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제국(원나라)군 장창기병대가 동남아시아 미얀마를 침략하자 미얀마 병사들이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모습
13세기 말기, 세계 역사상 최강의 대정복자 '칭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대칸이 건국한 대원제국(元)은 대몽골제국을 계승한 세계 최대 강국으로서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대칸은 1271년까지 중앙아시아 전역, 중국 대륙의 금나라, 거란제국, 남송과 동북아시아의 고려, 동남아시아의 미얀마까지도 정복하면서 이른바「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 패권체제를 구축하였고, 동, 서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정복지로 삼았다.
당시 중세시대의 세계 최강국이었던 대원제국은 1271~1273년에 동남아시아의 바(파간) 왕국의 '나랏티파테(Narathihapate) 국왕'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을 강요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쿠빌라이 대칸이 황명으로 동남아시아 버마(미얀마) 파간 왕국에 대한 군사 원정을 황명을 하달하자, 대원제국군이 세계 최고로 조직화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원사(元史) 등 세계사적 사료의 기록으로, 대원제국군의 동남아시아 군사 원정대는 당시 세계 최정예 군부대들을 편성하여 정복지의 한족들을 동원하여 송나라식 군함대를 건조하고 대규모 해군 병력까지도 동원하였다.
예컨대『신원사(新元史)』에는 대원제국의 군사정권이 '평면(平缅) 선위사(宣慰司)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주둔군'인 '케레이트군(몽골화된 키르기스계인 튀르크계 유목군대)'에게 「征缅招討使(정면초토사)」겸임을 임명하여 6천 병력의 해군 군단을 동원할 군함을 건조케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평면(平缅)이란 현재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북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대원제국군은 이미 이 지역에 식민 통치기구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리고 선위사(宣慰司, Xuanweisi)는 대원제국이 자신들이 정복했던 전 세계의 수많은 식민지, 정복지들에 설치했던 군사 기구다. '평면 선위사(平缅 宣慰司)'는 이 식민지들을 식민 지배했던 군사 기구다. 그리고 이런 선위사들을 중간에서 관리했던 중간 관리직에 해당하던 식민 통치기구가 '총관부'이며, 이 '총관부'들의 식민지 주둔 총독이 '총관'이며, 이 총관의 식민지 주둔군대 상관이 '다루가치'였다.
그리고 이런 식민 통치기구들을 총지배했던, 그러니까 전 세계의 모든 식민지들을 총괄, 총지배했던 대원제국 대칸(황제)의 황명을 받아 전 세계의 모든 식민지, 정복지들을 총괄적으로 식민 지배했던 세계 최고의 군사령부이자 식민 통치 군사기구가 바로 '행성(行省, 행중서성=行中書省)'이었다.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전 세계 식민 통치기구의 계급도]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군사정부(중서성)
└── 행성(行省) (예: 요양행성)
└── 다루가치
└── 총관부(總管府) (예: 쌍성총관부)
└── 선위사(宣慰司)
그리고 '정면초토사(征缅招討使)'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원정군대의 군사 총사령관(군직 명칭)'에게 부여된 군사 지휘관의 군직책이었다. 주로 동남아시아 정복전쟁이나 반란 진압 등 특정한 군사적 목적을 위해 임명되는 고위 군사 지휘관이었다. 다른 지역 예를 들면 동북아시아나 중앙아시아 정복을 위한 군대 사령관의 경우는 다른 초토사 군직(軍職)이 따로 있었다.
즉, 동남아시아 주둔군으로서 임명된 튀르크계 케레이트군은 동남아시아 식민 통치기구인 '평면 선위사(平缅 宣慰司)'이자 미얀마 정복 원정대인 '정면초토사(征缅招討使)'에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즉, 동남아시아 정복 함대를 건조하여 6000명 병력의 해군 병력를 동원한 대규모 해군 원정군을 편성하였던 것이다.
