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제국 대원제국의 주달관의 크메르 제국 모험기

대원제국의 대모험가, 주달관의 크메르 제국 대모험기 '진랍풍토기' 요약본

by 전쟁의 세계사




《세계 최강의 패권제국'대원제국(원나라)'의 세계 대모험가, '주달관'과 그의 임무》


몽골제국군의 크메르제국 침략.jpg 세계 최강의 군대인 대원제국의 기병대가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는 장면 Ai그림


13세기 말, 세계 역사상 최강의 군사력을 앞세워서 전 세계를 정복한 '대원제국(大元帝國)'은 명실상부한 세계 군사 패권제국으로 군림하면서 전 세계의 군사적 패권 지배자인 '쿠빌라이 대칸(원 세조)'의 전 세계 통치하에 대원제국은 몇몇 미정복 지역에 대한 군사적 압박과 조공 책봉 체제를 통한 '대원제국이 구축한 세계 질서'의 편입을 동시에 강요했다.


이러한 대원제국의 세계 최강의 압도적인 군사적 영향력 하에, 동남아시아의 맹주였던 크메르 제국(한자어로는 '진랍'. 캄보디아의 최전성기 문명으로, 이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폴 포트ប៉ុល ពត가 내건 것이 크메르 루주ខ្មែរក្រហម다.) 역시 대원제국의 군사적 압박과 외교적 압박에 굴복하여 사실상의 대원제국의 식민지(속국屬國) 지위를 받아들였다.


1285년, 대원제국의 군사적 압박(베트남 원정의 여파)에 직면한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8세는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원제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참고로 전통적인 고대 중국의 조공 체제와 대원제국의 조공 체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고대 중국의 조공 체제는 동아시아의 외교 질서에 가깝다면, 대원제국[원나라]의 조공 체제는 말그대로 식민지 수탈 체제였다. 대표적 예 : 고려가 대원제국에 강제로 상납해야 됐던 군마와 군용매들이 있다.)'을 바치며 복속을 표하는 굴욕과 치욕을 감수해야만 됐다.


주달관.jpg 대원제국의 세계적인 대모험가인 '주달관(周達觀)'


바로 그 시대 때 활동했던 세계적인 대모험가인 '주달관(周達觀)'은 바로 이 세계 패권제국 대원제국 출신의 대모험가로서, 1296년 세계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제2대 대제(대황제) 성종(成宗) 테무르(鐵穆耳) 대칸의 황명을 하달받아 크메르 제국(진랍)에 침투한 공식 사신단이자 대모험가의 일원으로 앙코르에 입성했다.


그는 1296년 8월 앙코르에 입성해 1297년 7월까지 약 1년간 머물며 『진랍풍토기』(The Customs of Cambodia)를 기술하였다.


주달관의 공식 임무는 크메르 문명이 대원제국에 조공을 바치기로 한 당시 '크메르의 신왕(인드라바르만 3세)'을 공식 허락 책봉하고, 대원제국의 군사적 위엄을 동남아시아 전역에까지 과시하며, 대원제국의 사실상 식민지인 '동남아시아 크메르 제국의 군사, 무기, 약점, 지리 같은 지정학, 기후, 지도, 종교, 사상, 동물, 문화 등등의 실태 정보들을 완전히 파악하고 대원제국의 대칸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서문


그렇기에 주달관의 진정한 세계사적 위업은 그가 단순한 공식 사신단(외교관) 및 간첩단의 수장임을 초월해, 대원제국의 '눈'과 '귀'로서 크메르 문명의 모든 정보들을 날카롭고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수집하여 세계적인 대모험기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기술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주달관의 세계사적 대기록인 '진랍풍토기'는 크메르 제국에 관한 유일한 1차 세계사 자료로서, 동남아시아의 앙코르 문명 연구의 가장 체계적인 기본 세계사적 사료이기도 하다.


이 세계적인 대모험기는 세계 군사 패권제국이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식민지(속국)를 어떻게 관찰하고 평가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는 완벽한 제1차 사료이며, 특히 크메르 문명의 군사적 약점, 군사 전략적 가치, 군사 요충지로서의 가치 등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한 핵심 첩보 자료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하다.


