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1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옴진리교의 사린 가스와 다단계라는 것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 사건들의 이면 속에 숨겨진 지하 세계는 그 속성이 비슷하지 않을까? 또한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쪽 세계의 어둠을 벗겨낸 부분과 매우 흡사하지 않을까?
사회의 성공 = 돈을 많이 버는 것 즉 배금주의라는 도식화에 잡혀 있는 우리들은 대학이라 불리는 학벌의 딱지도 사실 저 ‘배금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었다. 그 길에서 탈락했기에 우리는 바로 그 ‘돈’이라는 교주를 직접 모시기 위해 빠른 길을 선택한 것이 다단계였던 것이다. 내 시스템 속에는 이미 ‘저쪽’ 세계로 갈 생각을 이미 굳히고 다만 매스미디어가 말하는 콘센서스에 의해 마치 난 그런 존재가 아닌 것처럼 행세를 한 것이다. 이미 ‘돈’이라는 교주를 섬기고 있으면서 말이다.
하루키는 그 구조에 대해 이렇게 풀어서 말한다.
시스템이라 불리는 고도관리사회에서는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를 질병으로 보고 치료하려 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가치를 억압하는 것이다. 허나 거기에도 문제는 있다. 사회에서 사는 이상 개인의 자유, 가치, 자아만을 위해서는 살 수 없다. 사회의 시스템과 개인의 자유, 가치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 둘이 융합 혹은 타협하는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자유, 가치를 찾으려는 자들을 자신이 만들어낸 폐쇄적 시스템 속으로 포함시키고 그들의 자유, 가치, 자아를 자신에게 모두 종속을 시켰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 시스템의 반작용으로 만들어진 개인의 시스템 구축을 위해 방황하다가 폐쇄적 시스템으로 떨어져 버린 그들에게 어떤 새로운 희망적 시스템을 얘기해 줄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아사하라 쇼코의 폐쇄적 시스템과 사회와 개인이 병합돼 있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금 살고 있는 시스템이 결국은 옴진리교의 폐쇄적 시스템을 낳을 수 있는 토양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하루키는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그의 확신을 증명하듯 인터뷰 글에는 사린 가스로 살해된 남편의 부인이라고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손가락질을 해 그것이 싫어 집을 이사한 피해자 부인도 있고, 여러 사례가 언급돼 있다. 남의 불행 따위는 인스턴트 음식처럼 소모시켜 버리는 매스미디어의 행태도 나와 있고 말이다.
나 역시 삶을 토대로 본다면 하루키의 글은 수십 번도 긍정할 수 있다. 돈! 학벌! 학력! 이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다단계라는 저쪽의 세계로 옮길 수 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도 그런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나에게도 그런 폐쇄적 시스템의 유혹이 얼마나 많은가? 컬트적 종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혹은 대화를 거부하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사는 이런 행동과 태도. 절망과 증오를 가득 품고 폐쇄적 시스템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지는 않는가란 예감도 들고 말이다.
사회의 시스템에서 탈피하고자 개인의 자아를 폐쇄적 시스템에 모두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다. 무슨 종교든 반드시 어떤 절대성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마성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절대자라는 타력에 의한 구제를 설하는 종교 그것이이 옴진리교이자 다단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돈이라는 절대 교주를 모시고 있는 나 역시 그런 광신에 쉽사리 빠져들 가능성을 항상 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97년에 쓰여진 이 맺음말에서 하루키는 일본의 체질에 대해 이렇게 논하고 있다.
과실을 외부에 명확히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일본적 조직의 체질이라 말하며 사린 사건의 피해는 그로 인해 더욱 어둠 속으로 가려졌다고 말이다.
3.11 일본대지진을 바라보며 그 때의 일본 체질이나 현재나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는 당혹감을 더 금치 못한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사실 책을 읽은 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검토해 봤었다. ‘지루하다’는 것이 대부분 리뷰의 공통점이었다. 어찌보면 반복되는 피해 사실에 대해 지루하게 적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난 그렇지만 하루키는 피해 사실에 대해 반복적으로 적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피해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매스미디어에서 말하는 그 따위 인스턴트적 사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이쪽’ 시스템 속에 살던 인간이 그런 문제를 겪었을 때, 그것을 살아 움직이게끔 쓰고 싶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도 솔직히 지루한 감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민 때문에 남의 문제는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왜? 자신은 그런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것이 모두 지구 전체의 고민인 양 착각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이해를 공감을 하지 못해도 이 사회 시스템이 추상화시키고 단순한 숫자로 취급하는 인간들에 대해 그 숫자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고 그것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고 느끼는 것.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하루키에 대한 나의 관점도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고 말이다.
하루키를 처음 접한 고등학교 때 ‘상실의 시대’라고 하는 희대의 야설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달려가서 집어 들었던 천박한 나를 떠올리며 말이다.
여담이지만 다단계로 인해 피폐된 삶을 살았던 그 친구를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서 집으로 돌아가라 설득해서 결국은 그 친구의 손을 잡고 집을 찾아 갔었다. 욕할 줄 알았던 아버지도 어머니도 여동생도 모두 그를 울며 반겨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영세한 중소업체에서 별로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친구가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방황하며 집을 못 들어갔던 그 때 자신에게 내가 했던 말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만 그 안타까워하던 마음만은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말이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힘들었을 때 격려해 주던 영업부장님, 잡지사 편집국장님, 헌책방 팀장님…말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마음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결국 폐쇄적 시스템에 빠지지 않고 이 불안한 사회 시스템에서 버티는 힘은 그런 것이 아닐까하고 나름대로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