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다시 시작한 주어로서의 삶

by 옥천의 봄날

예정에 없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웠다. 10년 넘게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증명해 주었던 현장이 뉴스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소식이 되어 가는 과정은 내가 평범한 애 엄마가 되어 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가 꼬물꼬물 성장해 제 발로 세상을 딛게 된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만, 나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예민한 아이의 일상은 내 시간과 잘 만나지 않았다. 아이는 오롯이 자신의 속도에 맞게 먹고 놀며 움직이다 잠을 잤고, 투정과 안온함, 낯섦과 호기심 사이를 오가며 성장했다. 인간은 홀로 태어나 존재할 수 없으며, 무수한 타인들의 자국이 존재한다는 말을 온몸으로 배웠다.


하지만 긴급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9-9시 일과에 맞춰 사는 현장의 삶은 그만큼 아득해졌다. 아이를 재우고 맥주 한 캔을 따기도 벅찼다. 책 한 권 읽는 것도 고됐다.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친구에게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라도 하라며 수험집을 사 보낸 과거의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일상과 관심에 격차가 커지다 보니 동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 낙관했다.

아이가 한 살, 두 살 자람에 따라 변화된 풍경이 일상이 되었지만 육아와 돌봄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새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생은 홀로인 삶과 계산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양육은 몇 년의 유예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외부 도움 없이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은 달라진 삶을 인정하고 삶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길 요구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에 큰 물음표가 생겼다.


경력단절은 이제 미디어 속 뉴스나 정치권의 의제가 아니었다. 내가 온몸으로 직면한 문제였고, 어떻게든 풀어야 할 과제였다. 하지만 어떻게 풀지 몰랐다. 물을 곳도 없었다. 대다수의 동료들은 비혼 이거나 미혼이었고,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었다.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결혼과 동시에 ‘우리 가족’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으므로 인권활동가의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나이 들어감을 고민하는 내 삶은 그들 안에서 좀처럼 섞이지 못했다. 남성인 짝꿍과 여성인 나, 연구자인 그와 활동가인 내가 출산과 육아 속에 경험해야 했던 일상의 격차와 관계의 진폭은 ‘성평등’, ‘가사분담’, ‘공동운명체’라는 말로 아름답게 조화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깊이 우울했고 암담했으며 무기력했다. 일상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우울과 불안, 걱정과 짜증에 침윤돼 삶과 마음의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을 2013년 겨울, 메일함에서 메일 한통을 발견했다.


“밀양을 살아내고 있는 할매들의 삶을 듣고 기록할 사람들을 모읍니다.”


이미 모집 기한을 넘긴 메일에 마음이 널을 뛰었다. 인터뷰를 해주실 분과 시간 약속만 잘 맞춰 잡을 수 있다면, 녹취와 글쓰기는 아이를 재우고 틈틈이 시간을 쪼개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머릿속은 재빠르게 밀양을 오가는 시간, 인터뷰와 녹취, 그리고 글쓰기에 들이는 품에 대한 계산에 들어갔다. 짝꿍만 협조해준다면 가능하다는 답이 나오자 핸드폰을 들었다.


“혹시 나도 작업에 참여할 수 있을까?”


사실 밀양은 내게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짝꿍의 고향이라 명절과 제사를 위해 매년 몇 차례씩 들리곤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가까웠지만, 밀양 할매들의 투쟁에 한 번도 함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늘 먼 곳이었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던 할매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수많은 동료들이 할매들과 함께 765KW 송전탑을 막아내기 위해 고단하게 밀양을 오가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따듯한 방 안에서 배불리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하지만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홀로 갈 엄두도 못 냈던 처지라 시가 일로 밀양에 갈 때면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잠시라도 농성장에 들려볼 생각에 항상 마음이 분주했다. 하지만 매번 시가 부엌을 벗어나지 못했다. 차로 1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매번 맘 둘 곳 없이 분주하게 일만 하다 상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였다. 인터뷰란 명분을 빌어서라도 밀양에 가고 싶었던 건.


바람은 새로운 만남과 기회로 이어졌다. 동료 활동가들과 밀양 할매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삶의, 삶에 대한, 삶을 위한 기록의 매력에 푹 빠졌다. 내가 보기에 할매들은 싸움의 와중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고, 삶의 연륜이 선사한 낙관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와 내 가족, 삶의 터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싸움은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과 민주주의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나를 넘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온몸으로 삶을 일구어 얻은 힘이었기에, 내게 밀양은 마치 ‘여성’ ‘할매’ ‘구술’에 대한 부흥회와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랜 기간 만나왔으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목소리였고, 다 안다고 생각했으나 정작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삶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한 밀양 할매들의 구술은 『밀양을 살다』(2014, 오월의 봄)로 발간되었고, 이 책이 밀양에 연대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져 읽혔다. 이 모든 사실은 나를 전율하게 했다.


그러면서 돌아보게 됐다. 내가 만났던 그 무수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많은 시간을 들여 무수한 말들을 들어왔지만 ‘일’로써 필요한 증언을 넘어 그이들의 일상과 삶에 나는 귀 기울여 왔을까? 묻지 않았기에 채 삼켜야 했던 말들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삶들이 너무 많진 않을까? 그들이 말할 수 없었다면, 왜 말할 수 없었는지, 듣지 못했다면 왜 듣지 못했는지 묻고,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해묵은 보도 자료의 한 장, 언론의 한 줄 기사로 묻힌 그들의 목소리, 삶의 곁에 이제라도 한 발 가까이 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불쑥 밑도 끝도 없는 용기가 났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다. 말들과 삶들로 전해지지 못한 공백을 채우는데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경력단절 이후 몇 년 만에 ‘주어’로서 내 몫의 역할을 찾은 느낌이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길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게 새로운 길이라면 그 시간들을 의미 있게 살아 내보겠다고. 그렇게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기록활동의 삶이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