즉, 대원제국이 크메르 문명을 사실상 식민지처럼 지배하고 있었지만, 만약 크메르 문명이 독립 반란을 일으킬 경우 신속한 진압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압군이 출동하려면 습하고 무더우며 울창한 동남아시아의 열대 정글로 침투해야 됐고, 당시 '동남아시아'는 세계에서 동떨어진 열대 지역이라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에 이 기회에 동남아시아에 대해 확실히 기록해 둠으로써, 향후 크메르 문명이 독립운동을 일으켰을 경우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현지의 모든 지리, 지도, 기후까지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성이 있던 것이었다.


본고는 대원제국의 세계적인 대모험가인 '주달관'이 기술한 《진랍풍토기》의 기록들을 토대로, 크메르 문명의 모든 군사, 지정학, 사회, 문화, 그리고 그 명백한 '약점'과 '특이성' 등등등을 각 분야별로 대표적인 내용들을 심층적으로 썼다.


《제1부: 세계 최강의 군사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군사적 시선으로 본 크메르 문명》


대몽골제국군의 크메르 제국 침략기.jpg 세계 최강의 군대인 대원제국의 기병대가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는 장면


대원제국은 세계 인류 역사상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제국으로, 세계에서 가장 고도화된 군사 기계(Military Machine)들을 운용했다. 특히나 '세계 최강의 몽골군 기병대의 기동력, 기병력, 군사 전술들, 강철 무기들, 첩보기술, 군대 훈련, 소년병, 군마와 군견과 군용매, 몽골제국군 예하의 튀르크족 기병대, 공성전 능력, 포병 기술, 그리고 몽골제국군이 정복한 전 세계 모든 피정복민들로 구성된 보병 부대의 운용은 당대 세계 최강'이었다.


이러한 대원제국 출신의 주달관의 시각에 비친 동남아시아의 크메르 제국의 군사력은 그야말로 매우 원시적이고 조악한 수준으로 평가되었다.


1. 크메르 제국의 군사력과 무장 수준: '원시적' 수준의 군대


진랍풍토기에서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 군대의 장비의 무장 상태와 전투방식 등을 매우 자세히 적어놓으며 낮게 평가했다. 이는 대원제국이 보유한 세계 최강의 강철 중갑기병대의 무장 수준 및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강철 무기 체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2. 주요 무기(무기, 갑옷, 투구): 크메르 제국 병사들의 주무기는 '창(槍)'과 '방패(盾)'였다. 이를 자세하게 파악한 주달관은 "그들(크메르 제국의 병사들)은 오직 갑옷과 신발도 없이 맨몸과 맨발로 싸우며, 오른손에 창을, 왼손에 방패만을 들고 싸울 뿐, 활이나 투석기, 갑옷, 투구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기록하며 크메르 문명을 매우 원시적인 문명이라고 비판했다.


즉, 크메르 문명의 보병은 당시 동남아시아 대부분 왕국의 전통적인 무장 상태와 비슷했다. 모자, 갑옷, 투구, 신발 없이 오직 창과 방패만 든 원시적인 크메르 문명의 싸움 방식은 화살이나 포탄의 위협이 적은 정글 지형 등과는 부합하지만, 막강한 전력을 낼 수 있는 활과 같은 무기는 부재했다.


크메르 제국의 가장 치명적인 군사적 약점은 '궁시(弓矢, 활과 화살)의 부재'였다. 이에 주달관은 "크메르 제국에는 강력한 활과 화살이 없으며, 노(弩, 석궁石弓)도 없다"고 명시했다. 이는 기병궁술을 기반으로 전 세계를 정복한 대몽골제국을 계승한 대원제국 출신의 관점에서 볼 때, 크메르 제국의 군대는 원거리 교전 능력이 전무한 '보병 표적'에 불과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점은 크메르 제국의 병사들은 갑옷(甲)과 투구(冑) 역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달관은 크메르 제국의 병사들이 기본적으로 나체(裸體)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투에 임한다고 기록하며 비판했다. 이는 "몸(크메르 제국 병사)에는 갑옷이나 투구 같은 것을 걸치지 않는다"는 진랍풍토기의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일부 크메르 제국 왕의 친위대나 코끼리 부대 정도만이 최소한의 보호구를 갖추었을 뿐, 주력 보병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또한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의 왕궁 행렬에서 “창과 방패를 든 왕궁 여인들”이 국왕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즉 국왕과 고위 관료들은 대부분 코끼리 등 위를 타고 이동했고, 왕궁 여성들로 구성된 경호부대도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처럼 크메르 문명의 군대는 왕궁 병력에 여성 인력까지 혼합되어 있었다. 만일 시암(태국) 연합군의 침입이 있을 경우, 국왕은 비전투 여성까지 동원했는데 이를 자세하게 관찰한 주달관은 “시암이 공격해 오자, 크메르 제국의 일반 여성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서 싸웠다”고 언급하여 대단히 신기해하며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암시한 듯 기록했다.


