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본드 36,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 학산문화사(만화)
결전의 날. 우리는 고물상의 철문을 닫고 고요한 사무실에 앉았다. 내 상반신만큼이나 쌓여 있는 통지서들을 살펴보며 하나, 하나씩 체크해 갔다. 그런데 여러 번 독촉이 왔음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정운이가 참으로 이상했다. 대략적으론 이야기를 하는 데 세부적인 상황까지 물어보면 답변 못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방금 말한 것과 지금 얘기한 것이 서로 부딪쳐서 말이 안 되는 것들도 있고, 말하던 나도 지칠 뻔 했다.
눈치를 보시던 사장님은 나를 데리고 나오셔서 얘기를 하셨다.
“내가 지체장애는 뭔지 잘 몰랐었는데, 정운이 일 시키면서 어떤 건지 알았지. 쟤가 말을 표현을 잘 못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면 이해를 못 하더라고. 아침에 세수대야에 물 뿌리는 거 가르쳐 주려고 세수대야 가지고 오라고 하면 주저주저 하다가 아, 글쎄. 수레를 가져와. 그래서 나는 쟤가 나 가지고 장난치는 줄 알았다니까.”
사장님의 이야기는 정운이가 사람들보다 약간 떨어지는 의사소통 능력과 지능이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얘기하다가 답답하면 정운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니까 이해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내와 인내를 걸친 대화 속에서 결론은 정운이는 인천에서 그의 명의를 도용 당해 통장이 쇼핑몰 사기 계좌가 된 것인 것 같았다. 정운이를 가둔 그들은 물건을 보낸다고 하고 물건은 보내지 않은 채 돈만 정운이 통장으로 받은 채, 잠적을 한 것 같았다. 결국에 명의자는 정운이니까 당연히 그가 고소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운이가 알고 그 사기를 도운 건지 그렇지 않은 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일단 사장님과 정운이에게 무료법률구조공단을 내가 아는대로 설명하고 그곳을 같이 찾아가 보기로 했다.
토요일 오전, 무료법률구조공단을 방문했다. 허름한 건물 3층에 위치한 공단은 주변에 ‘개인회생 개인파산’이라는 커다란 글귀를 써놓은 법무사, 변호사 사무실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불신지옥 예수천당’이 한때 지하철을 지배했듯 이 세상은 ‘개인회생 개인파산’만이 지배한 듯 오로지 그 글귀들만 빨간 색으로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좁은 사무실에 사람들은 이미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번호표만 하염없이 보는 사람, 당신들은 뭐 땜에 왔냐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사람. 차림새들은 모두 간단한 티셔츠나 세월 지난 셔츠 차림으로 폭풍이 지난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처럼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안내되어 간 칸막이 친 책상 앞에서 구조공단 직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바가지 머리의 3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이미 눈은 반쯤 풀린 채로 쉬지도 않고 떠 들은 듯 혼이 나가 있는 표정이었다.
그 앞에 스포츠 머리의 정운이는 눈을 깐 채 앉아 있었고, 의자를 끌어와 양 옆에 수호신처럼 앉은 꽁지머리 군복바지 차림 사장님과 정장 차림의 올백머리의 나.
우리의 이름 모를 아우라에 직원도 약간 움찔 하시는 듯 보였다. 자초지종은 내가 설명하고, 사장님은 정운이를 그렇게 만든 무리들에 대한 감정적 격노를, 정운이는 ‘진실입니다’ 라고 짧게 말했다.
셋이서 파트 나누어 노래 부르는 걸그룹처럼 내가 나오면 둘이 쉬고, 사장님 나오면 둘이 쉬고, 우리는 호흡을 맞췄다. 직원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정말 진지한 자세로 들었다. 우리가 말하는 거 집중 안 했다가는 자신에게 어떤 해를 입을지 모르는 공포감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그의 눈빛은 참으로 진지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날아온 통지서들을 분석하며 그는 간간히 예리한 질문들을 하나씩 던졌다.
조사를 해 준 직원은 이미 정운이를 괴롭힌 주범은 3명인데 그 중 2명은 판결을 받아 감옥에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들은 정운이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피해자를 만들어서 고소를 당하고 사법적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나머지 한 명이 잡힘으로 정운이의 소송에 대한 해결이 된다고 해 주었다. 대신 지금 빚진 것들이 핵심인데 나머지 한 명이 잡혀 법원에서 정운이의 무고함이 밝혀질 것이고 그러므로 빚들은 소멸될 것이라 해 주며, 지금은 그런 상황들이 진행 중이라 정운이에게 통지서들이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 해 주었다. 다만 신용불량도 그때 모두 해결될 것이기에 힘들어도 버티라고 하였다.
우리의 굳은 표정이 풀리는 것을 보고 환하게 웃는 직원의 그 미소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때 그의 뒤에서 어떤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