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세계관에서 살아남기
초등학생 무렵의 기억 중에 아주 선명한 것이 있는데, 그건 혼자 걸어서 등교를 할 때의 일이다.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위치한 학교를 다녔지만 그 짧은 등굣길 마저 바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놀이터를 지나면서, 아파트 화단을 지나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셀프 카메라라도 돌아가고 있는 냥 “내 이름은 ㅇㅇㅇ, 나는 0학년 0반 학생이지. 내가 평범한 초등학생으로 보여? 과연 그럴까~” 이걸 매일 했다—물론 머릿속으로. 그것도 매번 다른 버전, 다른 내용으로 말이다. 혹자에게는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당시 투니버스에서 마법소녀물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마냥 귀엽다고만 볼 수 없다. 솔직히 비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주인공 버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때만큼 자기중심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동일한 맥락의 세계관을 살고 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오늘’도 거대한 서사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때가 많다는 말이다.
조셉 캠벨의 영웅 서사 12단계에서 주인공은 일상을 살다가 모험의 부름을 받는다. 두려움에 휩싸인 주인공은 그 부름을 외면하다가 곧 귀인을 만나 성장하게 되고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는 식으로 서사가 이어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시선으로 서사를 따라가며 주인공의 편에 서서 그를 응원하게 된다. 앞서 말한 세계관에 살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을 나의 삶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즉, 플레이어인 동시에 옵저버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메타 세계관이라 칭하겠다.
서사적 필연성: 억까가 반가운 이유
나의 메타 세계관에서 주인공 버프란 어떤 사건도 결국 주인공의 성장 동력으로 환원되는 서사적 필연성을 의미한다. (중요)
우리는 살아가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운수 좋은 날도 있지만 세상에게 억까를 당하는 날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마저도 결국은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될 거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면 클리프 행어(cliffhanger)도 즐기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서사는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번 에피소드 또한 끝이 아닌 과정임을 인지하고 그저 열열한 마음으로 주인공을 응원하면 된다. '주인공이 또 각성 직전에 개연성을 쌓아가고 있구나', '이것은 또 어떤 복선일까', '혹시 지금 내 앞에 이 분이 나의 간달프인가' 뭐 그런 것이다.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中
작가는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고난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을 완성시키기 위해 고난을 던질 뿐이다—물론 정말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 고난을 주는 작가도 존재한다. 주인공이 절벽 끝에 서 있어도 크게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결코 '여러분 삶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가끔 뻔뻔하게 삶을 관조하며 주인공 버프를 가동한다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각자의 서사를 직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