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 데보레와 나의 간격(상)

액스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by 노석

"얘들아! 안돼! 거기는 올라가면 위험해!"

"서서 타면 자빠져, 앉아서 타야지!"


추석 날은 근무였다. 난 아침부터 출근해 사무실 앞에 있는 놀이터에 대고 아이들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8살부터 11살까지 온갖 나이의 아이들이 놀이터에 방출돼 있었다. 잠옷을 입은 아이, 한복을 입은 아이, 가지각색의 옷을 입고 한껏 복장을 뽐내며 있는 이 곳은 패션 일번지 추석의 놀이터!


"우헤헤" "꺄하하하" "아하하하!"


30여명의 아이들이 정신 놓은 채 침을 흘리며 해맑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 옆에서 나는 미끄럼틀 지붕을 올라가거나 시소를 서서 타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파란색 티셔츠인 근무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채 안절부절 서 있는 나를 보면 아이들은 더 신나나 보다. 아무리 소리쳐도 여전히 미끄럼틀 지붕에 올라가고 있고, 시소는 서서 타며,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서로 나눠 먹으며 쓰레기는 바닥에 버린 채 나에게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다.


난 유령인가? 아이들의 혼잡한 함성 소리와 함께 나의 머리도 혼잡해 졌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조용하고 서늘한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으면 또 아이들이 밀고 들어 온다.


"아저씨, 물 주세요!"


‘얘들아, 여기는 물 먹는 곳이 아니란다. 여기는 너희들의 부모님의 안전을 지키는 최전방 요새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초롱초롱한 눈꼽 낀 아이들의 눈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정수기에 일렬로 세우고 물을 따라 주게 된다.


그런데 한, 두 명이 아니다. 일렬로 줄을 세워 먹일 정도로 밀려 들어온다. 여긴 관리사무소인가? 유아 방인가? 난 어린이 집 선생님인가? 난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물 한 모금씩 먹은 아이들은 꼭 이렇게 한 마디씩 남기고 간다.


"아저씨는 여기서 뭐해요?"


그리곤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저희들끼리 얘기하며 달려 나가 버린다.


‘질문을 했으면 내 대답을 좀 들어줘.’ 난 마음 속으로 외친다. 그리고 남아 있은 아이들에게는 내 존재감을 확실하게 심어주기 위해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난 무얼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하지만 역시나 녀석들은 물만 먹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쪼르르 달려 나가 버린다. '뭐야?'라는 눈빛을 한 채 말이다.


그래도 이 적막한 곳에 아이들이라도 물을 먹고 가니 '훈훈하다, 따뜻하다' 라고 홀로 위안 삼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짜증지대로다'라고 훅하고 올라온다.


내 안의 그는 나에게 말한다.


‘이게 뭐하고 있는 짓인가? 32살에 먹은 내가 10여살 먹은 아이들에게 내 존재감을 심어주기 위해 설명을 해야 하나? 도대체 뭐 하고 있는 짓이야!’


내 안의 또 다른 그도 말한다.


'이게 인생이야. 왜 넌 그런 현실을 거부하지. 이런 친절은 당연히 베풀어야 해. 넌 오늘 하루 저 아이들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책상 옆에 붙어 있는 큰 전신 거울을 앞에 두고 이리 저리 움직이며 주저리 주저리 말을 하며 모노 드라마를 찍고 있는 나 자신, 어느 새 거울 앞에서 어느 포즈를 하며 말을 해야 멋진가를 연구하고 있는 나 자신. 자랑스럽다. 자랑스러워.


그리고 오전 11시가 조금 넘으니 그 많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전염병이 휩쓸고 가듯이 말이다. 분명 밥 먹으러 갔겠지. 완벽한 시간 관리다. 녀석들 훈련 받았어. 프로야.


조금 조용해 지니 이번에는 경비 반장님과 경비 아저씨들이 오셨다. 경비실에는 정수기가 없어 항상 빈 페트병을 들고 아저씨들은 하루 한 번 사무실을 방문 하신다. 잦은 관리사무소 출입은 루쉰P 반장의 개인적 자유를 침해한다며 경비반장님은 아저씨들에게 지시 해 굳이 하루에 한 번만 오신다. 추석 때 근무의 짜증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분노를 폭풍처럼 쏟아냈다.


"다 미쳐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말이죠. 왜 추석날 이렇게 일을 해야 하는지 그것도 짜증나요.”


난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페트병에 뜨거운 물, 찬 물을 번갈아 담으시던 반장님은 씨익 웃으시며


"힘들지, 힘들어, 근데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아침에 눈을 떠서 어딘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를걸. 루쉰P반장."


모자는 삐뚤게 쓰신 채 페트병에 물을 채우며 말씀하시는 경비반장님, 그리고 경비반장님의 말씀에 ‘역시 반장답다’는 듯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들.


나보다 연세가 많으신 이분들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토끼 같은 귀여운 손주들도 있을 것이고 장성한 자식들을 만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뒤로 놓은 채 일하시는 이 분들, 여기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곳인가?


"루쉰P 반장, 놀아본 적 있어?"


경비 반장님 다음 순번의 물 뜨시는 경비 아저씨를 지켜보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도 1년간 논 적이 있어요. 예전에요."

"그래, 그때를 기억해. 사람은 누구나 환경이 조금 나아지면 예전 일은 까맣게 잊게 마련이니까."


경비 반장님은 저런 애매모호한 말을 남기시고 아저씨들을 대동하신 채 물이 찰랑찰랑 거리는 병을 들고 관리사무소를 나가셨다.


‘그때를 기억하라.’ 그래, 난 기억하고 있다. 아주 절절하게 직장 없이 방황하던 그 시절을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난 백수였다. 책방을 그만두고 1년여 시간 동안 직장도 없이 그 어떤 돈벌이도 없이 난 집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 때 기억은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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