이는 오로지 전문 군인들은 직업군인으로서 정복전쟁만을 수행하고, 일반 백성들은 오로지 생업에 종사하여 전문 군인들이 정복전쟁을 할 때 필요한 군사비를 지출하는 등 굉장히 체계적으로 직업군인과 일반 백성의 경계가 엄격하고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대원제국 출신의 주달관으로서는, 여성들이 주로 싸우는 크메르 문명의 문화가 굉장히 이국적이고 신기했던 것이다.


3. 군사 전술: 그들(크메르 제국)의 전술은 전술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고도로 조직화된 대형이나 유기적인 병종 협동이 아닌, 개별 병사들의 사기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싸움법에 가까웠다.


이는 세계 최강의 철두철미한 기동전, 기동타격전, 포위전술, 포위섬멸전, 심리전술을 구사했던 대원제국에서 온 주달관이 봤을 때, 크메르 제국의 군사 전술은 '전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전쟁 코끼리 부대: 대원제국이 약탈했던 크메르 제국의 전쟁 코끼리 부대들》


대원제국의 제2대 대칸이었던 테무르 대칸이 주달관을 크메르 제국에 침투시킨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자, 대원제국의 테무르 대칸이 크메르 제국에게서 가장 약탈하고 싶었던 1순위인 '전쟁 코끼리(戰象) 부대'는 크메르 제국의 군대가 보유한 가장 견고(堅固)한 '방어 수단'이었다.


크메르.jpg 당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한 문명이었던 크메르 문명


1280년대 세계 최강의 제국인 대원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협에 직면한 크메르 제국의 제8대 왕 자야바르만 8세는 대원제국에게 복종하기 위해 1285년부터 대원제국에 전쟁 코끼리 부대들을 조공으로 바쳤다. 이는 “1283년 몽골군의 침략 위협을 받은 크메르 문명은 1285년부터 대원제국에 조공을 바쳐 멸망 위기를 회피했다”는 식으로 기록된다. 당시 크메르 제국은 대원제국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전락하는 국가적 대위기는 가까스로 모면했으나, 대원제국의 군사적 세계 패권 앞에 복종하여 간접적인 식민지에 준하는 종속적 식민 조공 체제를 받아들여 영향력에 강제 편입된 것이다.


주달관은 크메르 제국이 약 20만 마리의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기록했다.(이는 약간의 과장일 수 있으나, 그만큼 코끼리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전쟁 시, 주로 코끼리 부대들은 가벼운 갑옷만을 입고, 등에는 '나무로 만든 탑(코끼리용 안장)'을 얹었으며, 그 위에 병사들이 탑승하여 투창으로 무장했다.


코끼리의 상아 끝에는 쇠를 박아 살상력이 있었다. 이 코끼리 부대는 동남아시아의 밀림 지형에서 보병 부대를 와해시키고 적진을 교란하는 데 효과 있는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라고 주달관은 기록했다.


즉, 13세기 말까지 동남아시아의 크메르 제국의 국방력은 전통적으로 보병, 코끼리병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전통적으로는 코끼리 부대(戰象軍團)를 동원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진랍풍토기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세계사적 사료들을 살펴보면 동남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은 크메르 문명뿐 아니라 미얀마나 베트남, 태국에서도 고대부터 전쟁 코끼리 부대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실제로 세계사 기록에서 "세계 최강 몽골제국군은 13세기에 호라즘 제국, 동남아의 버마, 베트남 등지를 침략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에서 정복 대상국가의 전쟁 코끼리 부대들과 맞닥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전쟁 코끼리 부대는 당시 크메르 병종의 핵심 전력으로, 코끼리 등위에 투창을 든 보병 등을 태워 적 진영으로 가서 두려움을 조성했다. 특히 앙코르 시대의 동남아 병사들은 코끼리 머리 위에 이중 투창을 쓰는 방법도 사용했을 만큼 코끼리 전력이 주로 발달했다.