1277년의 대원제국의 제1차 동남아시아 미얀마 침략에서 대원제국군은 파간국 국경부근 양강(兩江) 근처까지 남진(南進)하여 나가숭갠(Ngasaunggyan) 전투에서 바간 왕국군을 대량 학살하였다. 이 전투 패배로 미얀마의 나랏티파테 국왕의 군대는 완전히 학살당했고, 게다가 1283년에는 대원제국군이 바간 왕국의 국경 요충지이자 북부 요새인 바모(Bhamo)를 함락하면서 에야와디강(버마어: ဧရာဝတီမြစ် 에야와디밋) 혹은 이라와디강(영어: Irrawaddy River)강 계곡을 통해 버마 내륙으로 대원제국군이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진격로(길)가 열렸다. 대원제국군의 이러한 일련의 대공세로 파간 왕국국은 절체절명의 대위기에 빠졌고, 국왕 나랏티파테는 1287년 수도 바간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서남부 바신(Bassein)으로 도주한 후 아들에 의해 암살되는 대참극까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1287년의 대원제국의 당시 전 세계 정복지들 중 하나인 윈난성에 주둔하던 쿠빌라이 대칸의 손자인 '에센 테무르(Esen Temür) 선봉대 장군'이 이끄는 제2차 동남아시아 미얀마 침략군이 다시 미얀마의 바간 내륙까지 남진하여 파간성을 점령하고 바간 왕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2차 침략의 결과로 대원제국은 바간 왕국 정복을 공식화하였고, 바간 왕국은 멸망하면서 여러 지방 군웅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대원제국군의 미얀마 바간 왕국 정복으로 인해 멸망당한 바간 왕국은 몰락 이후 버마 중부에는 민사잉 왕국(Myinsaing Kingdom)이 형성되어 대원제국의 미얀마 식민화에 끝까지 저항하려 하였으나 이후 핀야 왕국(Pinya Kingdom)과 사가잉 왕국(Sagaing Kingdom) 등으로 다시 분열되면서 이러한 저항들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한편 대원제국(원나라)은 자신들이 정복한 바간 지역을 직할 식민지로 전환하여 직접 식민 통치하였다. 1289년 대원제국은 동남아시아 바간 왕국의 후계자로 중추적 인물인 카시와(Kyawsa)를 왕위에 강제로 세워 후견삼아 바간 국왕의 직위를 정복하고 사신을 보내게 했다. 이를 통해 대원제국은 동남아시아 바간 왕국을 완전히 식민 지배하였음을 선언하고, 1297년에는 카시와가 대원제국에 공식으로 조공을 바침으로써 미얀마(버마) 왕국이 대원제국의 식민지임이 확인되었다.(테무르 대칸의 책봉 기록)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미얀마 파간 왕국 군사 정복 전략]
대원제국은 해양 실크로드 남단 경로 확보와 동남아시아의 남쪽 식민지화를 위해 미얀마(버마) 바간 왕국을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하였다. 13세기 초 대원제국군은 휘주(회남) 및 대리(云南)국의 현지 군벌들과 연합하여 버마 북부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고 식민지화한 후 주둔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277년 군사 원정군을 투입하여 미얀마 바간 왕국 본토를 정복했다. 이 정복전쟁은 대몽골제국의 세계 정복과 지배 전략의 일환으로,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권’을 구축한 쿠빌라이 대칸의 세계 원정들 중 하나였다.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군사 전술과 군력 활용]
대원제국군은 주로 세계 최강의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신속 기동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검보병배·공성병기·포병대를 포함한 전천후 군대로 이루어졌다. 특히 1287년 동남아시아 대공세에서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이라와디 강을 남하하여 하천을 거슬러 해군 함대로써 강습 상륙 작전을 병행하였다. 대원제국의 식민지 주둔군 다루가치 출신 겸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정복군대(征缅招讨使) 케레이트군은 칼바람과 눈이 휘날리는 대폭설 배경 아래 군함대 300여 척을 건조하여 6천여 병력의 해군들을 탑승시켰고, 중경(中慶, 쿤밍)에서 출진하여 아속족 주둔지(Ahsurian)를 거쳐 망나이둔(忙乃甸, 만달레이) 등 버마 내륙으로 진입했다.
대원제국군의 동남아시아 '아속(Asud)족 주둔지' 또는 '역참(驛站)'를 통과한 것이다. 아속(阿速, Asud)은 대원제국에 정복당한 '알란(Alan)' (현재의 러시아 남부, 조지아 인근인 캅카스 산맥 지역의 이란계 유목 민족) 출신 부대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아속점(아속족 주둔지)'는 쿤밍(중경)에서 버마(망나이둔)로 가는 원정로 상에 있던 '알란족(아속) 군대의 군사 주둔지'다.
