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당에 간다. 그냥 간다. '그냥'이란 말을 하고 나니 나로서는 틀린 말이 전혀 아닌데 다소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어디 가서 종교 이야기를 할 때면 저는 가톨릭 신자예요 하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한다. 결론적으로 난 나이롱 신자인 셈이다. 신앙, 기도, 찬양이란 말을 들으면 마음의 시선을 괜히 다른 곳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면서도 일요일이 되면 주일에 성당에는 가야지, 이마저도 안 가면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고 하느님이 벌주실 거야.. 하면서 분주히 외출 준비를 한다. 이런 내 속마음을 식구들에게 들킬까 봐 매 일요일 아침, 나는 무슨 거창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집안에서 괜히 법석을 떤다.
오늘도 나는 성당에 가기로 마음먹고는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는 영혼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선사하며 현관을 나선다.
거리는 일요일 아침이 주는 여유와 평화로 따뜻하다. 성경책을 한 손에 든 중년 아저씨가 보인다. 고운 색깔의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도트백을 한 손에 든 할머니도 보인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아이 손을 잡고 가는 젊은 엄마도 보인다. 밟은 햇살을 받아 더욱 환한 아이보리색 원피스는 성모마리아상을 떠올리게 한다. 정결하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의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성경책이 들려있다.
아마 모두 교회나 성당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일 듯싶다. 나도 그 경건하고 성실한 삶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성당 입구에 서 있는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다. 정말 경건하게 잘살고 있는 나다. 기분이 좋아진다.
미사가 시작된다. 찬송가를 부르고 복음이 낭송되고… 신부님의 강론이 이어진다. 신부님은 늘 그렇듯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성을 다해 의식을 주재하신다. 똑같은 의식, 똑같은 기도문. 기도는 하나님과 나의 대화라고 했는데 왜 모두 같은 기도문을 암송하는 걸까,라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며 나도 기도문을 중얼거린다. 가톨릭의 그 모든 기도문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한 누군가의 고백이 여전히 나는 낯설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엊그제 청약 신청한 주상복합 아파트의 경쟁률을 떠올린다. 다음 주 친정 조카 결혼식에 부조금은 얼마를 할까? 시어머니 생신에 용돈은 얼마를 드리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갑자기 나는 주변을 뒤돌아본다. 이런 나를 누가 알아차리기라도 하지는 않을까? 경건한 이곳에서 이런 속된 생각들을 하다니, 아무리 봐도 내가 많이 한심하다. 회당 정면에 서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상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길을 떨군다.
성체성사-교회의 의식 중 하나-를 끝낸 후 각자가 묵상 기도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에 성가대의 합창이 계속된다. 이 시간만큼은 나도 정신이 번쩍 든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조카, 10여 년째 암흙 속에서 살고 있는 그를 위해 기도한다. 여름날의 싱그런 초록도, 비 내리는 밤 유난히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도, 해 질 녘 서쪽 하늘 가득 물드는 빛깔도, 여동생의 복숭아 빛 뺨도 볼 수 없는 그 아이, 그 아이가 행복하게 해 달라고,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하느님 당신의 힘으로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그 부모가 이제 좀 덜 힘들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매일 해도 눈물이 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래서 늘 막막하다.
우리 사회엔 다양한 모습의 장애인들이 많다. 언젠가 한 드라마에서 다룬 발달장애 언니 이야기가 한동안 내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선천성 발달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쌍둥이 언니. 부모님이 모두 사고로 돌아가신 후 그 언니를 돌봐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생의 이야기였다. 장애를 가진 언니를 평생 돌봐야 하는 자신의 굴레 같은 운명에 동생은 분노하고 억울해한다.
그러던 동생은 어느 순간 정작 언니 본인은 얼마나 더 억울할까,라는 생각에 이르면서 폭풍 같은 눈물을 흘린다.
온전히 공감되는 지점이었다. 장애를 가진 조카를 둔 가족들의 고통이 어떠한지 옆에서 계속 보아 왔기에. 부모나 고모인 내가 느끼는 고통이 시력을 잃은 조카 본인의 고통만큼 할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었다.
나의 기도는 계속된다.
내 아이를 위한 기도도 빼먹지 못한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춘들이 많이 지치지 않게 해 달라고. 지구상의 수많은 전쟁터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죽어가는 내 아이 또래의 젊은 생명들을 구해 달라고 하는 기도도 추가한다.
하느님에게 구하는 청원 목록이 많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무는 소홀히 하며 원하는 것만 달라고 졸라대는 나를,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니 미워하지 말라고, 혼내시지 말라고도 기도한다. 얌체 같다.
기도를 마무리할 즈음, 성가대의 찬송이 갑자기 거대한 밀물처럼 가슴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마치 내 기도에 응답해 주는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내 간절한 기도에 하느님이 꼭 답해 주실 거야, 이렇게 간절한데 하느님이 모른척하진 않으실 거야, 갑자기 마음이 든든해진다. 난 전체 미사 시간 1시간여 중에 5분 정도의 이 시간이 정말 좋다. 막막했었는데 조금 위로가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간구할 대상이 있다는 게.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다. 최선을 다하지만 세상엔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 투성이지 않은가? 힘들면 기대자. 부탁하자. 가족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절대자에게.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 그래야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숨어있는 한 가지, 희망을 꺼내올 수 있지 않을까? 정말 다행이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도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저 이는 무엇을 저리도 간구하는 걸까?
부모가 많이 아픈가?
아이가 취업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있는 걸까?
어린 자녀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걸까?
가장이 실직했나?
고개를 아직 들지 않은 사람의 굽은 어깨를 난 한참 바라보며 기도를 한 가지 더 한다.
“하느님, 당신은 힘이 엄청 세잖아요. 우리에게도 그 힘을 나누어 주세요. 이겨낼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