이에 대한 모든 군사 기밀들을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대원제국의 테무르 대칸에게 보고한 주달관의 관찰 기록에서도 코끼리는 크메르 문명의 중요한 상징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주달관은 크메르 왕이 군대의 사열을 마치고 귀환할 때 코끼리를 타고 황금으로 장식된 검을 들고 등장하는 장면 역시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진랍풍토기'에 기록하여 테무르 대칸에게 보고했다.


당시 세계 최강의 패권제국이었던 대원제국은 북방 유목제국의 특성상 기병전의 세계 최강국이었으나 동남아시아의 열대 정글 및 습지 지형에서는 기병대 운용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이미 대원제국의 제2대 대칸인 테무르 대칸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원제국은 남방 정복전쟁(베트남, 참파, 미얀마 등)에 투입할 군사적 전략 자산으로서 크메르 제국의 전쟁 코끼리에 주목했다. 테무르 대칸이 주달관을 크메르 제국에 침투시킨 가장 강력한 이유 또한 그 전략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주달관의 파견 이전부터 대원제국은 크메르 제국에 코끼리를 조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했다. 크메르 제국이 대원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주요 요인들 중 하나도 바로 이 전쟁 코끼리 부대들을 차지하기 위한 대원제국 테무르 대칸의 군사적 목적과 그에 대한 크메르 제국에 대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식민 조공 수탈과 군사적 압박 때문이었다.


주달관의 보고는 이 코끼리 부대의 실태와 규모, 전술적 가치를 파악하여, 향후 대원제국이 이 전략 자산인 전쟁 코끼리 부대들을 얼마나 징수하고 활용할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첩보 자료가 되었다. 크메르 제국의 전쟁 코끼리 부대는 대원제국의 남방 군사 전략에 편입될 '군수품' 목록 1순위였던 것이다.


《제2부: 동남아시아 크메르 문명의 지정학, 지리, 기후 및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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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의 수도(야소다라푸라, 앙코르)에 1년 가까이 머물며, 이 문명의 지리적 환경, 기후, 그리고 여기서 파생되는 문명적 '약점'들을 체계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했다.


1. 지리 및 지정학: 고립된 동남아의 분지(盆地) 문명


지리적 특성상 앙코르 지역은 오늘날 중국인이 만든 초국경적 폭력조직으로 악명 높은 '캄보디아'의 톤레삽(Tonle Sap, 똔레삽) 호수와 쿨렌(Kulen) 산지 사이에 위치했다. 크메르 문명의 중심지는 톤레삽(Tonlé Sap) 호수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충적 평야였다. 이 평야는 사방이 거대한 산맥과 열대 밀림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 형태를 띠고 있다.


주달관은 이를 지정학적 위치로 더 자세히 관찰하여 기록했는데, 당시 크메르 문명의 북쪽으로는 란나(태국 북부), 동쪽으로는 참파(베트남 중부), 서쪽으로는 시암(태국 중부)과 접하고 있었다고 썼다.


주달관이 방문했을 1296년 당시 땐, 크메르 문명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특히 대원제국이 중국 대륙의 최남단까지 전부 정복하자 그곳에 거주하던 세력들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피난하면서 서쪽의 시암(Siam, 타이족) 세력이 강력하게 대두하며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었다. 주달관은 이러한 나비효과 현상을 "시암과의 전쟁으로 인해 국가(크메르 문명)가 황폐해졌다"고 기록했다.


2. 기후: 문명을 규정하는 '열기'


대원제국의 대모험가인 주달관과 허리에 검을 찬 군인 사신단들이 크메르 문명에 입성한 시기 때에도 이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은 계절풍(몬순)의 영향을 받는 열대 몬순 기후였다. 남서 계절풍이 5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강우를 몰고 와 연중 강수량의 약 75%를 집중적으로 내리고,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북동 계절풍으로 건조기에 접어들었다. 연평균 기온은 1월 최저 28℃, 4월 최고 35℃ 내외로 높고 매우 습했다.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는 톤레삽의 수위 변화로 이어지는데, 매년 6월경 메콩강의 흐름이 거꾸로 흘러 호수를 넘치게 하면서 인근 논밭을 대규모로 범람시킨다.