몽골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전 세계 정복지, 식민지들에서 정복한 부대들을 그들의 원래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제국의 정반대편 국경에 배치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쿠빌라이 대칸은 이 뛰어난 전사들인 '아속' 부대를 신뢰하여 대원제국의 수도 베이징(대도)의 황제 친위대(Keshig)로 삼거나, 대원제국의 전 세계 중요 군사 거점들에 주둔시켰다. 당시 '중경'(현 쿤밍)이 있던 윈난성은 대원제국군의 동남아시아(버마, 베트남) 정복을 위한 최전선 군사 기지였다.
대원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했던 피정복민 식민지인들이 독립 운동을 일으킬 경우를 대비해, 그 식민지들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다른 식민지' 최정예 식민지 부대를 주둔시켜 통제했던 것이다. 아속(알란) 부대는 이러한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들은 이미 대원제국의 세계 최정예 식민지 부대들 중 하나로서 윈난(雲南) 지역에 상시 주둔하고 있던 주둔군이었으며, 대원제국의 동남아시아 원정에 핵심 전력으로 동원된 것이다. '아속점'은 바로 이들이 주둔하던 군사 기지(역참)였던 것이다. 이들은 용맹하여 대원제국군의 세계 최정예 식민지 부대나 친위대로 활동하며 세계 제국 곳곳의 군사 요충지에 배치되었다.
한편 미얀마(버마)측은 전쟁 코끼리 부대들을 주력으로 방어하였으나, 광활한 지형과 대원제국의 세계 최강 기병대의 기동성 앞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미얀마 파간 왕국 군사 식민 통치 체계의 구축]
대원제국(원나라)군 장창기병대가 동남아시아 미얀마를 침략하는 모습과 항복하는 미얀마 병사들 Ai 그림
대원제국이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바간 왕국을 정복한 직후에는 전통적인 몽골제국식 식민 통치 체계를 적용하여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통치하였다. 그 핵심은 '군사적 식민 통치관'이자 주둔군 대장인 다루가치(達魯花赤)와 행정관인 '총관(總管)'의 체계였다. 세계사서인『신원사』에는 1307년대(혜종) 이미 “동남아시아의 바간 등을 포함한 구역에 총관부(總管府) 및 도원수부(都元帥府) 선위사(宣慰司)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대원제국은 동남아시아 바간(邦牙) 지역에 선위사장(宣慰使) 역할을 하는 도원수(元帥)와 그의 직속 장교인 총관(總管)이 주둔하는 식민 통치기구를 설치하여 식민 총독(총관)을 파견한 것이다. 선위사는 식민 총독의 수장이며, 총관은 그 밑에서 실제 군정과 치안을 지휘한 식민 총독관이자 부관직이다.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인 대몽골제국 및 대몽골제국을 계승한 티무르 제국,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칸국, 오고타이 칸국, 대원제국들은 전 세계 식민지, 정복지들마다 군인 총독인 '다루가치'를 주둔시켜 군정 전반을 총감독하도록 했다. 다루가치는 피정복민 식민지인들을 통제하고, 주둔군 대장, 식민지 이민족 부대 병력 동원, 치안유지, 첩보 수집, 조세 징수(세금, 군마, 군견, 군용매 등등 약탈 징수)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세계사(원사) 기록에서 '다루가치'는 전 세계 식민지들의 군정을 총감독하는 군사적 권한을 보유하였으며, 전 세계 군사 거점들마다 다루가치 주둔군들은 몽골제국인(군사), 서아시아와 중동의 이슬람 및 서역계(행정) 등의 군인 관료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전 세계 식민 통치를 극도로 효율화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케레이트 군단 등은 바간 평정 사령군으로서 고려에 상시 주둔한 다루가치와 유사한 위치에 있었다.
