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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하이디 Oct 22. 2024

딸에게

픽션과 논픽션 사이

    

비 오는 수요일 저녁,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버스 안, 너는 힘없이 서 있다. 진공 상태로 멈춘 눈동자는 멍하니 창밖을 직시하고 있다. 비 멍이라도 즐기려는 양. 몇 분이 지났을까? 익숙한 정류장 안내 방송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벨을 누른다.   발을 내딛는 순간 한 겹 더 두꺼워진 피로감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묵직하다. 축축해진 기분은 꿀꿀을 넘어 어두운 지면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타격감으로 뒷골까지 전해져 찌릿하다.      

하루 내내 종종걸음으로 사무실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 기억이 뒤늦게 선명해진다. 세 번째 회의를 들어간 오후 3시, 몸 상태는 이미 방전. 위태로웠다. 점심으로 급하게 먹은 볶음 우동 면발이 내는 불편한 아우성! 두통이 느껴졌다. 타이레놀 두 알을 습관처럼 입에 털어 넣었다. 감기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는 날이면 먹는 약이다. 빠른 효과에 강한 믿음 때문인지 타이레놀은 든든한 보약이 된 지 오래다.     

빗방울은 약해졌다. 우산을 접었다. 머리 위로 내려앉은 실비. 얼굴에 흩뿌리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눈처럼 시원했다. 고된  하루를 위로라도 해 주듯, 몸 구석구석 붙어 다니는 짜증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퇴근 때마다 다가오는 현타의 경종 볼륨을 줄여주었다.      

배는 고픈데 먹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 집 근처 편의점 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의 힘찬 목소리는 너의 몽롱함을 깨운다. 습관처럼 고른 삼각김밥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이 삼각 김밥 인기 많고 맛있어요.” 무뚝뚝하게 결재하는 모습들과는 달리 친절인지 오지랖인지 모를 수다스러움이 오히려 고마웠다. 주말 전까지 버티려면 밝은 에너지를 어디에서든 수혈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새로 오셨나 봐요? 참 친절하시네요. 이 카페라테도 같이 결재해 주세요. 원뿔 행사하는 거 맞죠?” 늦게까지 해결해야 할 서류를 위해 시원하고 부드러운 라테를 고른 너는 전날에 사둔 원뿔 자몽 블랙 티가 떠올랐다. 월급도 원뿔 행사를 가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혼자 배시시 쓴웃음을 짓는다.     

편의점을 나와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딸 바빴어? 점심때 전화해도 안 받던데? 퇴근한 거야?” “아니 이제 하는 중 ” “그래 뭐 좀 먹어야지. 또 편의점 들렀어?” “응 주말에 집에 들를게 삼겹살 말고 목살 넣고 김치찌개 끓여주라.”     

피곤해 처진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너는 한 톤 올린 목소리로 통화를 무사히 마친다. 갱년기 증세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해 신경 써야 했다. 실은 엄마 걱정으로 더 우울해지고 예민해지는 너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회사일 만으로도 힘든 건 너무 충분하니까.     

갑자기 너는 껌을 한 통 살 걸 하고 후회한다. 이어폰 속 애드시런의 노래를 들으며 박자에 맞춰 껌이라도 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은 생각이 스쳤던 거다.      

집에 도착해 어둠을 끄고 불을 켠 순간, 너의 눈은 확 떠졌다. ‘어? 집이 왜 이렇게 깨끗해졌지?’ 식탁 위 뚝배기엔 계란찜이 온기가 가시지 않은 채 훈훈하게 놓여있었다. 가스레인지에 놓인 냄비를 열어보니 김치찌개가 끓여져 있었다. 엄마였다. 울컥한 마음에 식탁 의자에 앉아 뚝배기 뚜껑에 차가운 손을 올려놓았다. 그때 서야 엄마가 남긴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딸, 오늘도 힘들었지? 고생이 많네, 비도 오는데 따뜻하고 칼칼한 김치찌개 든든히 먹고 힘내. 삼겹살 말고 목살 넣어 끓였어. 게맛살 계란찜도 해놨어. 그런데 말이야 딸! 요즘 매일 피곤하고 고생하는 너를 보면서 갑자기 엄마가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어. 젊은 날 하루하루 고생 머니, 피곤 머니, 짜증 머니 많이 저축해두고 나중에 여유로 바꿔 쓰는 건 어떨까 하고. 엄마가 할머니 모시고 살았던 9년. 일하면서 시부모를 모시는 일이 엄마에겐 고생이고 피곤이며 짜증이기도 했어. 하지만 할머니 돌아가시고 보니 그게 다 저축이었더라고. 헉 엄마 말 이해가 잘 안돼 더 짜증 난다고? 헤헤 미안. 일단 맛있게 먹고 힘내! 그리고 주말에 오면 저축해온 짜증 머니 여유로 바꿔 영화라도 보러 가자. 사랑해 우리 딸”      

너는 계란찜 한 스푼을 떠 입안 가득 천천히 넣는다. 눈을 감는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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