주달관도 메콩강의 이러한 역류 현상들을 ‘우기가 되어 강물이 호수 쪽으로 거슬러 흐른다’고 진랍풍토기에 기술하였으며, 크메르인들은 이를 이용해 넓은 관개 시스템과 거대한 저수지를 건설하여 풍요로운 농업 시스템을 영위했다. 이러한 환경적 특성은 크메르 문명의 발전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앙코르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수도 유적이며, 사원과 인공 저수지들이 물길과 통합된 거대한 도시 구조를 보여준다.


주달관은 이런 동남아시아의 크메르 문명의 기후를 "오직 덥기만 하다(常熱)"고 요약 비판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1년을 우기(5월~10월)와 건기(11월~4월)로 나누어 진랍풍토기에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 덥고 습한 열대 기후는 크메르 문명의 거의 모든 측면(의복, 건축, 생활 습관, 심지어 군사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크메르 문명 병사들이 모자, 신발, 갑옷을 입지 않는 이유도 이 '열기' 때문이었고, 크메르인들이 하루에 몇 번씩 목욕을 하는 습관도 바로 이 열대 기후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는 크메르 문명만의 특성은 아니었고, 남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오세아니아 같은 습하고 무더운 남반구 열대 지역들 위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었다.


3. 문명적 약점: 세계 패권제국의 시각


세계 패권제국인 대원제국의 시각, 관점에서 본 동남아시아의 크메르 제국은 그야말로 명백한 군사적, 사회적 약점들을 노출하고 있었던 원시적인 문명 그 자체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크메르 문명에서 궁시와 모자, 신발, 갑옷의 부재는 치명적인 군사 기술의 낙후로 이어졌다. 이는 크메르 문명이 독자적인 군사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인도에서 전래된 코끼리 병종에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크메르 제국은 이미 '시암(타이족)'의 지속적인 침입, 위협, 약탈로 국력이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처음에 타이족은 크메르 제국보다 강하진 않았는데 대원제국이 중국 대륙의 최남부까지 정복해버리자 이에 인도차이나 반도로 피난한 타이족들의 세력이 급성장하면서 크메르 제국을 잠식해 버린 것이다. 주달관은 이 점을 정확히 간파했다. 이는 대원제국이 크메르 제국을 직접 정복할 필요 없이, 시암과의 갈등을 이용하거나 최소한의 압력만으로도 쉽게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크메르 문명은 경제적 취약성도 있었다. 경제는 톤레삽 호수의 수위에 의존하는 벼농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는데, 이는 기후 변화나 재해에 매우 취약한 구조였다. 그렇기에 크메르 문명은 동시대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는 농업이 크게 발전하진 못했다. 물론 당연히 동북아시아의 고려 같은 추운 국가보다는 훨씬 농사가 잘 되긴 했다.


그리고 크메르 문명의 약점으로는 느슨한 사회 통제도 한몫했다. 주달관이 묘사한 크메르 사회는, 세계 최강의 대원제국의 엄격한 군법, 사법, 형법 등의 법치 체계와 비교할 때, 당연히 형벌이나 분쟁 해결 방식이 굉장히 주술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제3부: 크메르 문명의 인종, 동물, 종교 및 왕실》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을 구성하는 인종, 민족, 자연, 사상에 대해서도 세밀한 관찰을 남겼다.


1. 크메르인의 인종과 민족: '미개인'의 모습


주달관은 비록 세계 패권국 대원제국 출신의 대모험가였긴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혈통상 중국 한족이었기 때문에 중화사상적 시각에서 크메르인들을 관찰했다.


주달관은 동남아의 크메르인들을 "추하고 검다(醜黑)"고 기록했다. 또한 남녀 모두 상반신을 노출(袒裼)하고 맨발로 다닌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 사회가 왕실, 관료, 일반 평민 외에도 '노비(奴婢)'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노비들은 주로 주변의 '산야(山野)의 만족(蠻族)', 즉 소수 산악 민족(미개인)을 잡아와 노예로 삼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당시 세계적인 문명인인 중국 한족의 전형적인 이민족관을 보여주며, 크메르인들 역시 매우 '미개한' 민족으로 차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물과 자원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에 코끼리 외에도 코뿔소, 호랑이, 표범 등 맹수가 많다고 기록했다. 또한 공작, 앵무새, 물총새 등 희귀한 조류와 향신료(후추), 상아, 코뿔소 뿔 등 대원제국이 탐낼 만한 진기한 물산(物産)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는 크메르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첩보 자료였다.


