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1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며칠 후 경찰도 찾아갔지만 불법적 단체가 아니기에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무시 섞인 대답만 얻었고, 친구들을 모아서 찾아간 그 다단계 회사에서는 친구가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다는 얘기만 들은 채 결국 그 녀석을 포기해야만 했다. 게다가 가족들과의 연락도 끊어져버린 그 친구를 찾을 길은 전혀 없었다.
그 친구도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 어머니는 몸이 아프신 전형적인 우리와 같은 종족이었다. 그런데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우리를 속이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몇 년이 지나 저녁 퇴근 길에 책이나 좀 보려고 서점이 있는 서울의 어느 전철역을 올라가던 중, 지하철 입구에서 몇 년 전 내가 그 녀석의 멱살을 잡았을 때 입었던 그 옷을 입고 전단지를 돌리는 초췌한 그 녀석을 보게 됐다.
마주친 우리는 그도 나도 당황스럽고 놀라 서로 아무 말 없이 몇 초간 쳐다보기만 했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전단지를 손에 쥔 채 싸구려 가방을 메고 힘 없이 서 있는 그 친구를 보며, 나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했다.
침묵 끝에 나는 ‘이 개새끼야, 그렇게 사기를 치고 갔으면 성공이라도 해야지 이 꼴이 뭐냐, 이 꼴이…’ 그 한 마디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그 지하철 입구 앞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친구와 더불어 말이다.
근처 순대국 집에서 밥을 사 먹이며 손을 벌벌 떨며 숟가락을 드는 그를 보며 겪었던 그 온 몸을 찢어내는 고통의 근원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추적할 수 있었다.
지표 없는 악몽 – 우리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란 하루키가 쓴 이 책 말미에 있는 맺음말은 다단계 폭풍에 휩싸였던 그 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왜 그리고 그 때 난, 우리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 책의 압권은 방대한 분량의 인터뷰보다 이 맺음말이다.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쓸데없는 장식만 걷어내버리면 매스미디어가 근거로 삼는 원리의 구조는 아주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지하철 사건이란 요컨대 정의와 악, 제정신과 광기, 정상과 기형의 명백한 대립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많든 적든 ‘정의’ ‘제정신’ ‘정상’이라는 커다란 승합마차에 올라탔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즉 아사하라 쇼코나 옴진리교 신자에 비하면, 또는 그들의 행위에 비하면 이 세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명한 ‘정의’이고 ‘제정신’이고 ‘정상’이라는 것이다. 이만큼 알기 쉬운 콘센선스(의견일치)는 없다. 매스미디어는 하나같이 그 흐름을 타고 그 기세를 점점 가속시켰다.’
또 이렇게 쓴다.
‘앞에서는 말했듯이 이 사건을 보도하는 매스컴의 기본 자세는 ‘피해자 = 무구한 존재 = 정의’라는 ‘이쪽’과, ‘가해자=더렵혀진 존재=악’이라는 ‘저쪽’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쪽’의 포지션을 전제조건으로 고정시켜두고 그것을 이른바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삼아 ‘저쪽’의 행위와 논리의 왜곡을 철저하게 세분화하고 분석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호 유통성이 결여된 모멘트가 도달하는 곳은 항상 축소되고 패턴화된 논리이며, 혼탁함이 초래하는 무감각이다.’
그러면서 하루키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이 지하철 사린사건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일으킨 ‘저쪽’의 논리와 시스템을 철저하게 추적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와 동시에 똑 같은 ‘이쪽’의 논리와 시스템에도 병행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쪽’이 던진 수수께끼를 해명하기 위한 열쇠는(또는 열쇠의 일부는) 혹시 ‘이쪽’ 지역의 지하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옴진리교라는 ‘존재’를 자기 자신이라는 시스템 속에 또는 자신이 속한 시스템 속에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존재’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것은 옴진리교라는 ‘존재’가 실은 나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존재’는 우리가 예상도 하지 않았던 스타일로, 우리 자신의 뒤틀린 모습을 취함으로써 우리 목에 날카로운 가능성의 나이프를 들이밀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애써 의식적으로 배제해야만 하는 것이 혹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 ‘이쪽’ = 일반시민의 논리와 시스템과 ‘저쪽’ = 옴진리교의 논리와 시스템은 서로를 비추는 일종의 거울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가지 상은 이상할 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고 몇 가지 점에서 호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사물을 직시하는 것을 피하고,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현실이라는 국면에서 끊임없이 배제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그림자 부분(언더그라운드)이 아닐까. 우리가 이 지하철 사린사건에 대해 마음 한구석에서 맛보고 있는 ‘꺼림칙함’은 바로 그곳에서 소리도 없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런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렇게 속아간 그 친구가 멍청하다고 비난하고 욕을 했었다. 단순히 매스미디어가 말하는 콘센서스에 따라 그런 흐름에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 친구만 비난을 한 것이다. 한심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묻어 버린 채 세월을 보냈다. 마치 그것이 ‘정의’인 양, 난 속지 않았기에 ‘제정신’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