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면 충분하다
지난 독서모임에서는 장대익 작가의 《공감의 반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깊고 좁은 공감은 오히려 분열을 낳기에 공감에 있어서 깊이보다 넓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책이었다. 저자는 혐오가 만연한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공감의 반경을 넓힐 수 있을까에 관해 고민한다.
모임을 진행하며 공감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논의가 깊어질수록 이 단어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 체감했다. 이에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개념들에 대해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공감은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으로 나눌 수 있다. 본문의 설명을 빌려오자면 각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감정적 공감(Affective Empathy)
: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보면 반사적으로 나도 같은 감정을 느끼는 본능
2) 인지적 공감(Cognitive Empathy)
: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더라도, 이성과 상상력을 동원해 타인의 입장과 상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능력
개인적으로는 인지적 공감이 감정적 공감보다 훨씬 수월하다. 전자의 경우 근거만 주어지면—논리가 생기기 때문에—납득할 수 있다. 반면 감정적 공감은 논리 없이 순간적으로 상대와 정서적 동기화가 되어야 하기에 더 어렵다. 바꾸어 말하면 인지적 공감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발휘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공감의 반경 (The Radius of Empathy): 한정된 자원
인지적 공감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나에게 이득이 되는 존재들에 한정되어 발현된다. ‘이득이 된다’는 표현이 다소 차갑거나 이해타산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모든 선택은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효용(utility)을 위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모든 선택의 기저에는 유무형의 보상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물질적인 이득을 주는 비즈니스 관계들부터 정서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가족들이 반경 내에 속해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무언가를 나누어 주고 싶다거나, 나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등 존재 자체의 가치적 이득을 제공해 주는 이들 역시 포함된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적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존재에게 더 큰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공감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의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에너지는 한정적이기에 그간 나에게 가장 이득이 많이 되는 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발휘해 왔다. 결국 반경을 넓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들을 바운더리 안에 넣어야 한다는 뜻인데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니까 우리가 반경을 쉽사리 확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정된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즉,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모임 중 공자의 측은지심이 공감의 원형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들었다. 이처럼 공감은 가끔 동정이라는 단어와 혼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말 그대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유교적 질서 안에는 군신, 부자, 장유 등 명확한 위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질서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적 맥락에서—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굽어살피는—수직적 위계는 필연적이다.
'나는 안전하고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너를 가엾게 여기는 시선'이 측은지심인 것이다. 동정의 대상이 때때로 상대가 나를 ‘가여워하는’ 뉘앙스에서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한 까닭에 동정은 상대를 돕고자 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상대를 동등한 주체로 대접하는 데에는 서툴다.
공감은 동정에 비해 수평적이지만 때로는 너무 완벽한 동기화를 요구하기에 가혹하게 느껴진다—이른바 공감 피로(empathy fatigue).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감정은 바로 연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민(compassion)은 '함께(com) 고통받다(passion)'라는 어원을 가진다. 공감이 상대의 고통 속에 완전히 파고 들어가는 것이라면 연민은 그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이다.
까뮈의 처방: 연민이면 충분하다
알베르 까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에는 연민이면 충분하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보자면 대부분의 일에는 완벽한 공감이라는 거창한 원칙을 적용하려 애쓰는 것보다 서로를 연민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까뮈는 거창한 이데올로기,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한 도덕적 기준(성자나 영웅의 모습)을 내세우는 것을 경계했다. 인간은 결함투성이이고 세상은 부조리하며 모두가 죽음이라는 절대적 한계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까뮈의 연민은 우리 모두가 이유 없이 고통을 겪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부조리’ 속에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마음이다—실존적 연대. 거창한 성자가 되어 타인을 구원하려 들기보다 나란히 서서 서로의 처지를 알아주자는 제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