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
이번 주에는 회사에 반차를 냈다. 의외로 여행이나 행정처리 등 특정 목적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연차보다 반차가 더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차를 잘 쓰기란 쉽지 않다
연차는 거액 투자와 같다. 하루를 통째로 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만큼 너무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투입된 자본이 크니 리턴도 커야 한다는 고비용 고부담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기회를 과연 충분히 누린 것인가 의심하게 되고 무엇을 해도 아깝게 쓴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우기 쉽지 않다. 자칫하면 특별히 한 것 없이 얼레벌레 하루가 끝나버리는 허무한 결말로 치닫기 일쑤다.
적은 매몰비용
반차는 확실히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여유를 즐기고 진정으로 쉴 수 있다. 주어지는 절대적인 시간은 연차의 반토막뿐이지만 만족도는 더 클 때가 많다. 연차처럼 내가 어떻게 쉬어야 잘 쉬었다고 소문이 날까 하는 식의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고 오전/오후로 보너스 타임이 주어지는 격이다. 분할 매수를 통해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출근길 시뮬레이션: 최적 경로 탐색과 확률 기반 베팅
사실 출근해서 업무가 하기 싫다기보다 출근길 자체가 고역이다.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거대한 수싸움이 시작된다.
코앞에서 놓쳐버린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 페이즈를 설계한다. 지금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기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1번 플랫폼에서 탑승하는 경우 공간적 쾌적함이 있는 대신 환승 동선 상 이동시간이 길어진다는 손실이 있고, 5번 플랫폼을 선택하는 경우 압사의 위협을 감수하는 대신 최단 거리 환승이 가능하다.
가까스로 탑승한 뒤에는 과연 내 앞에 앉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내릴 것인지 베팅을 해야 한다. 만약 서서 이동해야 한다면 가장 유리한—기대거나 잡을 수 있는 면적이 넓은—자리는 어디인가, 그 최적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은 어떤 것이 있을까 끊임없는 시뮬레이션이 실행된다.
심지어 이제는 이 계산들이 체화되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정작 회사에 도착하면 본격적인 업무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가용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소진한 듯 지쳐있는 것이다.
출근길 미니게임 ★
이 지난한 과정을 타파하고자 이북 리더를 손에 꼭 쥐고 출퇴근길에 오르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기에 몇 가지 미니게임을 고안해 냈다.
1. 중력 무임승차자 응징
: 간혹 정말 필요 이상으로 나에게 자신의 하중을 의탁하는 승객이 있다. 나는 한동안 묵묵히 힘을 주어 그에게 믿어도 좋은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몸을 피해 그가 자신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게임이다.
2. 백팩 거치대 활용법
: 몸집만 한 백팩을 뒤로 멘 채 자꾸만 이리저리 흔들며 공간을 독점하려는 승객이 있다. 곧바로 슬며시 나의 팔과 이북 리더기를 그의 가방 위로 올린다. 그는 모르는 나만의 훌륭한 독서 받침대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3. 가상 경로 레이스
: 이건 주로 퇴근길에 자주 했던 게임인데 꽤나 치열하다. 경로 A코스와 B코스 중 하나를 선택한 뒤, 대중교통 앱을 통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와 실시간으로 경주를 벌인다. 자발적으로—대체 무엇을?—이기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내가 만든—이 자리에서 밝히기 어려운—미니게임들의 종류는 다양하고 시기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되길 반복하며 나의 출근길을 지탱한다. 이렇듯 최대한 즐겨보고자 대책을 강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통근 과정은 쉽지 않다.
오전 반차를 쓰면 여유롭게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한다. 느긋하게 운동을 마치고 반신욕을 즐긴다. 그리고 직접 요리한 정갈한 아침 식사로 나를 채운다. 낮의 햇볕은 아침의 그것과 질감이 확연히 다르다—정말 따사롭다! 만원 지하철 대신, 조금 돌아가더라도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버스에 사치스럽게 올라본다. 헤드폰으로 모든 노이즈를 캔슬하고 좋아하는 밴드 음악을 플레이한다. 리듬에 몸을 맡겨 고개를 까딱이는 바로 그 순간, 온전히 평화롭고 행복하다. 창밖 햇살은 아득하고 마음은 여유롭고 진정으로 건강함을 느낄 수가 있다.
반차는 단순히 업무시간을 줄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출근길의 고역을 안식으로 바꾸어 주는 가장 저렴하고 보장된 회복의 시간이다. 거창한 휴양이 아니어도 좋다. 출근 경로를 비트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여행이 된다. 나에게 가장 완벽한 휴식의 단위는 1.0이 아니라 0.5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