「총관부」는 선위사 산하에 설치된 군사 기구로, 다루가치가 지휘하는 전 세계 정복지들 중에 군사적 핵심 요충지를 식민 지배하도록 한 별도의 식민 통치 부서이다. 특히 신원사에 언급된「宣慰司都元帥府并總管府」(선위사 도원수부 및 총관부)라는 기록은, 동남아시아 바간 지역이 대원제국의 식민지에서 공식으로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관할구역으로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총관부에는 몽골제국 출신의 주둔군대가 상시 주둔하였는데, 그 주둔군대들의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던 서아시아와 중동 및 서역계 관료들도 상시 주둔하고 있어 식민지들을 담당하였다.
대원제국은 동남아시아 바간(파간) 왕국의 현지 왕족을 식민 체제에 편입시켜 식민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1289년 카시와가 「묘의적국왕(缅迭的国王)」으로 임명되고 금보(金印)를 수여받은 후 아들 승하바데는「缅国世子(미얀마 왕세자)」로 책봉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대원제국 황제(대칸)이 식민지인 동남아시아 미얀맘의 카시와를 바간 국왕으로 인정하되 엄격한 조공을 강제하는 식민지 체계를 명문화한 것이다. 이후에도 바간 왕실은 전쟁 코끼리 부대(대원제국이 바간 왕국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았던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기마 보급물자, 은과 비단 등의 조공들을 대원제국에 바치며 조공 의무를 강제 이행해야 됐다.
대원제국은 동남아시아 바간에 몽골제국군을 상시 주둔시킴으로써 직접 통제망을 구축했다. 제1, 2차 미얀마 침략 후 대원제국군은 탕슝(唐嶺) 지역에 주둔군들을 주둔시켜 두었고, 『신원사』 기록에도 “동남아시아 정복 후 주둔군 500명 병병력을 남겨 파간성에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몽골제국군 기병대와 함께 다루가치 주둔군이 주둔하여 정복지, 식민지들의 반란을 감시하고 세금 및 군견이나 군마, 군용매들을 매년 징수하였다.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미얀마 정복의 국제적 영향과 식민 통치 체제]
대원제국군의 버마 정복은 아시아 동남부에 엄청난 파급력을 미쳤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 전체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대원제국군의 침략에 의해 동남아시아에서 군사력이 가장 강했던 미얀마 바간(파간)의 250년 왕국이 멸망하자, 바간의 옛 속령들은 속속 독립하거나 대원제국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되었다.
이러한 대원제국의 미얀마 바간(파간) 식민지배에 끊임없이 저항한 세력이 있으니 바로, 민사잉 왕국(Myinsaing Kingdom)이었다. 민사잉 왕국(Myinsaing Kingdom)의 세 장군의 독립 운동(1299년)으로 결국 대원제국의 주둔군들은 1303년 버마에서 철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얀마(버마) 바간(파간) 왕국에 대한 대원제국의 식민 지배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기에, 대원제국은 버마 내륙에 대한 직접적인 식민 지배에서 간접통치로 전환하면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즉, 대원제국군이 미얀마(버마)를 당장 정복한 후에는 직접 식민통치를 하며 주둔군들이 주둔하였으나, 1303년 이후 주둔군들이 철군하면서부터는 간접 식민통치로 전환했다.
이러한 대원제국의 미얀마 정복은 국제적으로는 대원제국의 해상 무역로가 확장되었고, 미얀마(버마)와 해상 무역하던 동아시아 무역 상인들의 무역망이 대원제국의 영향권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또한 이 정복 과정에서 대원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자바 섬 등 인접국에도 1280년대 초부터 해상 원정을 개시해 동남아시아의 해양 세력 균형을 재편했다. 결과적으로 대원제국의 미얀마(버마) 정복은 “세계 지배 체제” 확대로, 당시 세계사적으로 대원제국의 동남아시아 팽창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기록된다.
참고문헌: 몽골제국, 대원제국의 세계사료와 현대 연구, 원대(元代) 공식 세계사서인 '원사'와 '신원사'에는 동남아시아 군사 원정, 전 세계 식민 통치 제도(宣慰司, 總管府, 達魯花赤 등)가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의 일반 역사 사서도 1277~1289년 사이 세계 최강 대원제국의 동남아시아 바간 정복과 식민지화 과정을 개괄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 자료들을 토대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활용한 대원제국의 바간 왕국 정복 및 식민 통치 체제사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