3. 크메르 문명의 종교와 사상: 힌두교에서 불교로의 이행


주달관이 크메르 문명에 입성했을 때, 크메르 제국의 종교는 기존의 힌두교(브라만교) 중심에서 상좌부 불교(소승 불교)로 급격히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이에 대해 주달관은 크메르의 힌두교 사제인 '파해(婆奚)'와 불교 승려인 '추고(雛姑)'를 구분하여 설명했다. 특히 크메르 문명 사회에서 불교 승려 '추고'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으며, 그들이 교육을 담당하고 국왕의 자문 역할까지 한다고 기록했다. 이는 당시 인도의 문화를 절대적으로 많이 받았던 크메르 문명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대체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 크메르 문명의 왕실: 신권(神權)적 지도자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의 국왕(인드라바르만 3세)의 화려한 행차를 상세히 묘사했다. 우선 국왕은 황금으로 장식된 코끼리나 마차를 타고, 수많은 시녀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했다. 그리고 국왕은 '신성한 황금의 검(聖劍)'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크메르 왕권의 신성함을 상징했다.


크메르 제국의 궁전은 황금으로 건설한 탑과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앙코르 톰의 바이욘 사원이나 왕궁 내부를 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왕실의 권력은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지만, 주달관의 날카롭고 예리한 눈에는 이러한 사치가 과도하며 실질적인 국력(군사력)과는 무관한 '겉치레'로 비쳤을 수 있다.


주달관은 앙코르 성 안의 정치, 사회 체계도 매우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크메르 제국의 국왕이 엄청난 규모의 하렘을 두었다고 전한다. 크메르 제국의 국왕은 정실 부인 5명(동서남북 사방 각 1명, 정1명)들을 거느렸으며(보통 아무리 처첩제를 시행하는 국가라도 정실 부인은 1명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크메르 제국의 경우는 정실 부인부터 이미 5명 이상이었으니 어마어마한 셈), 그 아래에 수천 명의 후궁과 궁녀(乃賓)들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진랍풍토기』에 따르면 크메르 제국의 국왕의 부인과 후궁들이 4,000~5,000명에 달할 정도였으며, 이들은 계급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크메르 제국 국왕은 전날 결혼하여 첫날밤부터 “1,000명~10,000명의 남편을 차지”하라는 부모 기원을 받는 등, 가부장적이면서도 다처제적 결혼 관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한 크메르 제국의 결혼 시스템에 대해 주달관은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예를 들어 크메르 제국에서는 출산 직후에 곧바로 관계에 들어가는 풍습, 여성의 조속한 노화 현상 등도 언급하면서 이를 대단히 비판했다.


종교적으로 크메르 제국은 힌두교와 불교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의 신앙을 가졌다. 기본적으로 왕실은 절대 군주이자 데바라자(신왕) 신앙 아래 부처와 시바 신을 아우르는 종교 의식을 주관했다. 특히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 이후 크메르 문명은 대개 불교(반야담마파, 후에 소승불교)가 국교로 자리잡았는데,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 사람들은 모두 불교를 신앙한다”고 기록했다.


또한 한편에는 인도 힌두교의 시바 신을 숭배하는 브라만 사제도 공존했다. 연구에 따르면 앙코르 왕국에서는 불교 승려, 브라만 사제, 시바교도(아류다와 술람반타라) 등 여러 종교들의 성직자들이 공존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믿음이 공존했던 것은 고대 동남아 특유의 전통이다. 특히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 왕궁의 제사와 의례 광경을 관찰하며, 힌두교, 불교 축제와 쌀을 신께 바치는 풍습 등도 빠짐없이 적어 두었다.


이처럼 지금까지 보면 알 수 있듯이, 주달관의 기록인 '진랍풍토기'는 분명 당시 동남아시아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세계사적 자료이지만, 동시에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 한족들의 중화주의적 시각이 반영되어 크메르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가까운 비하, 차별, 혐오와 경멸적 표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는 크메르인을 가리켜 ‘남쪽 미개인’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외모와 풍속을 굉장히 비하했다.


