무자비한 폭력적이었던 제국 군대였던 대청제국 군대와는 달리 일본군은 대만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일본제국은 자신들도 식민 지배를 올바르고 문명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등 문명국’이라는 점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만을 근대 국가로 발전시킨다는 명목하에 다양한 식민 통치를 실시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벌였던 완전한 숙청과 수탈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오래전부터 고도로 발전한 선진국이자 문명국이었으며, 민족주의가 매우 강했다.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조선은 초기까지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군사력과 기술력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자체적으로 문자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과학 기술과 국가, 법, 문자, 기록, 국가, 법 체계 등과 각종 기술들도 굉장히 뛰어났으며, 무엇보다 민족성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조선은 후기 세도 정치 시기에 내부적 붕괴로 인해 완전히 국가 자체가 죽어버린 것이다. 조선의 초기 모습은 선진국 그 자체였기에 조선의 자존심은 매우 강했고, 외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것에는 극도로 강하게 저항했다.
비록 조선이 아니지만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세계의 군사적 패권을 제패했던 대원제국이 고려를 100년간 식민지배한 원 간섭기에도 엄청난 항쟁과 저항이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배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쉽게 생각해보면 만약 근대 시기에 일본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식민지배하려 했다면,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저항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고도로 발전한 문명국을 지배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반면 대만 섬과 필리핀 섬은 잉카·아즈텍·마야처럼 문자 체계가 없었고, 군사력도 지구상에서 가장 약한 약소한 종족들이었다. 대만이 국가로서 처음 역사를 시작한 것도 자발적인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남명 제국의 정성공 장군이 대만을 강제 점령한 뒤 ‘정씨 국가(동녕국)’를 세운 것에서 출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대만은 네덜란드, 남명의 정씨 국가(동녕국), 대청제국, 일본제국이라는 수많은 식민 지배 시기를 거쳐왔고, 스스로 독립국이었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 대만을 지배했을 때에도 저항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대청제국의 대만 식민지배기에는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던 반면, 일본제국은 문명적인 식민 경영의 표본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대만에 대한 학살을 많이 자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만 입장에서는 “어차피 대만은 식민지배된 역사가 있으니, 그중 그래도 일본제국이 제일 양반이다”라는 인식이 생겼다. 또한 대만 건국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정씨 국가(동녕국)’의 초대 황제 정성공 장군의 모친이 일본인이라는 점도 대만이 친일적 성향을 갖게 된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대만 역시 식민지였기에 인도적 방식만으로 통치할 수는 없었다. 이에 일본이 내놓은 대책이 바로 ‘이번(理蕃) 정책’이다. 이번 정책은 본성인과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을 분리하여,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만 따로 모아 구석진 곳에 ‘특별 자치구역’을 만들어 그곳에서만 살게 하는 차별 정책이다. 남명 제국의 복건성 출신 한족 본성인들이 분풀이 삼아 총과 대포로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자,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근대 시기에 일본인들은 그들을 ‘고산족’이라 부르며 산에서 끌어내려 노예로 만들어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이렇게 근대 시기에 대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기득권층인 마치 일본 만화 원피스의 '천룡인' 같은 일본 이주민들과 기존의 한족 본성인들은 각종 혜택을 받고 귀족처럼 호화롭게 살았지만, 대만의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에게는 강제 노역을 시키고 온갖 학대를 가했다. 결국 이중 차별에 분노한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으나 곧바로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고 학살당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2011년 오우삼 감독의 『세디크 발레』(국내 개봉명 《워리어스 레인보우》)이다. 물론 이 영화는 실제 사건과는 다르게 각색되긴 했으나,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대만 금마장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토론토 영화제 등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독립운동의 실화인 ‘우서 사건’은 영화와 달리, 오스트로네시아어 원주민들이 제대로 반격도 못 해보고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면서 끝난 비극적 사건들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한족 본성인들과 일본인들은 대만 섬의 오스트로네시아어 원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수탈하며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그로 인해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은 엄청나게 희생되면서 그 인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잉카·아즈텍·마야 문명이 사라졌듯이 지금은 거의 소멸하여 명맥 유지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만 섬의 진짜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은 현재는 대만에서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이는 미국 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만나보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현재는 그 주인 자리는 대만인들이 뺏어갔으며, 더 나아가 이제 중국 한족들이 그 대만 섬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계획하고 있으니, 얼마 남지 않아 멸종위기 직전인 대만 원주민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본래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을 가지고 침략자들끼리 싸우고 있는 현실을 보고 분개할 따름인 것이다.
<제 5부 '외성인'>
‘본성인’이란 남명 제국의 복건성·광저우성 출신 한족으로서 대만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을 식민 지배하던 이들을 말한다. ‘원주민’이란 본성인들에게 식민 수탈과 학살을 겪은 즉, 대만에 본래 살던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을 뜻한다. 그렇다면 ‘외성인’이란 무엇인가?
‘외성인’은 그 역사가 길지 않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모택동(마오저둥)의 공산당에게 패배한 장개석(장제스)의 국민당은 세력을 이끌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렇게 대만에 온 중국인들이 바로 ‘외성인’이라 불린다.
한편 대청제국의 식민지들이었던 중앙아시아의 티베트, 위구르(동튀르키스탄), 서남아시아의 부탄, 네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 미얀마, 대만 섬 등 대부분은 대청제국 본국 출신의 한족 이주민들에 의해 식민화되었다. 특히 대만 섬은 대청제국의 본국 이주민이 많긴 했으나 대부분 광둥성과 광저우성 출신 한족이었기 때문에 광둥어와 객가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은 영토가 매우 광대하여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모두 아우를 정도로 거대하고 대청제국보다 영토 크기가 2배 이상 줄어든 현재 중국에도 세계 4위의 영토 크기를 자랑하기 때문에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에 대만에 온 장개석과 국민당은, 광둥어·객가어·일본어밖에 사용하지 못하던 대만인에게 표준 중국어를 강제하여 현재 대만의 공용어를 표준 중국어로 만들었다.
근세시대 때부터 대만을 식민 지배하던 한족(본성인)들은 대만에 너무 오랫동안 살면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 반면 중국 본국의 선진 문화를 보유한 한족(외성인)들은 “우리가 진짜 한족이다”라며 본성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대만 정부의 군 고위직과 주요 기업을 소수의 외성인이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성인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본성인들은 1947년 2·28 사건으로 대폭발했다. 이에 국민당은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벌여 대만 전역에서 2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어 대만은 37년간이라는 세계적으로 최장기간의 계엄령을 선포하여 대만을 최장기 계엄 상태로 통치함으로써 사실상 군부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은 모두 대만을 식민지배하려 온 한족 이주민들 간의 경쟁일 뿐이다. 마치 호랑이와 사자가 사냥감을 두고 싸우듯이, 이 과정에서 한족들에 의해 오랫동안 학살당해온 대만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시아 원주민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