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최강 군벌 이성계 장군의 사병군대 '가별초'의 규모 병력수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대원제국(원나라)이 고려를 식민지배한 100년간의 식민지배기 말에는 중앙군 이외에 권문세족[대원제국의 고려 식민지배기 때의 집권세력]이나 지방 호족의 친위 군벌세력들이 사병대들을 가지고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군사적 상황 속에서 대원제국군이 고려를 식민지배할 때 주둔한 주둔군인 다루가치 출신의 나하추 장군의 후계자인 군벌들 중 하나였던 함경도 동북면을 군사적 본부로 지방 호족인 동북면 군벌이었던 이성계 장군 역시 북방계 여진족 기병군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신의 사병조직(일명 가별초)을 거느렸다. 가별초는 당시 고려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군대였으며, 잘 훈련된 최정예 중무장 기병부대로, 이성계 장군의 선친인 이안사 장군 때부터 혹독한 군대 훈련을 거쳐 뛰어난 조직력을 갖추게 된 최정예 기병 군대였다.
위화도(威化島, 평안북도 신의주 인근)는 압록강 하류의 하중도(河中島)로, 1388년(우왕 14) 이성계의 회군이 발발했던 전적지다. 고려사에 따르면 위화도 회군 소식을 접한 동북면 군벌인 북방계 여진족 출신의 기병군단 약 1,000여 명 병력이 이성계 장군의 기병군단인 '가별초'에 합류했다. 위화도는 충적토의 영지였는데, 당시에도 강철 무기·비단 등 귀중품을 생산하여 고려 조정에 납부하던 곳이었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이성계 장군은 '가별초'를 이끌고 개성으로 빠르게 진군하였고, 이후 조선 개국의 기반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고려시대 말기 홍건적 격퇴전(이른바 ‘박의 장군의 군사 반란’ 진압) 때, 고려사에 “군왕의 명을 받고 금오위상장군 이성계 장군 사병 1,500명 병력을 이끌고 나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진압 작전에서 박의 장군의 군단은 강계 지역으로 도주했으나, 이성계 장군은 휘하 사병대 '가별초'를 동원하여 박의 장군과 그 군단들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개경 탈환 전투(홍건적 2차 침공) 때에는 이성계 장군 휘하의 '가별초'의 규모가 더욱 강화하여 “약 2,000명 병력”까지 강화됐다고 전술했다. 이 전쟁에서 이성계 장군은 자신의 가별초 2,000여 명 병력을 선봉대에 배치하여 성을 먼저 선제공격함으로써 적군들을 사살하고 대승전을 가져왔다.
1388년(우왕 14년, 위화도 회군 발발년도): 위화도 회군 발발 당시에는 동북면 군벌이었던 여진족 출신의 1,000여 명 병력의 기병군단들이 이성계 장군의 가별초에 자발적으로 합류하였다. 이들은 여진족 기병군간들은 이후 개성을 함락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 임무를 수행했다.
이성계 장군의 사병대 '가별초'는 주로 동북면 군벌 출신의 군벌들과 북방 여진족 기병군단들로 구성되었다. 고려사에 “동북면 군벌들과 북방계 여진족 기병군단들 중 평소 종군하지 않았던 자들이…1,000여 명 병력”이 합류했었다고 한 기록은, 이성계 장군의 사병대 '가별초'에 북방 여진족 출신의 군단들도 상당수 합류했음을 보여준다. 조영규(趙英珪) 장군 전기에도 “이성계 장군의 사병대로 시작하여…”라는 언급이 있어, 일반 평민 출신까지 광범위하게 충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병대들은 고려를 100년간 식민지배했던 세계 최강대국 대원제국식의 기병전술과 강철갑옷·복합궁·환도·장창 등의 기병용 중무장들을 갖춘 기병대 군단으로, 산악 기동전에도 능한 여진족 특유의 기마전술들을 혹독하고 철저히 훈련하여 단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 장군의 사병대는 필요시 선봉대 또는 후위 지원 병력대로도 투입되었다. 예를 들어 홍건적 저지 작전에서는 이성계 장군이 가별초 2,000명 병력을 앞세워 공격함으로써 다른 고려군의 군기를 강화했다. 이처럼 이성계 장군은 공격적이고 기동적인 역할에 주로 나섰으며, 이성계 장군이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거나 군사 쿠데타에 대한 진압 작전을 수행할 때 핵심 전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