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상)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삼수생에게도 봄은 역시 봄이었다. 공고를 졸업해 전철타고 대학을 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간직한 채 시작한 재수는 전 수능 점수보다 10점이 오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만들며 대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나는 반드시 대학을 가야한다는 종교적 광신에 가까운 마음으로 삼수를 시작을 결심하고 학원을 들어가기 전에 왜 내가 재수에 실패를 했는지 곰곰히 분석을 했다.
그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삼수 생활의 교리를 만들어 냈다.
첫째, 학원에 가서는 아무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으며, 밥도 혼자 먹으며 고독의 벗으로 공부에 매진한다.
둘째, 공부 집중을 위해 사람들과 대화를 단절하기 위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 가까이 사귀면 좋을 것 없는 날라리의 이미지를 풍긴다.
셋째, 부모님의 죽음, 천재지변, 자신의 죽음 이 세 가지 절대 조건 없이는 학원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다.
난 이 교리를 가슴에 품은 채 삼수 생활을 시작했다.
N시에 위치한 삼수 학원은 아침 9시에 시작해 오후 2시까지는 전 과목을 월부터 토요일까지 일정에 맞쳐 수업을 했고 밤 10시까지는 개인 자율학습의 시간을 주었다. 학원은 총 세 분류로 나누어 반을 구성했다. 작년 수능 점수에 맞추어 저급반, 중간반, 우수반이었다.
저급반은 학생 본인도 의욕이 없고, 부모님이 보내니 그냥 시간 때우러 학원을 오는 학생이 대부분 이었고, 더욱이 학원 역시 그들에게는 돈만 받으면 되기에 수업을 듣던, 공부를 하던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수반의 학생들로 그들이 어느 대학을 가냐에 따라 학원의 평판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기에 그들에게만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나는 당연히 저급반에 소속이 됐다. 수업 시간에도 떠들고 자율 학습 시간에는 더 떠드는 학생들 속에서 나는 교리 대로 그 누구와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만 밥을 먹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 휴유증은 몇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타났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처럼 사람들이 있는 데도 혼자 밥 먹고 사소한 문장, 단어 하나도 말하지 않던 나는 서로 인사를 하며 웃는 학생들을 보며
'나도 인사하고 싶어! 나도 너희들하고 웃으며 인사하고 싶어 죽겠다고!!'
마음 속으로 수 백번을 외치기도 하고,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 준다면 그에게 내 영혼을 팔겠다는 결심까지 했었다.
하지만 교리의 영향은 너무나 강력해 그 누구도 내 옆에 앉지도 않았고 말도 단 한 번도 걸지 않았다. 고독의 벗은 이미 넘어서서 고독의 스승이 될 정도까지 이르자, 나는 연습장에 다가
'루쉰p 안녕?' '응, 반가워' '오늘 날씨 참 좋지' '공부하기엔 너무나 안까운 날이야'
쓰면서 내가 나에게 묻고 답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돌아버릴 것이라는 위기감과 스스로 만든 교리를 실천하지도 못 하는 나약한 자신을 질책하며 차라리 사람이 아예 없는 곳으로 가면 대화하고 싶은 욕망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학원은 13층 건물에 3, 4, 5층을 쓰고 있었다. 3층에는 접수처와 교무실, 저급반이 있었고, 4층은 중간반, 5층은 150평 가량의 대 교실과 우수반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곳, 저 곳을 염탐하던 나는 150평의 교실은 대규모 수업이 있는 날이 아니고는 학생들에게 자율학습 공간으로 개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교실에서 공부를 하기에 이 곳에는 사람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난 수업이 끝나면 이 곳으로 옮겨 공부를 시작했다. 밤 10시까지 이 곳에는 우수반 학생만 몇 명이 공부만 하고 있을 뿐, 연습장에 샤프가 쓰이는 사각사각 소리가 들릴 정도로 숨 막힐 듯한 고요함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주체를 할 수 없었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나랑은 출신이 틀린 사람들이었기에 그 욕망은 조금은 절제를 할 수 있었다.
난 이 교실의 칠판이 있는 맨 앞으로 가서 왼쪽 구석 창가와 붙어 있는 책상에 거주지를 정하고 공부를 했다. 올라 와서 공부한 지 2주가 된 무렵, 항상 교실에 들어서면 문 바로 옆에 있는 책상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머리를 틀어 올린 채 앉아 있던 그녀는 내가 들어오면 흘끔흘끔 쳐다 보는 것이 나에게는 느껴졌다. 사람이 들어오니 신경이 쓰여서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지나 쳤다.
어느 햇살 가득한 토요일 오후, 어김 없이 올라와 공부를 시작할려고 했던 나는 워낙 날이 좋았던 탓인지 그 여학생을 빼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괜히 신경이 쓰이는 기분을 교리로 누르고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가 누군가 쳐다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뒤를 흘끔 돌아 보니 나를 쳐다 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책상으로 숙이는 여햑생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상해 보이나? 아니면 나랑 둘이 있어서 무서워서 저러나 하는 생각에 교실을 나와 화장실의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춰 보았다.
떡지고 헝클어진 머리,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웃는 어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를 입고 턱수염을 깎지도 않은 어떤 구도자가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완전 이상해! 정말 이상해! 그 학생이 나를 백반번 오해해도 충분하겠어'
교리도 중요하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흉물스러운 모습은 보여 줄 수 없다는 생각에 긴 머리도 단정하게 묶고, 세수도 하고, 편의점에서 면도기를 사와 면도도 한 후 나는 교실로 다시 들어갔다. 여전히 그 여학생은 책상 앞에 코를 박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또 다시 힐끔 거리며 나를 쳐다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단정하게 했으니 그리 크게 공포감은 안 가지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 자리에 와서 앉았다.
딴 짓을 하다 와서 그런지 공부를 되지가 않았고, 그러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커플티를 입고 신나게 팔짱끼고 웃고 있는 커플들, 다정스럽게 깔깔 거리며 웃는 여고생들, 그 모습들은 나 완전 행복해라고 자랑질 하는 모습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커플티 입은 커플, 너희들의 사랑이 영원할 것 같나!'라고 커플을 저주하고,
'흥! 너희들도 지금은 웃지만 좀 있으면 이 지옥문으로 들어와야 할꺼야, 어린 아가씨들 흐흐흐' 라고 여고생들을 저주하고,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저주에 저주를 거듭하다가 나는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아주 달콤한 향기가 코를 확 찌르는 느낌에 잠이 깼다. 내 책상 위에는 향기의 주인공인 껍질이 까진 채 놓여 있는 오렌지와 예쁜 글씨체의 쪽지가 같이 놓여 있었다.
'너무 피곤해 보여요. 오렌지 먹고 힘 내세요.'
사람이 너무 그리운 나머지 오렌지를 내가 싸오고 쪽지도 내가 쓴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 글씨체였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사각 사각 소리를 내며 공부를 하고 있는 여학생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