실제로 기록에서 주달관은 “남쪽 미개인(크메르인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인종들)들은 유일한 특징이 거칠고 못생기고 피부색이 매우 검다(粗惡黑)”고 서술하고 있어, 외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굉장히 비하했다. 그러면서 이런 표현이 비단 크메르 제국의 왕궁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피부 색깔이 하얀 색이었던 중국 한족의 기준으로 볼 때, 피부가 검고 거친 동남아시아의 풍습을 ‘미개(未開)’의 상징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완벽한 인종주의이자 인종, 민족 간의 우열을 나눴던 파시즘적인 우생학이자 인종차별적이지만, 당시 중국 한족 중심의 시각과 편견이 반영된 점임을 감안해야 된다. 예컨대 그는 동남아시아의 여성들이 무리 지어 생활하고, 전통적 의례가 낯설다며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이 크메르 문명은 미개인의 국가이긴 해도 그들에게도 절대 군주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나 인정한다”는 말로 자신들의 규율성은 인정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고대, 중세 중국 한족의 중화주의는 19세기에 만연했던 서구의 인종주의보다 훨씬 앞섰던 고대, 중세의 인종주의였던 셈이다.


《제4부: 대원제국의 대모험가의 눈에 비친 '미개 문명'의 특이점》


주달관이 크메르 문명을 '미개하다'고 판단한 결정적인 근거는 그가 목격한 기이한 풍속과 비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이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최고로 발전한 군법과 제국 체제를 갖춘 대원제국 출신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1. 동남아 크메르 문명의 기이한 풍속(이상한 점, 특이점)들


주달관이 본 가장 충격적인 풍경은 동남아시아의 열대 기후 탓이라곤 하지만, 바로 크메르 문명에서는 남녀노소 상반신 노출을 하며 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이었다. 남녀노소가 상반신 노출을 한다는 개념 자체를 아예 몰랐던 주달관의 입장으로서는 크메르 문명의 이런 노출은 엄청나게 충격이었던 듯하다. 이에 대한 충격이 '진랍풍토기'에 꽤나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혹한을 지닌 북반구의 세계제국이었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전신을 몇 겹씩 두껍게 의복들로 껴입고 꽁꽁 싸맸던 대원제국 출신의 대모험가의 시각에서 볼 때, 크메르 문명의 이런 풍속은 짐승과 다름없는 매우 '미개한' 풍속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의 어린 소녀들이 7세에서 11세 사이에 겪어야 됐던 진조(鎮祧)라는 통과 의례에 대해서도 굉장히 비판했다. 이 크메르 문명의 통과 의례는 승려(혹은 특정 남성)에게 처녀성을 바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이 의식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으며 부모들은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주달관에게 가장 충격적인 문화충격이자 '크메르 문명의 음란한(淫)' 풍속으로 비쳤다.


게다가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의 사람들은 매우 빈번하게 목욕을 했다고 적었다. 워낙 무더운 열대 기후 탓에 크메르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강이나 연못에서 집단으로 목욕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위생적일 수는 있으나, 남녀가 뒤섞여 목욕을 했기에 이를 우연히 본 주달관은 '매우 미개하다'고 비판했다.


2. 크메르 문명의 비합리적인 법적 분쟁, 사회 시스템과 약점


주달관은 크메르 문명에서는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분쟁할 때, 왕궁 앞 광장에 있는 12개의 돌탑 앞에서 각자 맹세를 하고 며칠을 기다려 병이 나는 쪽이 패소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런 '신명 재판(神明裁判)' 또는 '시죄법(試罪法)'의 시행으로 크메르에서는 민사 소송이나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합리적인 증거나 변론 대신 '시련(Trial by ordeal)'을 통해 유무죄를 가렸던 것이다.


또한, 끓는 기름에 손을 넣거나(熱油探手), 물속에 잠수하여(水底撈物) 오래 버티는 쪽이 법적으로 승리하는 크메르 문명의 법률 분쟁 시스템도 목격했다. 이러한 아주 비합리적인 재판 방식은, 대원제국의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군법(자사크)와 체계적인 법전(원전장) 등의 군법 행정 시스템에 익숙한 주달관에게 크메르 문명 사회는 아직 '제국'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3. 기타 특이점들


문자: 크메르인들은 고유의 문자(크메르 문자)를 사용했으나, 주달관은 "그들의 문자는 매우 기괴하다"고만 짧게 언급했다.


