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친절

감사합니다(안감사합니다)

by 지전

존립에 관한 이야기

실존적 공포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 중 존중의 욕구(esteem needs)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존중의 욕구는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타인에게서 오는 것—"저 사람 대단해"—, 다른 하나는 자신 안에서 오는 것—"나는 내가 한 일이 자랑스럽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가 의미가 있길 바라는 마음—실존주의—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존립을 확인하는 방식이 다르며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이 흔들릴 때 실존적 공포를 느낀다고 본다. 나의 경우 '타인과 내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나의 고유성과 독자성이 내 존재의 근거라는 뜻이며, 그것이 흔들리면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금주에 나눈 대화 가운데 어떤 이가 본인은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순간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했다. 앞서 말한 존립의 관점에서 말해 보자면 이 분은 '더 이상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기저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입장이었지만 동시에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다.



이타심 대한 회의감

이타적인 마음에 이토록 회의감—을 넘어 거부감까지도—이 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적인 생물의 본성—이기적 유전자—에 반하는 행동이라서 납득이 잘 되지 않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거의 가지지 못한 마음이기에 생소해서 '정말 그렇다고?' 싶다.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이타적인 행동은 순수한 동기로 유발되어야 한다"는 프레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동기로 유발되지 않은 이타심은 위선이라고 보는 것. 오히려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진정한 도덕적 행동에 가깝고, 본인의 기쁨을 위해 하는 선행은 덜 순수하다고 보는 입장이다—칸트 스타일.


동기가 어떻든 간에 결과적으로 좋으면 된다는 공리주의적 관점도 일부 받아들일 수 있다. 어쩌면 순수한 이타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메타인지가 최선이라고 본다. 만약 메타인지를 통해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이타심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면 이쪽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쿠루루기 스자쿠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캐릭터가 있다: 애니메이션 《코드기아스》의 쿠루루기 스자쿠. 그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위험한 임무에 자원하고 누구보다 강한 정의감을 내세우며 타인을 위한 희생을 삶의 가치로 삼는다.


그러나 그의 행동의 실체는 죽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살해한 살인자라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늘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스자쿠는 메타인지가 박살 난 상태였기에 아마도 본인은 진심으로 자신이 고귀한 이상을 위해 싸운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도 좋다며 위험한 임무에 뛰어든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 파괴적 욕망을 영웅주의 타이틀로 세탁한 것이다.


올 하일 를르슈!

제로 레퀴엠은 이런 스자쿠의 심리 구조를 완전히 꿰뚫은 를르슈가 설계한 완벽한 결말이다. 를르슈는 자신이 직접 필요악이 되어 세상의 증오를 하나로 통합하고 제로에게 소멸당함으로써 복수의 굴레를 끊어 평화를 이룬다. 이것은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방식 그 자체로도 최고의 피날레였지만, 스자쿠라는 위선자를 참교육 하기에도 더없이 완벽한 선택이었다.


감히 죽음으로 속죄하겠다? 응 평생 책임지며 살아가라

제로의 가면을 다름 아닌 스자쿠에게 씌운 것이 가히 천재적이다. 스자쿠 입장에서 가면을 거부할 경우, 그토록 책임과 희생을 외쳐왔던 자신의 서사가 전부 거짓이 되어 스스로 위선자임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선택의 여지없이 제로의 가면을 쓰고 앞으로 평생 본인의 이름도, 죽을 권리도 없이 세상을 지켜야 한다. 이제는 꼼짝없이 "진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얼핏 본인이 원했던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혹독한 형벌인 셈이다. (크으)



쌀국수와 타코 협상 (예시)

감사의 방향

이타적인 마음을 존립 베이스로 삼는 사람—이하 B—과 함께 점심메뉴를 고르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다. 나는 쌀국수를 먹고 싶었고 B는 타코가 먹고 싶었다고 해보자. 나는 B에게 쌀국수가 먹고 싶다고 말을 한다. 반면 B는 본인이 먹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고 흔쾌히 내 말을 따라 쌀국수를 먹자고 한다. 이 경우 B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도움이 될 기회를 제공해 줬으니까 B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투명한 협상

무지성으로 내 의견을 따라주는 선택을 이상적인 소통으로 보지 않는다. 너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공유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각자의 카드를 모두 오픈하고 우리가 가장 많이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함께 찾길 원한다.

우리는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배달로 시켜서 함께 먹을 수도 있다. 어쩌면 차선으로 먹고 싶은 메뉴가 우연히 일치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내가 양보할 테니 다음에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자고 제안해 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각자 먹고 싶은 걸 먹고 만나서 그 이후에 시간을 함께 보낼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한하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모두 차단하고 그저 양보하는 자신에 취해있는 모습은 내가 원하는 가장 마지막 배려의 형태다. 심지어는 본인의 행위에 상응하는 반응을 함부로 기대하는 경우도 빈번하다—채권발행!


So What? (결론)

설사 결과가 같을지라도 우리가 투명한 협상의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쌀국수를 먹게 된 것과 그 과정 없이 선택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B가 만일 "나는 타코가 먹고 싶지만 그것보다 네가 먹고 싶은 걸 먹는 것이 나에게 더 만족스럽기 때문에 쌀국수를 먹어도 좋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정말 큰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진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은 상대의 희생이 아니라 상대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솔직한 태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그런 행동에 쉽게 화가 났다. 서로의 사이에 부려놓아진 것이 몹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 척하는 사람들 특유의 행동.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여러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끊을 수도, 이어갈 수도 있는데 꼭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은 하나뿐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예소연, 《사랑과 결함》)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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