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싫어하기
혐오의 대상은 소소익선(少少益善)이 진리
싫어하는 것은 적을수록 본인에게 좋다. 리스트에 항목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스스로가 더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겨울’이 추가될 것 같은 조짐이 보여서 큰일이다. 그렇다면 리스트에 겨울을 올리는 것이 정당한가 혐오의 근거를 수집해보아야 할 일이다.
겨울이 유죄인 이유: '새벽 박탈', '야외 상실', '친구 부재'
아침형 인간인 나에게 새벽 시간은 성역이다. 그 시간에 뭐든 하고 싶은 걸 하면 하루를 빠짐없이 다 쓴 기분이 든다. 출근 전 신선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동네 산책로를 달리면 오늘이라는 선물 포장을 새로 뜯는 기분이다.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을 느끼며 요가나 명상을 하는 날도 있고 뒷산에 올라 해돋이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겨울은 어둠으로부터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를 투쟁으로 만든다. 그렇게 꾸역꾸역 나와도 내내 캄캄한 세상을 보면 힘이 나지 않는다. 새벽의 질감이 파괴된 기분으로 꼬박 세 달을 어둠 속에서 보내야 한다.
그리고 겨울은 야외를 빼앗았다. 주말이면 일부러 멀리 있는 영화관의 표를 예매하거나 가고 싶은 장소를 찍어서—대개 맛있는 쁘띠갸또를 파는 파티세리나 블랑제리다—그곳까지 무한하게 걸어가는 것을 즐긴다. 갑자기 전력질주를 하기도 하고 거리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도보로 이동하며 보이는 풍경은 차로 움직일 때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겨울에도 꽁꽁 싸매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가벼운 옷 한 겹 걸치고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과 패딩 속에 갇혀서 펭귄걸음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냐는 말이다. 겨울은 나를 꼼짝없이 가택연금 상태에 몰아넣는다.
또 나의—몇 없는—친구들을 가로채간다. 겨울에게 친구를 빼앗겼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다. 연말연시는 약속의 홍수다. 나 역시도 평소보다는 모임에 나가는 날이 잦아지긴 하지만 정말로 가고 싶은 자리가 아니고서는 잘 참석하지 않는 편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고 바운더리 내에 소속된 소수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소수의 사람, 즉 양보다 질이 중요한데 그들은 이 시즌이 되면 다수와의 약속에 내몰린다. 정작 내가 만나고 싶은 이들의 시간이 타인들에게 분산되며 우리 관계의 밀도가 희석된다.
서두에 말했듯 혐오는 적을수록 본인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싫어하기 전에 까다로운 검수 절차를 거친다. 꼼꼼하게 ‘혐오의 입증’ 절차를 거치고 나면 비로소 마음 놓고 싫어할 수 있다. 다음 세 가지 필터는 내가 개발한 혐오 제어장치인데 각 항목에 답해봄으로써 혐오를 입증해 볼 수 있다. 혐오 컨트롤러 가동!
1. 상쇄가능성:
장점이 단점을 상쇄할만한 메리트가 있지 않은가. (예: 짐을 꾸리는 건 너무 귀찮지만 여행에서 느끼는 행복에 비할 수 없다면 그것은 혐오가 아닌 지불해도 아깝지 않은 비용이다.)
2. 범위의 구체화:
대상 전체가 아닌 파생된 다른 점이 싫은 것은 아닌가. (예: 해산물이 싫은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향과 맛이 싫은 것일 수도 있고 작품 전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특정 캐릭터가 싫은 것일 수도 있다.)
3. 해결 가능성:
환경이나 도구의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예: 건조함은 가습기로, 더위는 에어컨으로 해결 가능하다.)
이렇게 꼼꼼하게 겨울의 죄목을 적은 이유는 사실 겨울을 더 잘 견디고 싶어서다. 겨울이 추워서 싫다는 건 너무나 게으른 답변이다. 그런 식으로는 뭐든지 쉽게 싫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되면 본인의 일상 반경이 그만큼 좁아지고 스스로가 더 불편해진다. 정말 싫은 것이 맞는지, 왜 싫어하는지를 알면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월해진다. 오목조목 따져본 결과 겨울에 대한 나의 혐오는 합리적이다—겨울에서 건질 것이라곤 크리스마스뿐이다. 그리고 이제 막연한 짜증에서 벗어나 이 계절을 '최소한의 에너지로 견뎌야 할 구간'으로 분류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하다.
혐오의 대상을 구체화하고 데이터로 관리할 수 있게 되면 그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역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는 쾌적함을 위해 주기적으로 내면의 혐오 목록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