상업: 시장이 존재하고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크메르 문명은 화폐 대신 쌀이나 직물 등의 현물 교환이 주를 이루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세계의 기축통화인 '교초'를 발행한 대원제국 출신의 주달관으로서는 크메르 문명의 이런 점은 대단히 이해하지 못할 광경이었다.


위생 관념: 크메르 문명은 남녀노소 목욕은 자주 했으나, 배설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식수 관리는 매우 비위생적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패권제국 대원제국의 첩보 보고서로서의 '진랍풍토기'》


주달관의 《진랍풍토기》는 단순한 모험기나 탐험기가 아니다. 이는 세계 군사 패권제국인 대원제국(원나라)이 자신의 속국인 크메르 제국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첩보원이 작성한 고급 군사 기밀 및 전략 보고서(Strategic Intelligence Report)였다. 이는 대원제국의 세계 전략과 동남아시아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수행된 첩보 및 실태 조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보고서를 통해 대원제국의 테무르 대칸은 다음과 같은 크메르 제국에 대한 핵심 정보들을 완벽히 수집, 확보했다.


군사적 무가치성: 크메르 제국은 '전쟁 코끼리 부대'를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약소국'임을 확인했습니다. 크메르 문명은 활과 모자, 신발, 갑옷도 없는 원시적인 군대였다.


전략 자산(전쟁 코끼리 부대)의 확인: 대원제국이 가장 강하게 탐내던 전쟁 코끼리 부대의 실존과 규모를 가장 체계적으로 확인했다. 이는 향후 대원제국이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이 전략 자산인 전쟁 코끼리 부대들을 강제로 징수하거나 조공으로 강요할 때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었다.


내부적 취약성: 크메르 제국은 이미 시암(태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매우 쇠퇴하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도 비합리적인 사회 시스템(신명 재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통치의 용이성: 크메르 문명의 왕실은 겉치레만 화려할뿐 실속이 없으며, 백성들은 '미개한' 풍속에 젖어 있었다. 이는 대원제국이 이 인도차이나 반도 지역을 직접 식민 통치할 필요 없이, 최소한의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압력만으로도 쉽게 통제 가능한 속국으로 둘 수 있음을 시사했다.


결국, 세계 군사 패권 제국인 대원제국(원나라)의 시각에서 주달관(周達觀)이 관찰한 크메르 문명(진랍, 眞臘)에 대해, 군사, 정치, 지정학, 문화, 약점 등등등 모든 측면들을 총망라하여 첩보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주달관의 이러한 날카롭고 뛰어난 관찰력은 크메르 문명의 찬란한 유산(앙코르 와트 등)을 기록하는 목적보다는, 대원제국의 세계 패권 전략의 관점에서 그들(크메르 문명)의 '약점', '미개함', 그리고 '이용 가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대원제국'이 어떻게 자신들의 세계 패권 하에 있는 세계를 인식하고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생생하고도 냉혹한 역사적 기록이다.


물론 크메르 제국은 세계 최강의 패권제국인 대원제국의 속국으로 분류되었으나, 대원제국이 미얀마 바간 왕국을 완전히 정복, 식민지배한 것과는 달리 크메르 제국에 대해서는 행정적으로 까지는 식민지배하지 않고 왕권을 살려뒀다. 주달관은 진랍풍토기 말미에 “이 국가(크메르 제국)을 개척한 것은 여러 민족의 전통이 뒤섞인 결과”라며 상대주의적 관찰을 남겼다.


주달관의 대모험으로 인해 기술된 『진랍풍토기』는 13세기 말 동남아시아와 크메르 제국의 군사, 종교, 사상, 사회, 지리, 지정학, 동물, 기후 등등등의 사회 전반에 걸친 모든 모습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대원제국의 세계적 대모험가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


참고문헌: 주달관, 『진랍풍토기』; Morris Rossabi, From Yuan to Modern China and Mongolia; Charles Higham, The Civilization of Angkor; Encyclopaedia Britannica, “Cambodia”; Wikipedia 등. (본문의 인용은 모두 위의 연결된 출처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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