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과 삼수 (중)

부활(상),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by 노석

내 안에서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외치는 자아와 사람을 피해 올라 온 너가 그깟 작은 친절에 감동해 교리를 깰 것이냐라는 자아가 서로 치열한 싸움을 했다. 하지만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그것도 예쁜 여성이라니 이 기회를 저 버리면 삼수도 망쳐 버릴거야라는 생각이 나를 집어 삼켜 버렸다.

상당히 어색하고 얼은 표정으로 그 여학생에게 다가가

'저...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혼자 먹기는 좀 많아서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눈은 가늘지만 반달로 예쁘게 감겨지고, 하얀 피부의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게다가 날렵한 몸매에 비해 풍만한 가슴이 매우 아름다운 조화를 보이고 있었다. 조용한 교실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말들을 한 구절, 한 구절 음미를 하며 듣고 답하며 인간과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온 몸을 떨며 느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교실에 올라 오면 둘이 있을 때가 많아 공부를 하다 지치면 서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역시나 예상대로 우수반의 엘리트로 우리 학원내 10위 안에 드는 수능 성적의 보유자 였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만화 이나중 탁구부에 이자와와 비슷한 외모를 보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이나중 탁구부 매니아 였고, 만화는 물론 문학을 무척 좋아했다. 그녀의 집은 엘리트 집안으로 아버지도 의사, 오빠도 의사였다. 자신은 문학가나 만화가를 꿈꾸는데 집에서 반대가 워낙 심해 갈등을 하고 있으며, 집에 압박을 못 이겨 의사가 되기 위해 연세대를 가야 해서 일부러 또 삼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대학을 골라 갈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집안 배경이 있는 것도 부러웠고 말이다. 나는 공고생이며 공부의 무뢰한, 바닦에 가까운 가난한 집에 대해 털어 놓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톨스토이가 말한 것이라고 하며,

"넌 내가 이런 환경에 있는 것을 당연히 부러워 할꺼야.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것만 채워지면 행복한 줄 알거든. 근데 그러지가 않아 부족한 것을 채워도 또 채워야 할 구멍이 생기고 또 생겨 끊임없이 말이야. 참 웃긴 일이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좀 어둡다고 느꼈지만 난 그 말에 100% 공감을 하지는 못 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공부만 하는 것도 힘 드니까 같이 문학 책을 읽어 보고 시간이 날 때 얘기해 보는 것은 어떠냐고 권유를 했다. 그리고 나선 하는 말이

"넌 신비한 사팔뜨기 눈을 가진 까츄샤 같아."

뭔 소리야? 난 시력 1.5를 자랑하는 매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게다가 신비한 사팔뜨기는 또 뭐야? 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듯해 참았다.

그런 그녀가 권유한 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나는 전철로 집에서 학원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20분 이었다. 난 그 시간을 이용해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까츄샤에 대해 이해를 했다.

'망할! 사팔뜨기 눈을 가진 창녀가 나라니 도대체 뭔 소리야? 게다가 나는 풍만한 가슴도 가지지 않았다고!'

어찌됐는 그녀와의 문학 토론은 시작이 됐다. 그녀는 알고 보니 톨스토이주의자라고 할 만큼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 책을 10년 간에 걸쳐 집필했데, 원래는 '꼬니의 수기'란 제목으로 자신의 친구에게 들은 내용을 가지고 쓰다가 집필 중단했는데 다시 쓰게 된 계기는 러시아의 두호보르 교인들의 이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마무리를 했다고 해. 그는 49세 느낀 죽음에 대한 문제로 그 속에 빠져들고 문학도 예술을 위한 문학에서 도덕을 위한 문학으로 탈바꿈을 했어. 그런 그의 후반기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이 책의 배경과 그리고 그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들으며 나 역시 톨스토이에 점차 점차 빠져 들었다.

귀족적인 타락한 생활에 빠지던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친척 집에 살던 까츄샤를 유혹해 임신을 시킨 후 돈만 쥐어주고 버리게 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법정에서 자신 때문에 타락해 결국은 창녀가 되었고, 살인범의 누명을 쓰게 된 까츄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영혼의 충격을 받아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를 따라가며 만나게 되는 감옥이라고 하는 사회의 위선, 그리고 인생의 진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부유층 사람들의 허식, 죄가 아닌 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민중들, 그리고 혁명에 대한 불길을 태우며 살아가는 혁명가들을 만나며 네흘류도프는 점차 각성해 가기 시작한다.

퍼즐처럼 잘 짜여진 톨스토이의 소설은 나로 하여금 삼수라는 상황, 괴로운 집 사정을 잊게 만들 정도의 몰입감을 주었다. 더욱이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톨스토이의 <부활>은 삼수의 시름을 잊게 만드는 강한 힘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특히 어른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 상대까지 서로 속이고 괴롭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신성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저마다 머리를 쥐어짜는 일이었다.
- 열린책들 <부활> 상 11, 12페이지

"너는 대학을 왜 가니?"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어, 전철 타고 대학가고 싶어서..." 나는 대답하고도 엄청 민망했다.

"그래...나도 대학을 왜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일 중에 하나가 학벌이고 학력이지 않을까? 나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말이야. 근데 대학을 안 가겠다고 버티면 난 우리 집에서 비웃음을 당하고 말아. 마치 <부활>의 저 문장처럼 말이야."

자신을 신뢰하면 항상 사람들의 질책을 받지만 타인을 신뢰하면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 열린책들 <부활> 상 78페이지

이 문장을 읽고 그녀는 말했다.

"톨스토이가 쓴 것처럼, 자신을 신뢰하기 보다 타인을 맹종하게 된 까닭은 자신을 신뢰하며 사는 것은 너무 힘들기 때문이야. 좋은 대학을 가겠다고 발악하며 꿈도 포기한 채 공부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면 가족들은 기뻐하기만 해. 내가 대학이 아닌 문학가나 만화가가 된다고 하면 우리 가족들은 두려움에 떨어. 근데 나 가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학을 꼭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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